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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날라리’, 배우 김여진

by 내오랜꿈 2011.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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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날라리’, 배우 김여진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박하사탕>, <취화선>과 드라마  <이산>,  <대장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배우 김여진이 2011년 새해, 언론의 연예면이 아닌 사회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해 벽두부터 벌어진 홍익대학교의 청소노동자 해고 문제에 발벗고 나선 모습이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출처:<퍼슨웹> 2011. 03. 06

인터뷰: 두리번, 빼꼼 / 정리: 두리번 (@redpebl) /사진: 김성용





 

배우 김여진의 스크린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여성들이 직접 자신의 성적 욕망과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낸, 당시로선 꽤 센세이셔널한 영화다. 영화 속 세 여자 중 독립적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순이’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나는, 영화를 본 후 ‘순이’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순이’를 연기한 배우의 이름이 ‘김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하면 반가웠다. ‘순이’가 잘 살아가고 있나 확인하는 심정이었달까.


홍익대학교의 청소 노동자 대량 해고 사태로 나의 트위터 속 타임라인이 시끄러울 때, TV가 아닌 컴퓨터 화면 속에서 배우 김여진이 불현듯 나타났다. 홍대 총학생회의 태도를 단죄하는 비난의 목소리가 서슬 퍼렇게 드높을 때였다. 그동안 캠퍼스를 청소해 온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해고를 당하고 농성 중인 마당에 ‘캠퍼스의 면학 분위기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괘씸죄’였다.


그런데 그녀는 비난의 중심에 있던 총학생회장에게 온기가 담긴 글로 손을 내밀었다. 비난 여론들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었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바자회, 모금, 신문 광고, 김장 담그기 등 다양한 움직임들이 생겨났다.


한편 그녀의 정치적 행보를 우려하는 사람들을 향해 김여진 본인은 정작 쿨하게 한 마디씩 툭툭 던졌다. 타임라인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같이 놀아요.”, “전 그냥 날라리여요.”. 그런가 하면 젊은 무명작가의 부고를 듣고는 “펄쩍펄쩍 뛰어도 계속 눈물이 납니다.”라며,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비난의 한가운데 있던 대상을 감싸 안을 수 있었던 그녀만의 온기의 정체가 궁금했다. 쿨하게 응대하다가 뜨겁게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녀만의 온도 조절 비법을 알고 싶었다. ‘순이’처럼 살 수 있는 비결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합정동 모처의 카페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2월 중순, 홍익대학교 청소 노조의 농성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인터뷰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는2월 말 홍익대 청소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가 결정되고 49일간의 농성이 끝나리라 예상하지 못 했다. 그때는 마침 그녀가 출연한 영화 <아이들>이 개봉한 직후였다. 홍대 청소 노동자들을 극장으로 초청하여 상영 행사를 가졌던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만나지 않고 벽을 쌓는 사람들




 

퍼슨웹(이하 퍼) : 어제는 홍익대 노동자 분들과 함께 영화 ‘아이들’ 상영회를 가지셨다고 들었어요. 좋아하시던가요?


김여진(이하 김) : 예, 좋아하셨어요. 영화를 30년 만에 본다는 분도 계셨고, 감독과 배우들이 와서 무대인사 하는 걸 처음 보시는 분도 계셨고요. 즐거운 자리였죠.


퍼 : 슬픈 사건을 다룬 영화를 파업 중인 분들에게 보여드리는 일이라,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한데요. 너무 우울해지지는 않았나요?


김 : 내 슬픔에 가득 차 있을 때 남의 슬픔을 보고 나면 위로가 돼요. 다른 이의 슬픈 마음을 받아 주면, 내 것이 조금 사소해지는 효과가 있거든요. 이렇게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니까, 그분들도 ‘아이들’ 영화 보는 것 좋으셨을 거예요. 어제도 그래서 괜찮았던 것 같아요.


퍼 : 위로가 되는 자리였다니 다행이네요. 비정규직 노조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연예인으로 요즘 화제가 되고 계신데요, 그 계기가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이었죠?


*김여진 블로그, 홍익대 총학생회장에게 보내는 편지 보러 가기 


김 : 네, 농성하고 계신 분들에게 밑반찬이라도 드리려고 찾아갔다가 우연히 홍익대 총학생회장을 만났어요.


퍼 : 그 글로 쇄도하던 비난의 목소리를 잠재우셨죠. ‘같이 밥 먹으며 이야기 좀 하자.’고, 조금 다른 관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김 : 직접 가서 봤기 때문이죠.


