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흐르는 소리, 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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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록 밴드의 일원, 문화평론가, 번역가, 전 EBS 세계 음악 기행 DJ. 성기완 씨를 설명하는 이력이다.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성기완. 어디 자리에서든 자신과 주변의 색깔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의 목소리는 혼합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다. 성기완이 말하는 ‘뒤섞인 어울림’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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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은 1994년 시인으로 등단해 <쇼핑 갔다 오십니까?>를 비롯하여 3권의 시집을 냈다. 또한 1999년 록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www.3bf.co.kr)로 데뷔한 후 현재까지 4장의 앨범을 냈다. ‘3호선 버터플라이’는 2002년 마니아를 양산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속 주인공 경이의 소속 밴드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3호선 버터플라이, <나비의 꿈>(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수록곡) 보고 들으러 가기
성기완의 발걸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004년부터 4년간 EBS <세계 음악 기행> DJ로 활동하며 폭넓은 음악세계를 소개해 주었고, 재즈 뮤지션 <마일즈 데이비스 자서전>을 번역했으며, <재즈를 찾아서> 등 음악관련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프랑스 대표 만화 <아스테릭스> 번역자이기도 하고, 대중문화평론서 <홍대 앞 새벽 세시>의 저자이기도 하며, 문지문화원 연구실장으로 문화에 관한 대중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한편, 2008년 시집 <당신의 텍스트>와 <당신의 노래>를 동시에 발매하며 지속적으로 텍스트와 사운드 접합에 관한 실험적 움직임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 성기완 시집 <당신의 텍스트> 보러 가기
* 성기완 시 <자목련 블루스> 낭독(이소라, 이석원 낭독) 들으러 가기
수많은 그의 작업 속에는 ‘성기완’이 있고 ‘그 시대’가 있다. 관련 기사에서는 ‘나의 자의식’이 드러난 작품들이라고 하지만, 그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자의식은 늘 이 사회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성기완을 보면 다양한 공간과 지점 속에서 흐르는 개인이 보인다. 개인과 사회가 만나서 동등하게 줄 수 있는 울림, 그렇게 형성되는 정체성의 주인공을 만나, 그 목소리를 따라가 보고 싶었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2011년 3월의 첫째 날, 홍대 앞에서 성기완을 만났다.
1. 사운드에도 경계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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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슨웹(이하 ‘퍼’) : 요즘 공연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성기완(이하 ‘성’) : 네. 3호선 버터플라이 오랜만에 해서 실은 참 좋았어요. 역시 음악 하는 사람들은 공연을 해야 힘이 많이 나는 거 같아요. 작년엔 공연 원 없이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퍼 : 와.
성 : 12월엔 영국의 모노클이라는 잡지에서 초청을 받아 연말 송년 특집 공연도 신나게 했죠. 관객이 있는 일반 공연은 아니고 잡지에서 하는 라디오를 위한 녹음공연이었는데요, 웹(monocle.com)상에서 라이브 파일 들으실 수 있어요.
퍼 : 최근엔 사운드와 텍스트, 낭독 등의 실험도 많이 하시죠?.
* 산울림 낭독페스티벌 보러 가기
* 연합뉴스 <낯선 텍스트에 담은 사랑> 기사 보러 가기
성 : 최근에 소리를 대하는 저를 다시 봤어요. 계원 디자인예술대학에서 ‘사운드 디자인’ 강의를 하는데, 아이들한테 뭔가 얘기해주는 동안 거꾸로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아, 원래 내가 음악도 음악이지만. 소리 자체에 대해서 애착이 있구나. 있어 왔구나.' 뭐 그렇게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 거죠.
퍼 : 소리에 대한 애착이라면 어떤 면을 가리킬까요?
성 : ‘사운드스케프(soundscape)’라는 개념이 있어요. 소리의 풍경 같은 거죠. 서구에서는 이미 70년대부터 존재한 개념들이지만, 제가 십 년 전쯤 한 작업 중 <나무가 되는 법>이란 음반이 떠올랐어요. ‘아,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구나. 사운드를 이렇게 바라봤었지. 그렇게 길거리에서 녹음하고 다녔었지.’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찾게 되었고요.
퍼 : 어떤 작업으로 이어졌나요?
성 : 최근에 ‘사운드를 아카이빙하자.’ 는 아이디어까지 나갔죠.
퍼 : 사운드 아카이빙? 소리를 수집하여 보존하는 건가요?
성 : 네. 서울을 대표하는 사운드들을 일종의 애뉴얼 리포트(annual report)처럼 보고하고 저장하는 거죠. 그걸 보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사운드 아카이브를 하자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몇 년 전부터 생각해오던 건데 서울문화재단 올해 지원사업 중의 하나로 다행히 선정이 됐어요.
퍼 : 무슨 소리를 어떻게 수집하나요?
성 : 앰비언트 사운드라고 하죠, 서울의 환경을 이루는 일반적인 소리들, 또 서울 사람의 목소리, 그리고 음악, 그렇게 여러 층위의 사운드 중에서 재미난 것들을 골라 녹음하려고요. '소리 지도'라는 게 있거든요. 동네 찾아가서 소리 지도도 그리고 싶어요.
