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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3. 정화(鄭和)의 원정(1405-1433)

by 내오랜꿈 200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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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제국’ 꿈꾼 중국의 위대한 30년
문명과 바다 3. 정화(鄭和)의 원정(1405-143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12

» 중국 송나라 때 만든 등대.

최근 중국, 오토만 제국, 무굴 제국 등 아시아의 여러 제국(帝國)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이 나라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영토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해상 팽창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중국의 명나라 초기에 있었던 정화의 대원정이다.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인도양 세계를 탐험했는데, 연인원 2만7000명을 통솔하여 18만5000km의 거리를 항해한 이 원정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해상 사업이었다. 

명나라 초기 황제의 명을 받은 환관 ‘정화’는 세계 최대 ‘보물선’을 포함한 160여척의 배를 이끌고 7차례에 걸쳐 인도양 대항해에 나선다. 원정 결과 이 지역은 세력재편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430년대초 중국은 해양을 포기하고 대륙으로 몰려감으로써 외부세계에 눈을 감게 되었다 

» 위부터 정화의 보선 / 포르투갈 범선 / 아랍 다우선 / 중국 정크선

정화의 함대는 60여 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정도의 소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기함(旗艦)은 보선(寶船), 서양보선(西洋寶船), 혹은 서양취보선(西洋取寶船)이라고 불리는데, 각지의 지배자에게 전하는 황제의 하사물과 반대로 그들이 황제에게 헌상하는 예물, 곧 ‘보물을 운반하는 배’라는 뜻이다. 가장 큰 보선은 길이 150m, 폭이 60m로서 15세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였을 뿐 아니라, 1800년대 이전 영국 해군의 가장 큰 배보다 3배 이상 큰 배였다. 말하자면 산업혁명 이전 시대에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던 것이다. 

정화의 원정에 대해서 늘 제기되는 문제는 중국 정부가 도대체 왜 그런 엄청난 규모의 해상 탐사를 시도했는가,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시대 중국사 연구의 대가인 조지프 니담은 정화 원정의 목적으로 다음 일곱 가지를 들었다. 첫째, 내전 중에 실종된 전 황제인 건문제의 행방을 확인한다(정화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전 황제를 무력으로 누르고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 전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인도양의 여러 지역 지배자들에게 중국의 위엄을 과시한다. 셋째, 중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게 만든다. 넷째, 중국의 해상 교역을 장려한다. 다섯째, 이상한 동물을 비롯하여 진기한 대상물을 찾아온다. 여섯째, 해도와 연안 방위 등의 사항을 조사한다. 일곱째, 이 지역 국가들의 세력을 조사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로 정화의 원정을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중국과 인도양 세계 사이에는 이미 상품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역 장려가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이다. 흔히 박물학적 목적을 강조하지만, 과연 도자기를 갖다 주고 얼룩말이나 기린 같은 이국의 짐승을 가져오기 위해 그와 같은 대선단을 이끌고 동아프리카까지 갔었는지 의심스럽다. 정화 원정의 정확한 목적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중국 문명에 대해 호의적인 해석을 하려는 니담과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의 해외 팽창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곤 한다. 다음 시대에 있었던 유럽인들의 해외 팽창에서 보이는 극도의 잔인성과 폭력성, 기독교 전도의 배타성과 대조적으로 중국의 팽창은 무력 지배와 수탈이 없었고 상대방 문화를 포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지 않다. 정화가 실론의 갈레에 세운 비석이 대표적이다. 정화는 평온한 항해에 감사하는 뜻으로 불사(佛事)를 개최하고 기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한문, 타밀어, 페르시아어로 새겨져 있는데, 한문 내용은 정화가 항해인들이 기원하던 사원에서 공양을 했다는 사실과 불교 행사에 바친 품목들을 적은 것이고, 타밀어 내용은 중국 황제가 테나바라이 나야나르 신을 찬양하는 것이며, 페르시아어 내용은 알라와 이슬람 성인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관련된 모든 종교의 신들에게 공평하게 예를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종교적 관용과 실용적 정신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정화의 원정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기린 그림 중국인들은 이 동물의 아프리카 이름과 그 생긴 모양이 전설 속 ‘기린’과 비슷하다고 여겨 기린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런 점들만 가지고 정화 선단이 전적으로 비폭력적·평화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럽 대신 중국이 해상 지배권을 차지했다면 공자의 덕과 부처의 자비심으로 사해동포가 평화롭게 살았으리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일이다. 사실 수만 명의 인원과 수백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인도양을 순항한 국가적 대 모험 사업이 전적으로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2차 원정 때에는 해적선 10척을 격침시켰고, 그 수괴를 잡아서 북경으로 압송하여 참수하였으며, 현지에서는 수천 명을 살해하였다. 3차 원정 당시 실론에서 있었던 무력 갈등 사례는 더 특기할 만하다. 실론의 왕 알라가코나라(Alagakkonara)가 정화의 호위대를 유인해 놓고 금과 비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는 그동안 군대를 보내서 배를 불태워 침몰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화는 무력 대응을 하여 왕과 조신들을 붙잡아 북경으로 압송해 갔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이들을 잘 대접한 후 고향으로 보내고 다만 중국 함대에 대들었던 왕 대신 친척 중 한 명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했을 뿐이다. 니담은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여 중국의 평화적인 성격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차라리 다음 번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도양 지역 내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외교술이지 순진한 평화주의의 결과라고 보기는 힘들다. 2천 명의 군인들이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국왕과 조신들을 나포해 오는 과정을 보면 정화 선단은 분명 강력한 무장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화의 원정은 분명 어떤 실제적인 목적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원정 결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중국의 조공국이 되었고 이때까지 해상 강국이었던 자바 동부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제국은 지역 맹주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중국은 그 대신 말라카를 새로운 파트너로 삼았다. 말라카는 중국의 힘을 등에 업고 이 지역의 강자로 급부상하였고, 그 대신 명 해군은 이 나라의 항구 시설을 이용하게 되었다. 특정 국가를 후견하면서 세력관계를 재편함으로써 지역질서를 통제하는 방식은 강대국이 구사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따라서 일부 연구자들이 이 시대 중국을 두고 ‘해양 제국주의’를 거론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 않다. 

»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그러나 중국의 때 이른 해양 ‘제국주의’는 곧 종말을 맞았다. 북방 내륙 지방에서 이민족들의 위협이 계속되고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해상 원정을 할 여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국은 곧 해양 방면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으며, 수도도 북경으로 옮겼다. 지금까지 해상 팽창을 주도했던 환관 세력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삼은 관료들 앞에서 몰락하였다. 그 결과는 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으로 나타났다. 보선은 뜯어서 연료로 쓰고, 선원들은 건축 노동자나 베트남 전투의 군인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정화 원정의 기록마저 없애려고 하였는데, 이는 정화를 아예 중국의 역사에서 추방해 버리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외부 세계에 눈을 감고 고립주의를 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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