퍼 : 직접 가서 보셨기 때문이라고요.


김 : 네, 사람은 뭔가를 하려면 직접 가서 봐야 해요. 저 역시도 그렇지만, 우리는 사건을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서 보잖아요. 그러고는, 빨리 탓할 사람을 결정하길 원해요.


퍼 : 이번에는 홍대 총학생회장이 그 대상이 되었던 셈이네요.


김 : 예, 그런데 거기에 함정이 있죠.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직접 가서 보면, 그때에서야 사람이 보이고, 감정이 보이죠. 그렇게 되면 소통이 안 될 리가 없죠. 저는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사람들이 서로 직접 만나지 않고 있어서라고 생각하거든요.


퍼 : 트위터로 모인 지지 모임에서 조선일보에 내신 광고도 홍대 총장에게 만나서 식사하자는 내용이었죠?


김 : 네, 맞아요. 저는 홍대 총장과 청소노동자 분들이 소통을 하기를 원해요. 학교 쪽에서는 소통이 두려워서 침묵하고 외면하고 계시거든요. 그러면 서로 힘겨루기가 되는데, 이건 쓸데없는 힘 소모죠. 재미도 없고. 될 수 있으면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총장님하고 밥 한 번 먹었으면 좋겠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총학생회장은 물론이고요.


퍼 : 광고 나간 이후에도 학교로부터 아무 연락 없나요?


김 : 없죠. 그렇지만 제가 편지를 썼던 총학생회장은, 저에게 트위터로 아주 긴 글을 보냈어요.


퍼 : 어떤 내용이었나요?


김 : 내용을 다른 사람한테 공개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는데 답이 없더군요. 그래서 공개 안 했어요. 섣불리 공개했다가는 다시 화살과 시선을 받을까 봐서요. 처음과는 조금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그리고 총학생회에서 공식적으로 현수막을 걸었죠, 지지한다고.


퍼 : 잘 됐네요.  



20대를  비난하는  일은 누워서 침 뱉기




 

퍼 : 이번 일을 계기로, 사회에서 20대를 바라보는 모순된 시각에 문제제기를 하신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대 청년들과 만나는 활동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어요.


김 : JTS라는 구호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대학생들과 함께 인도를 두 번 다녀왔었죠. 그리고 평화재단에서 기획하는, 청년 열린 아카데미에서 학생들과 대담하는 프로그램을 작년부터 두세 차례 진행했어요. 그 외에도 20대 청년들하고 만나 이야기 나누는 기회를 자주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을 훨씬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것도 다 직접 만나봤기 때문이죠.


퍼 : 역시 만나는 게 중요하네요.


김 : 네. 어른들은 신문에 난 한두 줄, 다른 사람들의 말 몇 마디만 듣고 쉽게 평가를 내려버리죠.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다르고 하나하나의 고민이 얼마나 큰지는 모른 채로 말이죠. 나는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그 아이를 그렇게 키운 건 누구며 그런 세상을 만든 건 누구인가요?


퍼 : 20대들을 비난하는 기성세대에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김 : 이를테면 비난 받던 홍대 총학생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 “저들의 일은 내 일이 아니다, 저들의 투쟁 때문에 내 학습권이 방해 받는 게 싫다.”는 생각은, 사실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일 뿐이잖아요. 그러니 다 자기 얼굴에 침 뱉기죠. 청년들한테 많이 미안할 뿐이에요.


퍼 : 미안한 감정을 느끼세요?


김 : 예. 아주 미안하죠. 안타깝고요. 지금, 20대가 가장 힘든 세대예요. 경제적으로 분명히 풍요롭고 옛날보다 많은 걸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두려움으로 대하도록 강요받으면서 길러지고 있어요.


퍼 : 두려움을 강요받는다.


김 :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어떤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행복한 삶, 그가 원하는 삶을 살아볼 기회를 박탈한 거죠. 어려서부터 학원만 다니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만을 목표로 삼게 만들고, 경쟁의 사다리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못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퍼 : 안타깝습니다.


김 : 어떻게 보면 이런 것도 다 우리 생각이고 많은 20대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발랄하게 살고 있어요. 이런 친구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죠. 그 친구들한테 나라에서 팍팍 지원도 좀 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잖아요?


퍼 : 집회에서 발언*하시는 모습을 봤어요. “요즘 대학생들은 졸업해도 어차피70프로는 비정규직이 된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더군요.