퍼 : 본인 내부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는데, 그게 요즘 경향인 아카이빙과도 잘 맞물린 셈이네요.
성 : 그런가요? 저는 ‘일상적인 소리들을 아카이빙 잘하자.’ 이런 취지가 있어요. 물론 음악도 좋은 걸 골라서 넣어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적인 소리 모두가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요? 이건 제가 소리에 접근하는 중요한 실천 중 하나인 거 같아요.
퍼 : 음악적 실천이요?
성 : 저는 음악적인 소리와 비음악적인 소리를 구분하고 싶지 않아요. 아프리카 갔을 때도 스물 몇 시간 분량의 소리를 녹음해 왔어요. 이를테면 말리 북쪽 사하라 접경 쪽에 통부트(Tombouctou)라는 도시가 있는데, 지나가다 초등학교에서 구구단 외우는 소리가 나는 거에요.
퍼 : 네.
성 : 너무 예뻐요. 외국사람들도 우리나라 아이들 구구단 외우는 거 이쁘다고 생각할 것 생각할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녹음했죠. 말리에서 녹음한 사운드 스무 개 정도 뽑아놨어요. 예쁜 소리들, 인상적인 소리들 책하고 같이 내려고요. 저라는 사람의 움직이는 방법이 이렇더라고요.
퍼 : 사운드를 따라가는 움직임 말씀이세요? 성기완 씨의 작업들을 보면 텍스트도 소리 같아요. 항상 같이 간다는 느낌이에요. 낭독도 그렇고, 텍스트와 사운드 접합시키는 것이나 미디어를 통한 전파와 표현 등 실험적인 것들도 그렇고.
성 : 올해 새로 나올 시집의 제목이<ㄹ> 인데요. 순수하게 사운드 위주의 시집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만들었어요.
퍼 : 사운드 위주의 시집이요? 그건 어떻게 가능하죠?
성 : 간단해요. 뜻을 등한시하면 되죠. 언어는 뜻과 사운드의 결합인데, 뜻을 등한시하면 사운드가 부각되잖아요. 또 하나는 발성기관의 시. 직접 목소리를 써서 말할 때는 사실 뜻보다 톤이나 그런 거 중요하잖아요. 뜻보다는 발성기관이 울림을 주는. 그게 더 몸으로 다가오는 거 같아요.
퍼 : 맞아요.
성 : 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아예 아무 뜻도 없는 <ㄹ> 을 시집 제목으로 생각했어요. 자음 ‘ㄹ’.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자음이에요
퍼 : 왜요?
성 : 좀 묘한데. 음… 자음하고 모음하고 제일 큰 차이가 자음은 뭐가 부딪히잖아요. 입술이든 뭐든. 반대로 모음은 전혀 안 부딪히잖아요. ‘ㄹ’은 그 중간이에요. 영어 ‘r’도 그렇고 프랑스어 ‘r’(에흐)도 그렇고. 거기서 만들어진 게 롤롤롤ㄹㄹㄹ 돌아가는 느낌이잖아요. 그런 특징들 때문에 사랑의 자음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퍼 : 사랑의 자음이요?
성 : 회전하는 거죠. 사랑도 반복과 회전 아닌가요. “사랑해” 그래 놓고 좀 있다 또 “사랑해” 하고. “안녕” 하고 좀 있다 또 보고 싶고.
퍼 : 자음 ‘ㄹ’이 반복과 회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시는 거죠?
성 : 네. 제가 처음 시에 대해 황홀하다고 느낀 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우리 고전을 배울 때였어요. <청산별곡> 있죠?
퍼 : 아, “살어리 살어리랏다.”
성 : 네. 후렴.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누구나 다 그런 경험 있죠? 아무 뜻도 없지만 빠져들지 않아요? 왜 그 시를 그렇게 황홀해 했을까 돌아보면, ‘ㄹ’이 갖고 있는 개방성, 회전력, 회전하는 데 생기는 구심력, 사랑의 느낌. 뭐 그런 것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퍼 : 그래서 ‘ㄹ’에서 사랑의 느낌이 난다?
성 : 노래에 있어서도, 너랑 나랑 둘이 사랑해. 그런데 상승하거나 쭉 일자로 뻗어서 가는 게 아니라, 돌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요.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이 감독은 음악을 어떻게 쓰냐면 ‘시적인 방식으로 쓴다’고 하는 구절이 나와요. 시적인 방식이란? 바로 후렴이다.
퍼 : 노래의 후렴구가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죠. 그 반복에서 오는 리듬이요.
성 : 네. 1절에서 후렴으로 돌아와서 2절로 빠지고 다시 돌아오고. 시작되는 순수한 상태로 돌아오는 거. 타르코프스키는 바로 그 관점으로 음악을 다룬다, 이건데, 다른 어떤 사람의 정의보다 정확한 것 같아요. 결국은 노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데…이건 내 상상이지만, 노래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은 아마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퍼 : 사랑을 노래하다가요?
