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고전 공부, 좋은 삶과 좋은 앎의 일치!” - 고전평론가 고미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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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필동에 자리 잡은 ‘감이당’에서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이번엔 의역학(醫易學)이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란 부제의 『동의보감』(그린비, 2011)도 냈다. 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의 키워드는 ‘몸, 삶, 글’이다. 그간 고미숙을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는 ‘수유 너머’였다. 인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서온 ‘수유 너머’를 떠나, 새 둥지를 튼 그의 도전이 궁금했다. 감이당 위층에 있는 ‘남산강 학원’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유 너머’와 마찬가지로 함께 밥을 해먹고, 공부하는 생활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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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 와, 필동에 이런 곳이 있어요?
고미숙 : 도심 속의 시골이죠. 택시 타려면 15분은 나가야 해요.
정재승 : 원남동 수유너머엔 가봤어요. 고병권 선생님도 뵙고요.
고미숙 : 어느 순간, 공간이 너무 커서 나를 누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공부의 지향, 성향 모두 달랐기 때문에 공간을 나눠야겠다 싶었어요. 이진경 선생님은 홍대 앞에서 ‘수유너머 N’을, 혜화동에선 '수유너머 R'이 운영되고 있어요. 이곳에 온 지는 한 달 열흘 됐네요. 저는 2층에 의학, 역학 하는 동의보감 연구소에 있어요. 다시, 조그만 밴드로 시작하는 거죠. 남산강 학원은 후배들이 합니다. 공간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정재승 : 주목할 만한 책들을 많이 쓰셨습니다. 독자도 많으시고요. 어떻게 공부하고 책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독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는 국문과로 가셨죠.
고미숙 : 제일 얘기하기 싫은 부분이에요. 숨기고 싶은 건 아니고요. 독문과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20대를 허무하게 보냈다는 걸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에요. 들어간 이유는 그야말로 썰렁합니다. (웃음) 처음엔 어문계열로 들어갔어요. 입시지옥을 거쳐 대학에 갔죠. 대학에선 뭔가 근본적인 학문인 동양사상을 해야지 생각하다 중문과를 가고 싶어했어요. 자연스럽게 어문계열로 갔죠.
그렇게 1학년을 다니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데 80% 이상이 영문과를 갔어요. 저는 중문과를 가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반색을 하셨어요. “너 혹시 외교관 자식이냐?” 이러고 보니 광부의 자식인거죠. (웃음) 그때 저는 한문을 배워야 근본적인 질문이 해결된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절인연이 맞지 않아서인지, 뭔가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없었어요. 국문과는 생각 안 했고, 그러다 선택한 게 독문과였어요. 얼떨결에 간 거죠. 졸업할 때까지 20대를 허망하게 보냈죠.
정재승 : 구체적으로, 그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한데요.
고미숙 : 독일어에 대한 열정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욕망이 겉돌았어요. 80년대 운동권이 학교를 지배하던 때였죠. 학생운동도 못하고, 고민은 실존적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였어요. 도서관에 가도 욕망이 겉돌았어요. 독문과는 모두 원로 선생님들이 계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수업시간에 긴장감이 없었어요. 서클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80년대를 저처럼 맹하게 보낸 청춘이 없을 걸요.
20대는 꿈을 모색하는 기간… 나도 맹하게 보냈다
정재승 : 지금 학생들도 비슷한 고민을 해요. 고등학교 때 얻은 정보만으로 학과를 선택하고요. 비슷한 고민을 하는 청춘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겠어요.
고미숙 : 저 나름대로는 비 제도권에 머물렀어요. 종교단체도 갔고 여러 네트워크를 했습니다. 교파를 떠나자! 하는 초교파 운동 같은 것도 했고요. 소박한 모임이었죠. 아무튼 끊임없이 접속을 시도했어요. 그러면서 4학년 때 어떤 결론을 내린 것 같아요. 10대 20대의 꿈은 확실하지 않아요. 분명하다면 가짜죠. 그걸 모색하는 기간이 청년기에요. 그러기 위해선 꼭 사람을 만나야 해요.
지금 청춘을 보면 사람을 안 만나요. 너무 위험해요. 사람이 귀하다는 걸 몰라요.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때문에 중, 고생을 자주 만났는데 그때마다 사람을 만나라고 했어요. 그래야 생각이 깨지고 뭐가 오죠. 사람에게 필요한 건 정말 사람 밖에 없어요. 『동의보감』 공부 하면서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러면 저처럼 인생역전은 좀 됩니다. (웃음)
▲ “삶을 위한 공부, 남을 위한 공부” ― 공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책,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정재승 : 열정을 바칠 대상을 찾으신 거잖아요. 그게 언제죠?
고미숙 : 3학년을 올라가지 못하고 휴학을 했어요. “나에 대한 탐구를 해야 돼!” 이런 생각도 했죠. 누가 보면 사회에 뜻이 있어서 학교를 쉰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고 휴교령 때문에 학교를 못 갔어요. 그렇게 보내고 복학을 했는데, 운동권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재편 되었어요. 거기도 어정쩡하고, 나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공부를 찾고 있었어요.