*김여진 발언 보러 가기


김 : 지금은 정규직을 가진다는 게 너무너무 힘들고, 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죠. 인생의 질, 인생의 결이 완전히 달라져 버려요. 우리가 그들에게, 이상한 계급 사회를 물려주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지역적으로, 직업별로 이상한 서열을 만들어서 가르치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 젊은이들은 다른 걸 바라볼 수가 없죠.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는 걸요.


퍼 : 얼마 전 최고은 작가의 사망 소식에 대해서도 마음 깊이 슬퍼하시는 모습을 트위터에서 봤습니다.


김 :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충격 받고 슬펐어요. 그래서 울고 그랬죠. 그런데 이 일로 가장 피해를 보는 친구들이 누구인 줄 아세요?


퍼 : 글쎄요.


김 : 바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은 친구들이에요. 그 소식이 전해진 바로 그 날, 제가 밥 먹는 곳 옆에서 친구들이 이야기하더군요.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어서 그쪽으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식구들이 말리고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퍼 : 가족들이 그 뉴스를 보고 걱정하시겠죠.


김 : 그렇죠. 이렇게 젊은이들의 가장 찬란해야 할 꿈 하나를 완전히 꺾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 일이 어떤 함의가 있고, 어떤 원인이 그 문제를 불러 왔느냐를 떠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가 중요해요. 이제는 우리 젊은 친구들이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하는 작업에 겁을 내기 시작해요.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미래가 없어요.


퍼 : 젊은이들의 창의력을 사회에서 삭제해 버렸기 때문인가요?


김 : 네, 이제는 컨텐츠거든요. 건물을 짓고, 기계를 만드는 건, 할 만큼 다 했어요. 이제는 어떻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어떤 내용을 채워갈 것인가가 중요하죠. 세계 산업의 흐름도 그렇고요. 우리나라의 지금 모습은 이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고 있는 거예요. 요 모양 요 꼴로 나라를 만들어 놓고, 젊은이들에게는 경쟁하라고 강요하는 일밖에 하지 않으니, 창의력, 꿈꿀 기회, 모두 박탈해 버린 거라고 할 수 있죠.



나는 날라리다, 나는 행복하다




 

퍼 : 지금 활동하시는 홍익대 청소 노조에 연대하는 트위터 모임의 이름이 ‘날라리 외부세력’이네요. 활동하는 모임의 이름을 ‘날라리’라고 제안한 것도 김여진 씨세요?


김 : 네, 저였어요. 일단 이름이 중요하잖아요. 그러고는 단순한 원칙들 몇 가지를 정했죠. 우선, 서로 가르치려고 들지 말자.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방법으로 하자. 하고 싶은 사람끼리 모여서 하고 싶은 거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하면 돼요.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 없어요.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따지지 말고요. 그 원칙을 처음에 정했죠.


퍼 : 그 모임에서 많은 계획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 참 즐거워 보였습니다.


김 : 신나고 재밌게 하자는 것이 저희 생각이에요. 노조분들께선, 저희에게 자꾸만 미안하다, 고맙다고 하시는데 저희는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신나요!”(활짝 웃음) 이런 식이죠. 저는 이런 게 참 좋아요.


퍼 : ‘개념 배우 김여진’이라는 평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 저는 개념 배우라는 말을 싫어해요. 개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말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장 옳아요. 각자가 옳은 방식으로 하면 된다고 하면 될 것을 꼭 내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고 간섭하곤 해요.


퍼 : 정치 활동을 하는 연예인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신지요?


김 : 저는 인생에 대해 꼭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요. 그냥 이럴 때가 있는 거죠, 언제 또 이런 활동을 해보겠어요? 기회 왔을 때 즐기는 거죠. 덕분에 만나게 된 분들도 즐겁게 만나고요. 겁날게 뭐가 있겠어요. 저는 스스로 이름 붙인 이름이 날라리고, 여기에 충실하기로 했으니까 괜찮아요. 그 덕분에 많이 자유로워요. 그래서 행사 참여에 대한 제안은 굉장히 많았지만, 거절도 가볍게 해요.


퍼 : 제안하신 분들이 실망하시거나 서운해 하시지는 않던가요?


김 : 처음부터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았으니, 별로 기대를 안 하세요. 집회 참석 제안도 대부분은 거절했어요. 집회를 나가보니까, 참 안타깝더라구요. 옛날에야 음향시설이 없어서 핸드 마이크 가지고 소리를 질렀다고 치지만, 빵빵한 음향 시설에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소리를 지른다고 상대가 잘 듣나요?