성 : “사랑해” 그렇게 말해놓고 딴 얘기하다가 “사랑해”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리듬이 생기고.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순수하게 사운드 위주의 시집을 만들어보게 된 거예요. 막상 이것도 발표해서 주목은 못 받겠지만, 나이 들어서 뻔뻔해지니까 “이거 사운드 아트야.” 하는 뻔뻔함 생기면서 종합이 되는 것 같고 그러네요.(웃음)
2. 노이즈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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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 성기완 씨의 활동을 보면 서로 다른 지점, 지점에 있으면서도 지점 간 흐르는 느낌이에요. 경계도 무의미해 보이고.
성 : 사람들마다 좌표가 찍힐 수 있죠. 이를테면 4가지 축을 지닌 좌표, 인기-비인기/주류-비주류의 축을 지닌 좌표에서 뮤지션들을 위치 지을 수 있죠. 그 이쪽으로 가면 갈수록 주류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다. 쭉 가면 빅뱅이나 카라가 있겠고. 근데 서태지는 어디일까요?
퍼 : 주류와 대중적 인기인 것 같기도 한데, 생각해보면 비주류에 대중적으로는 비인기 같기도 하고...
성 : 비주류라 치면, 인기는 있었던 것 아닌가? 하여튼 크라잉넛은 비주류인데 인기가 있고. 조까를로스(불나방스타 쏘세지 클럽)는 비주류인데 인기도 없고. 3호선은 더 밑이에요. 형태형(황신혜 밴드) 같은 경우는 비주류에다.. 뭘까요. 하여튼 이런 좌표가 찍히잖아요. 근데 알 수 없는 게 방향성이에요.
* 크라잉넛 <밤이 깊었네> 보고 들으러 가기
* 불나방스타 쏘세지 클럽 <인간대포쑈> 보고 들으러 가기
* 황신혜 밴드 <짬뽕> 보고 들으러 가기
퍼 : 아, 어느 좌표로 나가고 싶어하는가.
성 : 걔가 어느 방향으로 필 거냐. 여기에서 필 수 있고. 저기로 필 수 있고, 그 방향성은 모르는 거에요. 각 좌표마다 갖고 있는 고유의 방향성이 있고, 개개의 좌표들을 실시간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모른다 생각을 해요.
퍼 : 개개의 좌표들의 방향성을 보면 세상의 흐름이 보일 것 같네요.
성 : 요즘 쎄씨봉 인기죠. 주류에다 인기도 있지만 방향성은 비주류로 통하죠. 김창완 아저씨는 인디 씬에서 공연하기도 하는데 주류 쪽으로 흐르는 면도 있고. 여러 가지 이런 우발적인 방향성들이 만들어내는 잔상들이 있죠. 그걸 우리가 다 봐줘야 하지 않나 싶어요.
퍼 : 그 잔상들이 만들어내는 게 사회의 움직임이 되는 거겠죠?
성 : 꾸물거리는 미꾸라지처럼. ‘어느 자리에 있다’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요.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방향성의 잔상들. 비평가라면 방향성을 예감해주는 사람 같아요. 어떨 때는 뻔한 앤데 잘 말해줄 수 있는 거고, 인디 씬에서 의젓한 앤데 “얜 아니야” 할 수도 있고. 기준은 방향성이라는 거고요.
퍼 : 방향성도 움직이잖아요.
성 : 옛날에는 그 방향성이 한쪽으로 쫙 몰려갔고, 그것들이 민의가 됐고. 이제는 각자가 갖고 있는 방향성 하나가 작은 중심이 되는 거 같아요. 우리는 우리대로, 조까를로스는 조까를로스대로 작은 중심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움직이는 게 중요하고. 그게 큰 흐름으로 모인다거나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할 거 같아요. 주류냐 비쥬류냐 이게 아니라, 어떤 방향성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퍼 :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일관된 방향성을 보이죠.
성 : 각각의 시점에 있으면서 젊은 친구들이 노이즈를 많이 만들면 좋겠는데… 노이즈, 그러니까소음은 중요한 예술적인 요소이기도 하잖아요. 소리예술 하는 사람으로서 하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퍼 : <3호선 버터플라이>는 노이즈 락을 하시잖아요.
* 음악DB사이트 내 <3호선 버터플라이>& 노이즈 락 소개 보기
성 : 하하. 그런가? 하긴 몇 년 전에 노이즈를 재정의 한 적이 있어요. 노이즈를 정의하기 위해서 의사소통 모델을 들자면, 기호학자들이 쓰는 발화자와 청취자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퍼 : 말하는 사람과 청취자요?
성 : 네. 그 가운데 있는 메시지, 그게 기호고, 발화자와 청취자, 그리고 그 사이의 메시지, 이게 의사소통 모델의 기본 구조인데, 프랑스 사람들은 처음 이 모델을 만들 때 이게 완전히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의미론적 지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어서 어떤 불투명성이 있어요.
퍼 : 네. 지평선 위에 있는 지평선, 언어들이 오가는, 즉 기호들이 오가는 지평 위에 의미적 의사소통이 진정하게 이루어지는 지평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 : 맞아요. 그 지평선 이편으로 메시지가 해뜨듯 떠오르면 의사소통이 되는 거고, 그게 그 위로 솟아오르지 못하면 못 알아듣는 거죠. 그게 바로 노이즈라고 생각해요.