연애를 해도 몰입이 안 되고, 혼란스러웠어요. 독문학도 재미있긴 했는데, 뭔가 모든 걸 건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방황한 거죠. 그러다, 4학년 때 저희 지도교수님이 하는 수업을 듣고 확 바뀌었죠.
정재승 : 누구셨죠.
고미숙 : 김흥규 선생님이요. 창작과 비평사에서 날리던 젊은 평론가셨죠. 그 분 고전문학 강의가 워낙 유명하대서 들으러 갔어요. 그 수업에서 존재의 중심과 딱 만난 것 같아요. 아! 여기(배꼽 아래를 가리키며) 단전에 신호가 왔어요. 더 고민할 게 없었죠.
선생님께서 『홍길동전』 『춘향전』을 읽어주셨어요. 그 수업의 밀도에 완전히 빠졌어요. 우주가 진동하는 느낌이랄까? 매 작품을 읽고 A4 10장, 15장 보고서를 써서 내는 게 과제였는데, 모두 첨삭해 주셨어요. 진심이 오가는 관계가 형성됐죠.
사실, 대학에서 맺어지는 관계는 학점위주잖아요. 그런데 학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어요. 그때 “아! 저 선생님처럼 글을 쓰고, 가르치고 싶다!”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200%를 발산했던 것 같아요. 사실, 취업이 안돼서 괴로워하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모두 취업하던 시절, 혼자 백수생활
저는 시대를 앞서는 청년 실업자였어요. 요즘 대학에 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백수가 이렇게 많은 시대에 백수인 건 얼마나 떳떳하냐!” 저는 모두 취업을 하는데, 혼자 백수인 상황을 겪었거든요. 그때 선배들은 말했죠. “뭐 하러 취직을 하려고 하니? 시집이나 가!” 멀쩡한 대학 나와 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괴로웠어요. 경제적 자립을 못한다는 게 수치스러웠어요. 그러다 겨우 출판사에 들어갔는데, 상상과 너무 달랐어요. 저자를 만나고, 책을 보며 성장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한 자리에 앉아 계속 교정지만 보는 거예요. 중요한 건 다른 책은 절대 못 본다는 사실! 교정지가 안 오는 날도 많아 정말 괴로웠어요. 사전을 만드는 규모가 큰 출판사였는데, 참고서 만드는 시즌엔 사전이 뒷전이었거든요. 다 본 교정지를 종일 봐야 하는 고통. 정말 말 못할 정도였어요.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 실험하자! 이런 생각에 일단 견뎠죠. 이른 아침엔 단소를 배우고, 저녁엔 책을 읽었어요. 어떤 점에선 고마운 회사죠. 책을 읽지 못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알게 해줬으니까요.(웃음) 그러다 사표를 던지고, 대학원 시험을 치렀습니다. 전공을 바꿨기 때문에 대학입시보다 처절하게 공부해야했죠.
정재승 : 박사과정 동안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
고미숙 : 전에는 실존, 종교적 깨달음, 구원 같은 추상적인 것이었다면 대학원에 가서는 역사와 마주하게 됐죠. 역사와 글쓰기가 어떻게 결합하게 되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박사과정 끝날 때까지의 화두였습니다. 문제는 글쓰기가 안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전엔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석박사 과정 5년간 혹독한 수련을 받았어요. 사실 행운이죠. 누구나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다면 빚이라도 내서 대학에 가라고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런 걸 못 받는다면 대학은 다닐 필요가 없죠.
정재승 : 어떤 식의 수련이었나요?
고미숙 : 완전히 바닥부터 시작하는 수련? 글쓰기는 물론, 고전문학 소양도 한문도 바닥이었어요. 누군가는 “이런 수준의 인간이 대학원에 온 건 처음이다!” 이런 말까지 했다니까요. 한마디로 기본이 안 되어 있었어요. 정말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 같아요.
그땐 김흥규 선생님이 국문과의 수재들도 지도학생으로 받아주지 않아 삼고초려 했다는 말이 들렸는데 저를 받아주셨어요. 졸업하고 1년 반 있다 학교로 돌아갔는데 저를 기억하고 계셨어요.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제가 기억에 남으셨나 봐요. 그때, “결국 교실에서 뭔가가 일어나는구나. 밀도가 정말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바닥이다 보니, 한 학기 한 학기가 고통스러웠어요. 연애든 돈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공부뿐이었죠. “세상에 이것보다 힘든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당시 저희 집이 파산까지 했었어요. 뭐가 있어서 파산을 한 건 아니었고. 어머니가 보증을 서주셨는데, 그 분이 자살을 하신 거예요. 그때 시골에서 800만원은 지금 8천, 1억쯤 될걸요. 일이 터지기 바로 전에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만약, 입학 전에 터졌다면 못 갔겠죠. 공부운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록금을 댈 수 있을까 고민도 했지만 배우는 걸로 충분하다 생각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그린비, 2007) - |
글쓰기와 토론, 바닥에서 배우다
석사 논문 쓰고, 박사과정 들어가서도 토론을 못했어요. 질문을 못할 정도였어요. 선배들의 발표를 들으면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되는 거죠. 학설로 논증을 하면 끼어들지를 못했어요. 박사과정 1년 지나고 토론에서 입을 뗐죠. 그때부터 가혹하게 후배들에게 독설도 했고. (웃음)
정재승 : 그래서 질문이 중요하다고 책에도 쓰신거고요.