퍼 : 그건 아니죠.


김 : 원래 큰 목소리에는 사람이 귀를 막아요. 작게 이야기해야 귀를 기울이게 되거든요. 누군가가 늘 슬프고, 비장하게 소리를 지르면, 그 말이 아무리 맞는 거라고 하더라도 별로 옆에 안 가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에요. 슬프고 화난 건 누구든지 싫잖아요. 그래서 운동을 하려면 제일 먼저 자기가 행복해야 해요. 이 일이 행복해 보이고, 좋아 보이고. 그래야, 보면서 ‘저거 하면 재밌나? 나도 해볼까?’ 이렇게 되죠.


퍼 : 즐겁고 행복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김 :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이 행복해 보이고 가뿐해 보여야 주변에 사람이 모여요.


퍼 : 행복한 삶을 강조하시는데,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요?


김 : 자기 자신한테 백 퍼센트 달려있죠. 행복하지 않다고 남을 탓하는 건 점점 괴로워지는 길일 뿐이에요.


퍼 : 그 말씀은, 불행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김 : 나를 포함한 어떤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는 일이 있다면 해결을 해야죠. 그리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거죠. 약간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라는 게 있잖아요? 분노를 하고 화를 내야만 문제가 풀리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퍼 : 각종 토론회나 시사프로그램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오시죠?


김 : 제안은 많이 받지만 자제를 하고 있어요. 제가 자꾸 딴 얘기를 해버리면, 관심이 흩어지니까요. 이미 언론에서 다루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어요. 항상 이런 식이잖아요. 조금 관심을 보이다가 다른 사안이 생기면 또 관심이 흩어지고. 언론이라는 건 새로운 것들을 다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개인적인 관심사나 개인적인 발언은 한 가지를 끈질기게 할 필요가 있죠.


퍼 :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는데요.


김 : 끝을 보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세상이 바뀌죠. 끝까지 보고 평가를 제대로 해야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싸움을 할 수 있거든요.



건방진 신인 배우




 

퍼 :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스크린에 데뷔하셨지요?


김 : 예, 데뷔작에서 다행히 좋은 작품을 만났죠. 저는 당시에 연극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고, 영화나 TV출연에는 전혀 욕심을 안 내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저를 찾아와서 보시고 캐스팅해주셨죠. 굴러온 복이라 할 만해요.


퍼 : 제안이 마음에 들었나요?


김 : 네, 무척 신선하고 세련된 시나리오였어요. ‘순이’라는 캐릭터도 참 좋았죠.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 남자, 세간의 이목에 개의치 않고 사는 여자라는 점이 멋져 보였죠.


퍼 : 저도 ‘순이’에 깊은 인상을 받고 김여진 씨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실제 김여진 씨도 ‘순이’와 비슷한 느낌이세요.


김 : 글쎄요, 지금은 꽤 비슷해졌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저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어요. 남자 때문에 속상해하기도 하고, 연애하면 마음 아파하는 일도 많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었죠. ‘순이’의 캐릭터를 좋아하고 이해하고는 있었죠, 머리로는. 그래서 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퍼 : 그래서 ‘순이’ 역할을 맡기 위해 노력하셨나요?


김 : 아뇨, 역할은 좋았지만 꼭 해야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오디션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와서 갔고, 오디션을 썩 잘 본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2차, 3차 오디션에 또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안 간다고 했어요.


퍼 : 왜요?


김 : 연극 공연으로 무척 바빴거든요. 매일 무대 청소부터 의상 준비, 소품 준비, 분장 등등 배우가 직접 다 해야 했어요. 그래서 ‘캐스팅할 거 아니면 괜히 바쁜 사람 괜히 오라 가라 하지 마라’고 했죠. (일동 웃음)


퍼 : 대단한 배짱인데요. 그랬더니요?


김 : 감독님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하시고, 피디님이 저에게 전화하셨어요. 험한 말씀도 섞어 가며 ‘너, 이게 무슨 기회인 줄 아느냐, 이걸 하면 네 인생이 바뀐다.’고 하시더군요.


퍼 : 그래서요?


김 : 저는 그랬죠. ‘나는 지금 내 인생에 불만이 없다, 무대에 서는 걸로 족하다, 내 연기는 이미 봤지 않느냐’고요. 저에게는 그 당시에 하고 있던 일이 재미있었고 중요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저의 그런 모습이 그 캐릭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한 달 뒤에 다시 전화가 왔더군요. ‘캐스팅 해 준다면 올래?’ 하고요. 그래서 갔죠.