퍼 : 못 알아듣는 건 시끄럽죠.
성 :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꼭 소리가 커서 시끄러운 게 아니라 못 알아들으니까 시끄러운 거예요. 실은 소리의 질에 따라 시끄러운 소리도, 조용한 소리도 있거든요. 커피 끓는 소리 같은 건 조용한 노이즈잖아요. 근데 의사소통이랑 관련해서 노이즈란 게 뭐냐면, 의미론적 지평 저편에 있는 거. 근데 예술가들은 그걸 생산해내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요.
퍼 : 예술가들은 의도적으로 의미론적 지평 너머의 것을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성 : 이미 이쪽으로 올라와서 사람들이 의사소통 하기 쉬운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생산해내는 사람. 사회에 그런 예술가들이 많을수록 시끄러울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다양한 의사소통 모델을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있죠. 예를 들어 베트남 언니가 시골로 시집오면, 설날에 뭐 만들어요. 댓잎에 밥을 싸서 베트남 식으로 맛나게 만들 거 아니겠어요?
퍼 : 네.
성 : 그건 조선 시어머니한테는 노이즈예요. 어디 설날에 떡국을 끓여야지 대나무밥을…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던 사회죠. 노이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였죠.
퍼 : 그렇죠.
성 :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베트남 언니가 낳은 애가 초등학교 갔는데 ‘한국은 단일민족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퍼 : 그런데도 아직 다양성을 인정하기 힘들어 하잖아요.
성 : 우리사회가 다성성, 폴리포니(polyphony)가 분명 존재하는 사회고, 필연적으로 정보가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에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는 건 이거야. 이외의 것은 다 노이즈’ 이런 식이죠. 그런데 아직 우리 사회는 ‘쟤네들은 나의 의미지평 너머에서 소통하는 뭔가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훈련되어 있지 않다구요.
퍼 : 익숙하지 않아요.
성 : 한국에서 예술가들은 가능한 많은 노이즈를 생산해서 사람들한테 그걸 익숙하게 만들어야 해요. 가령 남북이 통일됐다고 쳐봐요. 서로서로 온통 노이즈 투성이겠죠. 미리 준비해야 하겠죠 당연히? 예술가들이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생산해 놓으면 처음엔 "저건 뭐야." 하다가도 나중엔 조금씩 인정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훈련이 되는 거죠. 그거 엄청 많이 해야 된다고 봐요.
퍼 : 노이즈에 익숙할수록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일 텐데(중간에 멘트 삭제하고 다음질문과 연결)그게 잘 안 받아들여져서 많이들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 같아요.
성 : 노이즈를 제시할 수 있는 기술도 중요하겠죠. 그러나 아직도 이게 통하지 않는, 기어코 인정해주지 않으려고 하는 망이 있긴 해요. 저희가 노이즈 락을 하는 게 잘하는 거 같아요. 하하. 근데 큰 조직 안에선 더 힘들죠.
퍼 : 조직 안에선 자기 노이즈 만들기가 정말 힘들죠.
성 : 어떻게 좀 해본답시고 해봐야 찻잔 속에 있는 거 같고. 그래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그런 태도, 주눅들지 않은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래야 자기가 생기지. 자기를 없애지 말아야죠
퍼 : 자기를 없애는 것이 권장되는 사회구조인데요?
성 : 그런 구조. 한국은 익숙한 사회죠. 경계에 있다는 건 아직도 내가 어떤 발언이나 행위를 했을 때, 그것들이 여전히 노이즈일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 태도 아닐까요. 노이즈일 게 뻔하지만, 이걸 생산하겠다는 태도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지 싶어요. 그런 면이 경계에 서있는 예술가들이 보여줘야 하는 상징적인 부분들 같고요.
3. 아프리카 음악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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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 EBS 라디오에서 <세계 음악 기행> DJ 하실 때 워낙 좋아했어요. 제3세계 음악 그때 제대로 접한 사람들 많을 거에요.
성 : 그래요? 청취율 낮아서 짤렸는데? (웃음)
퍼 : 음악뿐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을 소개해 주셨던 게 좋았어요. 음악 때문에 아프리카에도 다녀오셨죠?
성 : 네. 서아프리카 ‘말리Mali’를 다녀왔어요. ‘아프리카 말리가 이런 나라구나. 음악적으로 의미 있으니까 여기 꼭 가야지.’ 이렇게 된 거라기보다는요, <세계 음악 기행> 방송을 하다가 ‘어? 이런 데가 있었네’ 싶어서 거의 무작정 가게 됐죠.
퍼 : 방송을 하다가 아프리카 음악에 끌리게 되신 거에요?
성 : 라디오 DJ를 할 기회가 있었던 건 제게 행운이었고, 게다가 방송을 통해 세계음악의 흐름이랄까, 움직이는 방식을 파악한 것도 행운이었죠.
퍼 : 세계음악의 움직이는 근원을 직접 보고 싶은 끌림이 있어나 봐요.
성 : 세계를 돌아다니는 아프로(Afro. 아프리카의 소리)적인 것의 핵심을 보고 왔어요.
