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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2 - 아시아의 해양세계

by 내오랜꿈 2007.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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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 ‘자유 뱃길’ 따라 아시아의 부 ‘넘실’ 
문명과 바다 2. 아시아의 해양세계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05


» 1585년 유럽에서 출판된 멘도사의 <중국사>에 나오는 지도.

19~20세기 이전에 세계의 ‘무게중심’은 분명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있었다. 부와 인구 면에서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중국과 인도가 버티고 있는 아시아가 유럽을 압도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의 인구나 생산규모(GDP)에 대한 통계 연구를 온전히 믿을 수야 없지만 세계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이를 이용한다면 쓸모가 전혀 없지는 않을 터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중국과 인도의 지디피(GDP) 총생산을 합치면 전 세계 총생산 가운데 거의 50%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이후 경제 중심지가 유럽과 미국으로 옮겨가서 2001년 시점에서 세계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각 대륙의 비율을 보면 중국 12%, 인도 5%여서 두 지역의 합(17%)이 서유럽(20%) 혹은 미국 한 나라의 비중(22%)에도 못 미친다. 

19세기 이전 중국과 인도는 전세계 총생산의 50%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동쪽에서 일본에 이르는 뱃길은 아랍·인도·동남아·중국 등 아시아 각지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역하는 ‘만국보편의 세계’로 아시아 부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15세기경 인도양 전체를 집어삼킬 위세로 해상진출에 나섰던 중국이 갑작스레 내륙으로 후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 유럽 선박에 비해 커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던 중국의 정크선.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대에 들어와서 서구가 세계의 경제를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러한 서구의 경제적 지배가 생각보다 뒷시기의 일로서 19세기 이전에는 아시아가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중세 이래 유럽의 모험가, 상인들이 ‘부가 넘쳐나는’ 인도나 중국을 찾아나선 것은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은 일이었다. 

인도양은 오랫동안 유라시아 대륙 해상 교역의 중심 무대였다. 인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 아프리카가 모두 인도양을 통해 서로 소통하였고, 여기에 더해서 중동 지역의 낙타대상(caravan)을 통해 유럽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대 이후 누가 인도양을 차지하느냐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핵심 사항이었다. 결국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와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을 장악하고 인도를 식민지화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세계사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사실 바다를 특정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부터가 공격적인 해외 팽창을 시도하던 근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인식은 육지와는 달리 바다는 통치의 대상이기보다는 누구나 왕래할 수 있는 공로(公路)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동해안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광활한 아시아의 바다는 바로 그런 인식 그대로 누구나 왕래하며 교역을 수행하는 장소였다. 해적과 같은 방해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바다는 자유로운 상업의 무대였다. 상업 활동 중심지인 항구 도시들은 대부분 이방인 상인들의 진입과 활동을 막지 않았다. 후일 유럽 상인들이 비교적 쉽게 아시아의 현지 교역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이 지역에서 이방인 상인들을 환영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다우(dhow), 동남아시아의 종(jong), 중국의 정크(junk) 선 등이 이 바다를 누비고 다니면서 직물, 후추, 도자기와 같은 대중 소비품으로부터 진주, 향, 바다제비집 같은 고급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들을 거래했다. 한 역사가는 이러한 인도양 세계를 두고 ‘만국보편의(ecumenical)’ 세계라고 칭했다. 

15세기까지 아시아의 해상 교역의 특징은 서쪽의 홍해부터 동쪽의 일본에까지 교역망이 연이어져서 동서간으로 대단히 긴 활 모양의 해상루트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주요 간선도로 가운데에서도 최장 루트는 아덴(Aden)에서부터 남중국의 광동까지 연결된 항로였다. 이 뱃길을 타고 아랍 상인들이 중국에 대거 들어와서 중국의 츠통(刺桐) 같은 곳에는 수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특별지역이 형성되기도 했고, 반대 방향으로 중국 상인들이 ‘서양(西洋, 원래 의미는 중국에서 볼 때 말라카 너머 서쪽으로 가는 해로, 혹은 그 너머의 지역을 가리켰다)’으로 진출해 나갔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 상인, 혹은 인도의 클링(Kling), 체티(Chetti) 같은 여러 상인 집단들이 활발하게 무역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광범위한 영역 내의 요소요소에는 아덴, 캄베이, 캘리컷, 말라카 같은 중요한 연결점들이 발전했다. 상업 활동의 안전성, 은행시설, 시장 정보, 치안 등에서 아주 양호한 환경을 갖추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런 항구들이 적절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서 광대한 지역 전체가 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말라카였다. 작은 어촌으로 시작된 이 도시는 곧 상업 활동을 유치하여 이익을 취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를 위해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고, 그 결과 중국이나 시암과 같은 강대국 세력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말라카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상업 세력들이 찾는 국제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후일 말라카를 방문하고 이곳에 관한 여행기를 쓴 포르투갈인 토메 피레스에 의하면 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은 “카이로, 메카, 아덴, 아비시니아, 킬와, 말린디, 오르무즈, 터키, 아르메니아, 구자라트, 말라바르, 실론, 벵골, 시암, 파타니, 캄보디아, 참파, 코친차이나, 중국, 티모르, 마두라, 자바, 순다, 몰디브...” 등등 아시아 전 지역 출신 사람들이었다. 아시아 해양 세계는 우리가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발전해 오던 인도양 세계에 15세기부터 큰 변화가 계속 일어났다. 이전의 초장거리 항해 루트가 권역별로 나뉘어져서, 아라비아해, 벵골만, 남중국해 등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세계가 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변화와 동시에 중국의 해외 활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잘 알려진 바대로 명나라의 환관 정화(鄭和)는 사상 최대의 선단을 지휘하여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순항하여 인도양 세계 전체에 위세를 떨쳤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을 등에 업은 세력이 지역 패권을 잡는 변화가 일어났고,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중국 황제의 권위를 사방에 떨친다는 목표는 확실하게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갔다면 아시아 해상 세계는 확실하게 중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그런데 중국이 힘을 앞세워 인도양 세계에 불쑥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렇게 강대한 해상력을 보유했던 중국이 느닷없이 해상 진출을 포기하고 자신의 내륙 지방으로 후퇴하고는 문을 닫아걸었다는 점이다. 마치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났다가 급작스럽게 스러지듯이 중국은 15세기 초에 전력을 다해 아시아 해양세계를 누비고 다니다가 불현듯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볼 일이지만, 우선 지적할 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무대를 외부 세력에 내어줌으로써 중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는 장기적으로 서구에 밀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해상후퇴’와 곧바로 이어진 유럽의 ‘해상팽창’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갈라놓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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