퍼 : 하하하, 그 후에 정말로 인생이 바뀌던가요?


김 : 바뀌었죠. 연극배우에서 영화배우가 되었고, 상도 받았고요. 그런 후에는 방송에도 출연하게 되었죠. 연극하고는 멀어졌고, 연극을 하던 시절에는 연봉이 백만 원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는 연봉이 몇 천만 원 단위로 올라갔죠. 이렇게 경제적으로 달라지니 생활도 달라지고, 거리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겨났어요.


퍼 : 연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김 : 음. 말씀 드렸듯이 저는 삶의 방향에 대해 ‘꼭 이래야 한다’는 당위가 없어요. 연극을 충동적으로 시작한 것처럼, 영화도 하게 된 것이고 기회가 이어지니까 그냥 했어요. 연극의 기회가 잘 안 닿기도 했고요. 한동안은 새로운 것에 대한 재미를 느끼면서, 영화와 방송만 하면서 지냈죠.


퍼 : 연기를 처음 시작하실 때는 왕따가 되신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김 : 포스터라도 붙이게 해달라고 극단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배우로 무대에 서게 됐으니, 지나치게 운이 좋았죠. 남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왕따가 됐던 것도 있었고, 또 연극하는 분들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이기도 해요.


퍼 : 연극하는 분들의 권위주의적 문화요?


김 : 연극, 영화계가 다른 분야보다 심한 것은 아닐 거예요. 한국 사회 전반이 그러니까요. 그렇지만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온 저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이 많았죠. 저는 여성이라고 해서 차별 받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뭘 해야 한다거나, 혹은 뭘 하지 못한다면, ‘아니, 대체 왜? (어깨 으쓱)’하고 반응하게 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연기를 하러 갔더니 “야, 커피 한 잔 타와!”하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군요.


퍼 : 그랬군요.


김 : 저는 그러면 ‘왜요?’하고 반문했으니, 눈 밖에 날 만했죠. “야, 오빠라고 불러,”하는 말을 들으면 “나는 오빠가 없는데 네가 왜 내 오빠냐”는 반응이 나왔고요.


퍼 : 하하하, 많이 부딪치셨겠어요.


김 :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자유로워야 하는 사람들이 군대문화라니 웬 말인가 싶었죠. 그러다 보니 상대 역할, 특히 남자 상대 배우들하고도 부딪칠 때가 많았어요. 이 장면에서 이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면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고 말을 하면, 상대 배우들이 굉장히 기분 나빠하더군요.


퍼 : 왜죠?


김 : 제가 여자고, 후배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후배가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하더군요. 저는 권위주의에 대해서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거기에 대해 저항했죠. 아니, 끝까지 적응을 안 했죠. 상대 배우가 그렇게 하시면, 저는 연기를 못 해요. 같이 연기하는 건데, 자기 것만 고집하고 내 이야기를 안 들어주거나 약속을 안 지킨다거나 하면, 할 수가 없죠.


퍼 : 연기는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한데, 이런 상황이라면 힘드셨겠네요.


김 : 저는 그런 걸 별로 힘들어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미워할 테면 미워해라! 나는 이제 너랑 안 논다!’ 하는 거죠. 저는, 그게(권위주의 문화에 적응하는 것) 안 되니까요.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게 옳지 않고,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퍼 : 이렇게 권위주의를 싫어하시는 분이 드라마 <이산>에서 ‘정순왕후’를 연기하기는 참 힘드셨겠어요.


김 : ‘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나도 갖기 싫고 남이 가지려고 애쓰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 정순왕후는 권력의 화신이었잖아요. 이해하기 너무나 힘든 순간들이 있었죠. “대체 왜 저럴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권력에 목을 매는 사람이 될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덕분에 정순왕후를 하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어요. 배우라는 직업은 이래서 매력 있죠.



권위와 폭력에 대한 알레르기




 

퍼 : 권위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들과 부딪히는 일화가 한두 개씩 있기 마련인데요.


김 : 많아요. 매 학년마다 사고를 쳤죠. (일동 웃음)


퍼 : 몇 가지만 이야기해주시겠어요?