퍼 : 아프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성 : 라디오 하기 전에 제3세계에 대해 갖고 있었던 관점은 아주 평범한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하다 보니까 다양한 관점을 접하고, 그 중에도 특히 서아프리카 음악을 들었을 때 귀가 확 트이고 정신이 번쩍 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그래서 제 자신을 돌아봤어요. ‘어? 내가 왜이러지.’
퍼 : 왜 그렇던가요?
성 : 제 음악적 뿌리가 블루스랑 가깝더라고요. 국악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락 음악을 시작한 사람들의 음악적 뿌리가 대체로 블루스 쪽에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미국에서 전래된 락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적 취향을 키웠을 테니까.
퍼 : 대부분 그렇죠.
성 : 그런데 미국에서 백인들이 다 롹커인 거 같아도 정작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는 흑인적인 거죠. 그런데 바로 그 블루스의 뿌리가 서아프리카에 있더라고요. 원래부터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것이 서아프리카 음악을 들으면서 팍! 일깨워진 거에요. ‘아! 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 (중략) 내 뿌리가 이건가 보다. 그러네’ 하면서 그냥 여기서 해결하지 않고, 가고 싶어 죽겠더라고요. 아무런 끈도 없었지만.
퍼 : 아무런 연고 없이 서아프리카를 찾아 가시는 게 쉽지는 않으셨을텐데, 그 과정이 궁금해요.
성 : 가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했어요. 먼저 파리에 갔어요. 뱅상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기자였어요. 우리 밴드가 프랑스 공연 갔을 때 그 친구가 멋지게 사진 찍어서 객원 취재 형식으로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에 기사를 실어준 적이 있었어요. 고맙죠. 저는 또 그가 개성공단 취재를 하고 한국에 왔을 때 서울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구요.
퍼 : 뱅상이 말리랑 연관이 있었나요?
성 : 다짜고짜 아프리카 말리에 아는 사람 있느냐. 하고 메일을 보냈죠. 한참 있다 대답이 왔는데 ‘마다가스카르에서 반정부시위 취재하다가 붙잡혔고, 헤매느라 시간이 걸렸다. 자기 친구 에릭이 있는데 부인이 말리 사람이다. 파리에 가서 에릭을 찾아라.’
퍼 : 그래서 에릭을 찾으셨나요?
성 : “에릭? 나 뱅상 친구 기완이야. 나 말리에 가려고 하는데 만나주겠니?” 하고 불어 좀 하는 후배 한 명과 에릭네 집에 갔어요. 그리고 에릭이 한 명의 연락처를 써주는데 샤브라는 말리사람이었죠. 그리고 무작정 말리행 비행기를 탔어요.
퍼 : 아.
성 : 공항에 샤브와 우스만이 나와있더라고요. 샤브네 집에서 지내면서 우스만이랑 어울리고, 샤브동생 할리두의 친구 냥을 소개받아 북쪽으로 여행가고, 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씩 알아가면서 다녔죠.
퍼 : 소설 같네요.
성 : 샤브가 예술대학 前교수여서, 덕분에 유명한 말리 뮤지션 만나서 같이 잼도 했어요. 거기서도 클럽 죽돌이였죠. 하하. 클럽 가서 뮤지션들과 어울리면서 놀았어요.
퍼 : 와, 정말 음악으로 함께 하셨네요. 말리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실 수 있으셨나 봐요.
성 : 너무너무 따뜻한 사람들이죠. 막 품는. 유럽적인 시각이라든지, 제1 세계적인 우월감이라든지 이런 거 없이 순수하게 존경하려고 간 거고, 그 친구들은 저를 나름 제3세계에서 성공한 데서 와서 부러워해주고, 프레르(형제)라고 해주고. 전 진짜 서울에 사는 사람으로서 말리 사람들하고 일대일로 만났어요. 게다가 이미 핸드폰, 이메일. 그 세대가 엮어준 게 있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말리에서 놀면서 많이 배웠죠.
퍼 : 그 과정과 흐름이 의미가 있으셨던 듯 보여요.
성 : 음악이나 알고 올까. 그런 생각이었는데 아프리카 문화 몇 부분을 핵심적으로 보고 온 것 같아요. 거의 우연히 그렇게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4. 모듈, 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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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은 ‘전체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를 가리킨다. 모듈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전체 시스템에 끼워져. 너는 다양한 너를 모듈화시켜 다시 너에게 끼워. 또는 세상에. 세상과 이질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끼워 – 홍대 앞 새벽세시 ‘현진에게’ 중
퍼 : 기완 씨가 얘기 많이 하셨던 ‘모듈(module)’*이 성기완 씨 자체인 것 같아요. 독립적이기도 하면서 다른 곳들과 접합되고, 기능하는. 모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네요.
성 : 아프리카 음악을 듣다가 ‘모듈’을 생각한 건데, 저는 세계 음악이 아프리카의 속성, 즉 아프로(Afro)적인 성향이 있는 음악을 중심으로 증식하는 과정을 구경한 거죠. 예를 들어 레게가 있으면, 힙합도 있고, 그건 또 레게와 만나 레게톤이 되고, 그게 다시 뭐가 되고... 그런 식으로 끝도 없죠.