김 : 중학교 1학년 때, 제가 반장을 했었죠. 반장을 하려면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저희 담임 선생님이 사적인 심부름을 너무 많이 시키는 분이었어요. 안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했죠. 그랬더니 그 학교에 계신 여자 선생님들 전부가 단결을 해서 저를 왕따시키시더군요.


퍼 : 선생님이 학생을요? 어떻게요?


김 : 수업 들어오시는 선생님에게 ‘차렷, 경례!’를 하려고 제가 일어나면, “됐어, 안 받아.” 하시고, 우리 반만 숙제를 굉장히 많이 내 주고 한 명만 그 숙제를 안 해도 단체 기합을 주시면서 “누구 때문인지 알지?” 하시고요. 그런 일을 6개월을 당했어요.


퍼 : 어떻게 마무리되었나요?


김 : 보다 못한 다른 선생님이 저의 어머니에게 따로 연락을 하셨대요. 저는 몰랐는데, 어머니가 교무실에 와서 용서를 비셨다더군요. 저는 그걸 나중에 알았어요. 그렇지만 끝까지 저는 내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다르게 건의하는 방법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렇지만 수업 시간에 사적인 심부름 시키는 건 잘못된 거고, 그랬다고 해서 학생에게 그렇게 대하는 건 잘못된 거죠.


퍼 : 그렇죠.


김 : 고등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야간 자율학습에 대해서 ‘오늘부터는 1분도 늦게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셨던 날이었는데, 한 친구가 아파서 조퇴를 하게 됐어요. 그 친구가 아프니까 다른 친구가 택시를 잡아주러 갔다 왔는데 그만 조금 늦었죠. 그런데 그 친구를 선생님이 막 때렸어요. 그걸 보면서, 저는 너무 화가 나서 책상을 확 밀어버렸어요.


퍼 : 드르륵?


김 : 아뇨, 확. 제가 교탁 바로 앞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책상을 뒤엎어 버렸어요. 그래서 아주 죽도록 맞았죠. (일동 폭소) 그런 기억들이 꽤 있어요, 손으로 엉덩이 때리시는 남자 선생님에게 안 맞겠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뺨을 맞기도 했고요.


퍼 :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일까요?

 

김 :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해요. 이런 저였기 때문에, 대학에 가자 마자 한 달 만에 강경대 열사가 죽는 걸 보면서 집회를 갔겠죠.


퍼 :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김 : 백주 대낮에 경찰이 대학생을 패서 죽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대자보를 보고 혼자서 집회를 찾아갔죠. 그리고 이렇게 집회를 나가다가 보니까, 계속 말이 안 되는 걸 보게 되었어요. ‘아니, 이렇게 독한 최루탄을 국민에게 쏘다니, 아니, 경찰이 국민을 이렇게 살벌하게 패다니, 저렇게 무자비하게 끌고 가다니.’ 하면서요.


퍼 : 이런 김여진 씨에게 부모님들이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김 : 수십 번 말씀하셨죠.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요. 어머니가 저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퍼 : 부모님과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김 : 항상, 혼자서 일을 시작해 놓고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딸이었어요. 대학을 오고, 그 이후 학생운동을 하고, 연극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들에서 엄마가 제 삶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죠. 다 제가 알아서 해왔어요.


퍼 : 왜 그렇게 됐을까요?


김 : 공부 잘 하는 모범생 딸이었으니 엄마의 기대가 높았죠. 엄마는 제가 좋은 데 시집가고 번듯한 직장을 갖기를 바라셨으니까, 엄마가 절 이해할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스무 살이 넘었으니 엄마한테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엄마는 저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죠. 많이 싸웠어요.


퍼 : 요즘은 좀 어떠세요?


김 : 이제는 엄마는 한 사람의 여자, 나를 키워준 사람, 그래서 고마운 사람이라고,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더군요. 오히려 엄마를 잘 받아들이게 됐어요. ‘아,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조금씩 하고 있어요.



쿨함과 뜨거움, 온도 조절의 비법




 

퍼 : 결혼 생활이 궁금해요. ‘순이’는 왠지 결혼을 안 했을 것 같았거든요.


김 : 이 결혼 잘 했다고 가끔 자랑해요. 결혼을 해서 사람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결혼이 좋은 결혼이죠. 계속 저 자신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운 사람이에요. 저를 한결같이 예뻐해 주고, 외로울 때 힘이 되어 주는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죠.


퍼 : 요즘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지지해 주시나요? 아니면 걱정하시나요?


김 : 아무 것도 안 해요. (일동 웃음) 일이 많아서 아주 늦게 들어가더라도, 무심하게 기타 연습하고 있어요. 요즘 한창 배우는 중이거든요. 헐레벌떡 집에 들어선 저에게 그냥 덤덤히 “이리 와서 좀 늘었나 들어봐라.” 하죠. 일단 집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일상이 펼쳐지니까, 저도 편안해요. 가끔은 넌지시 물어봐요. “일은 해결될 것 같냐?” 하고요. 그러면 제가 “아니, 기미가 없네?”라고 대답하고, 끝. 어떻게 보면 서로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네요.


퍼 : 어머니와도, 남편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가 봅니다.


김 : 맞아요.


퍼 : 가족일수록 오히려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김 : 거리두기는 외면과는 달라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자는 거죠.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엄마에 대한 어떤 기준이 있고 욕심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다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이죠. 엄마들도 마찬가지예요. ‘넌 내 딸이니까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여기서 조금 물러나서 한 사람, 한 여자, 이렇게 받아들이자는 거죠. 제가 해 보니 좋은 방법인 것 같더군요.


퍼 : 그런가 하면 살아가는 데 ‘공감’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많이 하시던데요. 말씀하셨던 ‘거리두기’와 ‘공감’은 어떻게 함께 가는 건가요?


김 : 거리를 둔다는 건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집착이란, ‘너는 이렇게 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리를 둔다는 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래야 그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요. ‘아, 너는 이럴 때 슬프구나’라고, 이유를 불문하고 그 슬픔의 감정을 느껴주는 것, 이게 공감이죠. 그런데, “네가 지금 왜 슬퍼? 네가 지금 거기서 슬프면 돼?”하고 판단하는 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거죠.


퍼 : 공감을 잘 하기 위해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 거죠?


김 : 그렇죠, 우리는 다 성인이니까, 너무 밀착하지 않는 게 좋아요.


퍼 : 공감하는 것과 동정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김 : “불쌍하다”는 감정은 ‘저것은 남 일’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물질적인 것을 던져주는 것, 이런 게 동정이죠. 그런데 공감하고 연대하는 건 누구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똑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느끼는 거죠.


퍼 : 슬픈 일에 마음껏 깊이 슬퍼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김 : 저는 책을 한 권 읽어도, 인물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그 폭이 큰 편이에요. 특히 슬픔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느껴요. 슬픈 소식을 들으면 많이 울고, 한동안 그 감정 안에 있는 편이에요. 이런 제 성격이 힘들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은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퍼 : 말씀하신 것과 같은 성격을 두고,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이성을 찾으라’고 하거나 ‘오지랖이 넓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 : 음, 슬픈데 아무 것도 안 하면 힘들죠. 나 혼자 슬퍼하다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외면하다가, 외면하니까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면, 세상을 원망하게 돼요. 미워하게 되고요. 그런데요, 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사실 가장 나쁜 거거든요.


퍼 : 왜죠?


김 : 죄책감은 절대로 어떤 것의 원동력이 될 수 없어요.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나쁜 게 이 죄책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계기가 된 것이 영화 ‘박하사탕’이었어요. ‘박하사탕’이 바로 죄책감에 대한 영화예요. 평범하고 착하게 사랑하며 살던 영호라는 사람이 광주에 가서 한 여자를 죽이고 나서부터 죄책감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죠.


퍼 : 네.


김 : 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조금 똑바로 볼 필요가 있어요. 느껴야 할 슬픔은 느끼고, 그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해야 될 일을 해야죠. 그런데 그렇게 못 하니까 죄책감이 생기는데, 여기에 오래 사로잡혀 있으면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뒤집어 씌울 대상을 찾아요. ‘저것들이 나쁜 거였어’라고.

 

퍼 : 이를테면 어떻게요?


김 : 이게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 드러나는 방식이 광주에 대한 거죠. 저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비하와 편견들이, ‘알량한 죄책감’에서 시작된 거라고 생각해요.


퍼 :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김 : 대학 시절에는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를 원동력으로 운동을 했기 때문에 오래 못 갔어요. 사람이라는 동물은, 화를 오래 내지 못해요. 누가 화를 내면서 살고 싶겠어요? 지쳐서 못 하죠. 이제는 슬픔이 분노나 죄책감으로 바뀌지 않도록 조금씩 훈련하고 있어요.


퍼 : 좋은 수업을 받는 느낌이네요.


김 : 하하, 그런가요. 제가 무진장 혼자 잘난 척하고 있나 봐요.