* 성기완, <아프리카 음악 기행> 4회 ‘아프로 모듈’ 보러 가기
퍼 : 세계 음악이란 아프로 모듈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모듈이라고 보시는 거군요.
성 : 꼭 아프로가 중심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즐기는 음악의 80%는 그런 거 같아요. 그렇다고 아프로가 무슨 부품도 아니죠. 그 점이 중요한데, 옛날에는 조직에 나사 같은 부품으로 들어가서 봉사하고 끝장나는 건데, 모듈은 달라요. 그것은 끼워지면 일부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체에서 떨어져 나오면 혼자 작동하기도 하는 신체인 거죠.,
퍼 :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 어렵습니다. (웃음)
성 : 부품과는 다른, 부분이면서 전체인 ‘기계’라고나 할까요. 그 ‘기계’의 단위가 ‘모듈’인 거죠.
퍼 : 모듈화된 것들이 자유롭게 움직여 또 다른 기능이나 형체가 생기는 거죠?
성 : 네. 하나의 모듈이 더 큰 모듈 안에 들어가서 기능하기도 하고, 그건 또 더 큰 모듈이 되고, 뭐 그런 식으로 기능을 수행하면서 움직이더라구요.
퍼 : 아프로적 음악이 하나의 모듈이 되어 레게 음악을 만들고, 레게가 또 펑키한 것에 영향을 주고, 그런 것들이 머쉰 시대에 샘플러나 시퀀서를 만나 다시 힙합을 만들어 내듯이.
성 : 하나 존재하는 것에 또 하나 쌓는 게 아니라, 존재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게, 모듈끼리 접합해서 관계를 맺는 게 창조성이죠. 대학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도, 너희도 짝짓기를, 관계를 맺어라.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그렇게 창조성이 탄생한다고 봐요.
퍼 : 관계 맺기 말이에요?
성 : create a new thing, a new object 같은 새로운 물건을 창조하는 게 창조성이 아니고, Create a new relationship,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게 지금 시대의 창조성이라고 보는 거죠.
퍼 : 성기완이라는 모듈은 음악에서도 문학에서도 다 기능하네요.
성 : (웃음). 문학은 전공도 했고, 음악은 사실 좋아만 하다가 차츰차츰 하게 됐죠. 90년대 중반, 처음 음악씬에 발들여놓을 때, 사실은 하루하루 쉽지 않았죠.(중략)
퍼 : 힘든 건 어떤 면에서요?
성 : 발을 제대로 못 붙이고 약간 붕 떠있는 상태였어요. 선배들한테 이런 소리도 들었어요. "너 좀 늦지 않았니. 너 하던 공부나 계속해. 논문 쓰고. 네가 무슨 서태지도 아니고 왜 이러니."
퍼 : 반항심 자극됐겠는데요?
성 : 사실은 선배들 충고가 옳았겠죠. (웃음), 근데 조금만 더 버텨보고 싶은. 그런 거 있잖아요, 결판이 날 때까지. 그러던 와중에 밴드를 조직하면서 슬슬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3호선 버터플라이>가 결성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찬가지 같아요.
퍼 : 마찬가지요?
성 :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건데. 그땐 소박한 생각도 있었어요. 뮤지션들 사이에서 “어? 쟤는 누구지?” 그렇게 대우받지 않고. “형 왔어요?” 이렇게 대우받는 거. 그게 목표였던 거 같아요. 지금도 어느 날은 조금 어렵게 대하지만 공연 있는 날엔 “형 어땠어요.” 그러면서 같은 뮤지션으로 생각하는 거.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거 같아요. 그러는데 10년 걸렸거든요.
퍼 : 와. 소박하면서도 꾸준하시네요.
성 : 꾸준한 거 같아요. 쟨 누굴까 하면 그 물음표를 떼고 싶은 거 같아요. 딱지를 떼고 싶으니까. ‘나 여기 계속 있을래.’ 이런 오기 같은 게 발동하는.
5. 하이브리드 서울 로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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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 라디오 DJ 하시는 거 들을 때, 여행 많이 하신 분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의외예요. 응암동인가? 오래 살던 동네에 관한 글도 쓰셨죠?
성 : 응암동이 어딘 줄 아세요? 모래내에서 좀 더 가면 있어요. 거기가 제 고향이에요. 홍대 근처가 제 고향인 셈이죠. 한 번도 안 떠났었고, 제가 여행 제대로 한 것은 딱 한번이에요. 서아프리카 말리.
퍼 : 그런데도 다양한 분야에서 드러나는 성기완 씨의 여러 활동들을 보면 하이브리드(hybrid), 즉 다양한 것들이 혼합되어 녹아있는 것 같아요. 예전 이메일 주소가 créole(크레올)이셨던 것도 생각나네요.
성 : 와 별 걸 다 아세요! 크레올(Créole)이요? 제 하이텔 첫 아이디였어요. Créole은 남부 미국이나 카리브해 쪽,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흑인의 혼혈이잖아요. 앵글로색슨 계열 농장의 흑인들 중에서도 1/4 백인이면 교육도 받을 수 있고, 피아노도 치고 악보도 읽고. 좀 인정 받았나 봐요. 그래서 재즈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퍼 : 아, 네.
성 : 루이 암스트롱도 ‘루이’가 프랑스계 이름이듯이, 서러움 받는 홍길동 처지이지만 문화적으로 자의식 있는 복합적인 문화, 하이브리드된 문화의 상징인 것 같고. 괜히 재즈의 역사를 읽으면서 왜 그런지 공감을 많이 했어요.
퍼 : 하이브리드된 문화에의 공감인가요?
성 : 아마도요. 에메 세제르,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 같은 흑인 프랑스 계열 작가들 작품을 전공할까 하기도 했어요.
* 에메 세제르(Aimé-Fernand Césaire) : 프랑스령 카리브 모리타니크 출생의 흑인으로, 흑인해방운동 지도자이며 흑인에 대한 시를 표현하는 문학운동에 가담했다.
*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Leopold Sedar Senghor)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 출생으로 세네갈 대통령, 시인으로 활동하며 에메 세제르와 함께 서구중심의 가치를 비평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재평가했다.
퍼 : 외부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발생하는 고유문화의 변질 혹은 혼합된 새로운 문화 같은 것을 그 로컬의 시선으로 재평가하시려고 했나요?
성 : 서울은 근대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된 듯도 한데, 서울이라는 곳이 하이브리드된 미친 도시죠.. 전 그냥 서울 로컬의 눈으로 보는 거죠. 크레올이나 블루스. 락앤롤이 왜 와 있을까. 인순이 선생님을 보자. 여기 계신데 저분은, 저 피의 반은 서아프리카에 있는데, 도대체 저 목소리는 어디서 온 걸까.
퍼 : 음.
성 : 서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왔다가, 미국으로 온 것도 이상한데, 한국에 와서 그 사람이 한국의 어떤 아가씨랑 사랑을 해서… 인순이 선생님은 이 동네에 왜 계실까. 그 분이 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또 왜 마찬가지일까.
퍼 : 블루스. 아프리카의 뿌리가 같은 서울 사람 안에서 같이 흐르고 있는 거네요.
성 : 그러게나 말이에요. 블루스가 왜 여행해서 여기까지 온 걸까. 실은 아프리카적인 건데… 디아스포라. 이산. 강제로 온 거잖아요. 세네갈에서 봤죠. 다카르 바로 앞 바다에 떠 있는 고레라는 섬은 흑인 노예를 반출해가는 마지막 출구였어요. 그 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문" 이렇게 써있어요.
퍼 : 아, 그런 문이 아직 남아 있군요.
성 : 네. 그 문을 나간 어떤 뿌리가 전 세계를 돌고 돌아 어떻게 하다가 응암동 바닥에까지 와서 응암동의 십대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게 된 걸까. 블루스의 그 여행과 나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내 팔자에 블루스는 있을 수 없는 건데. 경기민요나 "아아~~" 내 팔자엔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퍼 : 나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정작 디아스포라의 기행을 하지 않았는데도, 내 뿌리 자체가 혼종적인 거네요, 그렇다면.
성 : 그렇게 봐야죠. 그 사이에 일본 것들도 들어 있고. 그것도 내 팔자에 없는 건데.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난 여행을 떠난 게 아닌데도 이렇게 다양하게 겹쳐져 있으니 도대체 이건 뭘까. 그건 제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게 된 대목인 것 같아요.
퍼 : 그렇죠. 머물러 있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있죠.
성 : 도착해오는 걸 보는 거죠. 딴 데 떠나있으면 못 보는데, ‘어? 쟤네들이 오네. 내 뼈 안에 들어와 있네.’
퍼 :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그걸 또 표현해서 꺼내 보여주시는군요.
성 :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시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100% 1인칭인 것 같아요. 남 얘기는 아닌 거 같아요. 내 얘기만도 아니지만. ‘무의식의 자서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나이기도 하고 언니이기도 하고 아메바이기도 한. 모든 걸 받아 적는 거죠. 내 책임은 아닌 거 같아요. 흘러 들어온 거라고 강변할 수 있죠. 결백한 거? 하하
퍼 :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나에게 흘러 들어온 것들도 결백하게 1인칭으로 얘기하시는 거에요?
성 : 존재 자체로 풍덩 떨어지는 걸 받아 적는, 1인칭으로 적는 걸 버릇이 된 사람들이 시인이죠. 서울이라는 이 도시. 말도 안되게 파헤쳐지고 했지만. 떠나고 싶기도 하지만. 옛날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서울이 한 시각, 한 시점이 될만한 곳 같아요. 마침 제 1인칭 시점과 도시의 맥락이 맞았던 것 같고.
퍼 : 서울에 살았던 로컬로서 형성된 감성이 있나 봐요.
성 : 서울출신 아티스트들 많잖아요. 뭐 부산출신도 많고. 그 사람들이 자기 도시에서 드러낼 수 있는 뭐랄까… 그로테스크함? 바깥에서 배워 갖고 오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오히려 그 안에 그런 것들이 우글거려요.
6. 세상 안에 있지만 잡혀 먹히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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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 좀 더 노출되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대중친화적으로요. 지금은 좀 어렵잖아요.
성 : 이 정도면 충분히 의사소통을 꾀하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웃음). 근데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재주가 없는 거죠 뭐.