퍼 : 좋은 말씀이신데요, 뭐. 하하. 



마음을 나누며 나의 길을 간다




 

퍼 : 여배우로서 살아가는 것, 어떠세요?


김 : 여배우라는 직업은 한국 사회에서 욕망의 정점이죠, 환상의 정점이고요.


퍼 : 김여진 씨가 그 환상과 욕망을 추구하시지는 않으시죠.


김 : 저는 추구하지 않죠.


퍼 : 저라면, 내 직업과 삶의 지향이 모순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 : 여기서 제가 만약, “난 떠야 돼, 예뻐야 돼, 인기가 많아야 돼, 돈 벌어야 돼”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래서 힘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지금은 연기는 즐거워서 하는 거고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내 연기에 대해 자신도 있고요. 돈이 벌리면 좋은 거고, 안 벌리면 안 쓰고. 그렇게 사니 힘들지 않아요. 이렇게 제 방식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굉장히 확고해요.


퍼 : 요즈음의 행보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들도 많이 접하시죠?


김 : 제 블로그에 가면 댓글로 많이 남겨져 있죠. 댓글은 안 보려고 하는데, 아는 분이 댓글로 투쟁 소식을 남겼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보다 보니, 악플들이 많더군요.


퍼 : 그런 글들을 보면 마음이 어려우실 것 같은데요.


김 : 그렇진 않아요. 그냥, “됐거든?” 해 버리죠. (웃음) 그 사람은 세상을 그렇게 보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죠.


퍼 : 마음의 힘이 아주 튼튼한 분이라는 느낌이에요. 그 비결에는 뭐가 있을까요?


김 : 카톨릭 신자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우연한 기회에 법륜스님을 알게 되고 정토회를 알게 되면서, 불교 수행법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어요. 지금도 ‘길벗’이라고 해서, 노희경 작가님을 필두로 해서 배종옥 선배, 한지민 씨, 또 많은 방송작가님들이 모여서 방송연예인들의 수행 봉사모임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 수행과 봉사활동을 함께 해요.


퍼 : 마음 수행이라고요?


김 : 네. 정기적으로 모여서 마음을 나누는 훈련을 해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예요. ‘옳다, 그르다, 네 것, 내 것,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이런 것들은 다 빼고, ‘아, 지금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보는 훈련을 하거든요. 그러면 조금 힘이 붙는 것 같아요. 남의 말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을 하면 거기에 대해서 구애 받지 않고 내 길을 갈 수 있는 거죠.


퍼 : ‘순이’처럼 말이죠?


김 : 그렇죠. ‘순이’가 보여줄 수 있는 쿨함이라는 게 바로 저런 모습이죠. 인정하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그렇군요.’라고.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거죠.


퍼 : 이후의 방송 출연 계획은 어떠세요?


김 : MBC에서 하는 드라마에 출연하게 돼서, 3월부터 촬영에 들어가요. 그 준비로 요즘은 수화를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5월까지는 주말마다 연극 ‘엄마를 부탁해’ 지방 공연을 다녀야 하고요. 그래서 바쁜 상반기를 보내게 될 것 같네요.


퍼 : 매체에 글도 쓰기 시작하셨죠?


김 : 저는 마감이 있는 글쓰기, 청탁 받아서 하는 글쓰기에는 익숙하지 않은데, 큰 마음 먹고 조금 해 보려고 해요.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글을 쓰는 연습을 한번 해보기로 했어요. 잡지 ‘빅이슈’에도 연재를 시작했고, ‘한겨레’에서 칼럼*이라는 것도 써 보게 됐고요.


*김여진 문화 칼럼 <날라리 나는 꼴을 두고 봐 주세요> 보러 가기


퍼 : 글로 만나게 될 새로운 만남, 기대하겠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외부의 힘에 좌우되지 않는 나의 삶을 살기 위해 남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뜨겁게 공감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남겨준 몇 가지 금언들은 분명 마음에 새길 만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순이’처럼 타고났을 것만 같았던 배우 김여진도 역시 나아지고자 연습하고 노력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팬 미팅에서 시사 토론으로, 시사 토론에서 인생 수업으로, 박장대소와 진지한 끄덕임이 이어졌던 이 날의 자리는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친 지 이틀 후, 홍익대 노사는 합의에 도달했다. 해고되었던 노동자들은 전원이 고용승계 되었다. 하나의 싸움을 ‘끝까지 지켜본’ 배우 김여진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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