퍼 : 시의 경우는, 좀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긴 해요.
성 : 저야 뭐.. 솔직히 내가 누군지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시키는 일을 다하는 거 같기도 해요. ‘난 예술가니까 이런 거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전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게 어딨어. 오히려 전 이래요. ‘예술가라면 시키는 대로 다 하세요. 너무 다 하니까 쟤가 도대체 누굴까 하게 하세요. 저 쪽 사람들이 쟤가 누군지 아는 순간 넌 죽어요.’
퍼 : 드러나지만 안 보이는 예술가?
성 : 생존본능처럼 제겐 이런 게 있어요. 우연히 잘못해서 인기를 끌 수도 있겠지만. ‘누구’ 해서 그 사람이면 뭐. 무슨 노래. 그거 하나가 그 사람을 밀어붙이는 거. 그런 거는 사실은 억압적이라고 생각해요. 방랑끼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퍼 :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거부하는 경향이 참 꾸준하세요.
성 : 하하. 뭐 별로요..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지만. 알 사람 알 수도 있겠지만. 그 와중에 제가 갖고 있는 진정성이 뭔지 알아줄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그 놈이지?’ 이런 생각이 안 들도록 피해 다닐래요.
퍼 : 일상 속에서 그런 방랑자적인 감각, 그런 자아를 어떻게 유지하시죠?
성 : ‘저 포도는 시다’ 이런 거 있죠. 하하. 괜히 그런 것도 좀 있고(웃음), 해온 것도 그렇고 누가 날 알아주면 답답해요. “쟤가 바로 걔지” 그럼 그게 너무 싫어요. 시도 ‘시인답지 않게 써야지’ 그런 것도 있고, 시인다운 태도는 중요하지만. 결과물들이 ‘쟤는 시인이구나’ 이렇게 되지 않게. 그게 세상에서 영원히 멀어지는 방법일 수 있지만 세상에 잡혀 먹히지 않는 방식일 수 있죠.
퍼 : 세상 안에서 있으면서 멀어진다는 것도 아이러니에요.
성 : 이제 나이도 좀 먹고 그러니까요, 그 동안은 정말 어떤 타이밍, 어떤 스탭을 밟을지 모르고 확 밟은 거 같은데, 부글부글 끓는 게 꺼져가면서 ‘밟아야 할 스탭이 몇 걸음 남았구나. 앞으로 이렇게, 또 저렇게, 뭐 그렇게 밟으면 되겠다’ 하는 게 생겨요. 그럼 남은 이 몇 스탭을 잘 밟아야지. 티 안내고. 오바하지 않고 신중하게 잘 밟아가려고요. 그 스탭 밟는 거 자체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이렇게 가볼까’ 하는 우발적인 흐름과 결합되겠죠.
퍼 : 그 흐름의 잔상들도 또 잘 살펴보고 싶네요.
성 : 고마워요. 그 우발적 흐름 속에서도 느낌들. 순간적으로 ‘지금 팔을 뻗어야 돼’ 라던지, 그런 느낌들을 따라가겠죠. 자세하게 봐주시는 몇몇 분들의 관심이나 문제의식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 정도까지가 저의 대중성인 것 같아요.
퍼 : 그러다 보면, <스물아홉 문득>, <마흔 이끼> 그 다음이 오겠죠?
* 3호선 버터플라이 <스물아홉 문득> 보고 들으러 가기
* 성기완 <마흔 이끼> 보고 들으러 가기
성 : 풋. 그건 실제로 눈 속에 이끼 얘기한 건데(웃음).(중략) 어쨌든 제가 워낙 우발적이라서 뭐가 어떻게 될지. 누굴 미워하고 누굴 사랑하게 될지. 어디에 있게 될지. 잘 몰라요. 물론 늘 있겠죠, 이 근처에. 어디 멀리 가진 않는 사람이니까. 그럴 그릇도 아니고 흐흐.
‘인상적이다’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기억에 다르게 남는다’라는 의미라면, 그의 울림, 발성이 주는 울림과 그 발성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문인과 인디 뮤지션. 작가와 평론가. 시와 록. 텍스트와 사운드. 언더와 오버. 머물러 있음과 다른 세계로의 여행. 모듈화된 개인과 사회와의 접합. 이탈과 견딤의 중첩. 반체제와 문화적 실천. 사상이 이동되는 공간, 공간으로 수렴되는 사상. 밖에서 바라보는 안의 세상, 안에 머무르며 유지하는 바깥의 관점.
성기완의 다양한 글과 음성에서 이 같은 단어들을 발췌해서 메모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확장시켜보곤 했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 대한 이야기, 지점과 지점 간의 섞임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경계와 공간의 의미가 흐릿해지기도, 오히려 분명해지기도 하는 이 시점에서, 바로 그 현장을 몽환적으로 흐르고 있는 울림에 좀 더 귀 기울여 들어 보니, 그 안에 뒤섞여 있는 공간과 의미가 나와 함께 뒤섞여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 소리가 흐르며 얼마나 더 여러 소리와 섞일지, 그것이 또 어떤 잔상을 만들어 낼지, 계속 귀 기울여 조용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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