고미숙 : 맞습니다. 정말 1년간 모든 토론에 참여했는데,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천재적인 선배들이 많았어요. 거기서 살아남았다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에요. ‘18, 19세기의 시가 양식’이 논문 주제였어요. 사극에서도 정조의 시대가 주목 받죠? 18세기 르네상스가 일어난 때죠. 당시, 많은 평론가들이 민족주의담론을 내놨는데. 그때 떠오른 게 판소리입니다. 구비문학에 집중 조명했던 때죠. 사실 정조 자체보단 다산이나 실학파가 관심사였죠. 그때 맑스주의와 함께 계급이 들어왔죠. 그 담론을 어떻게 해석해서 결합할까? 그게 관심사였죠. 사설시조의 계급적 성격, 18-19세기의 시가양식이 어떤 변곡점을 겪었나? 이런 문제를 다뤘습니다.
정재승 : 학위를 받고 공동체는 어떻게 모색하게 되신 거예요?
고미숙 : 윽! 박사를 하고도 또 실업자가 됐습니다. 정말 부끄러웠어요. 백수로 졸업했는데, 박사가 되고도 또 백수가 되다니! 무엇보다 가르치는 현장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돈은 사실 벌 수 있었죠. 강남에 진출한 논술 강사들은 문학 석, 박사가 있으면 몸값이 뛰었거든요.
그러나, 나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현장이 필요했어요. 교수가 되어야 하는 절박한 이유는 나의 현장을 확보하는 거니까요. 그게 막막했죠. 95년에 처음 했던 일은 고전문학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었어요. 고전문학으로 밥벌이를 하겠다 생각한 거죠. 제 삶을 180도 바꿔준 학문이었고, 너무 재밌는 분야였거든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 재미를 모를까? 뭔가 중간에 매니저가 없어서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그걸 하고 싶었어요. 전 모든 학문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고전문학의 ‘매니저’를 결심하다
천하에 흘러 다니지 않는 공부는 의미가 없어요. 아쉬운 건, 대중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때 제일 먼저 한 게 『고전문학 이야기 주머니』라는 대중서를 썼어요. 선배들과 동료들을 꼬드겨서요. 반응이 꽤 괜찮았죠. 인세를 받으니 정말 좋더라고요. 계속 해보고 싶었어요. 우연치 않게, 웅진출판사에서 그 책을 본거에요. 고전문학을 정리해달라며 원고료를 주는데! 무려, 1천만 원이었어요. 인세도 아니고 원고료만. “어머! 내가 선동렬보다 연봉이 높네!” 이런 생각하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웃음) 교수들에게 주면 언제 원고가 올지 몰라서 저한테 맡긴 거죠. 그 다음해엔 문학평론가를 했어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있었고, 이인화씨 논쟁이 일어났죠. 이인화 씨가 고전문학을 인용하는 평론을 썼는데, 제가 그걸 보고 할 말이 생겼던 거죠. 그렇게 논쟁 대열에 들어갔죠.
정재승 : 『영원한 제국』 논쟁은 아니고요?
고미숙 : 아니고, <상상>이라는 잡지에서 고전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너무 엉성해보였어요. 제 사주팔자를 보면 검객의 기질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독설이 있는 대로 나온 거죠. 고전문학을 하는 여자평론가로 주목을 받았어요. 당시 제 논쟁을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 중인 김탁환 씨가 받았어요. 이문열씨의 <선택> 논쟁에도 들어가고. 그게 스포츠신문에 나왔어요. (웃음) 그렇게 평론계에서 조금 알려졌죠. 이후로 이인화씨는 작품 활동이 별로 없어 아쉽네요. 얼마 전 방송국에서 김탁환 씨와 마주했는데 너무 반가웠어요. 그러다 여류 소설가의 시대가 왔어요. 공지영, 은희경, 신경숙. 또 글을 많이 썼어요.
정재승 : 어떤 비판을 하셨나요?
고미숙 : 공지영은 멜로적 순정이죠. 감정의 기류가 멜로를 포기하지 못해요. 여성의 질곡이라는 식이죠. 그걸 왜 못 버릴까? 그걸 물었죠. 쳇바퀴 같은 거죠. 또 다시 낭만적 사랑를 하고 굴욕적인 파탄을 겪고. 그것뿐이었어요. 반대로 은희경은 냉소가 보였습니다. 사랑에 빠질까 봐 냉소하는 모습? 순정과 냉소 사이가 읽혔어요. 이런 일들을 하며 대학교수를 포기하게 되었어요.
정재승 :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나요?
고미숙 : 사실, 치사했죠. 원서낼때 첨부자료도 엄청 많이 내야 하거든요. 거의 한 보따리죠. 그런데, 왜 교수들 연봉을 안 밝혀요?
정재승 : 맞네요.
고미숙 : 왜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지 않죠?
정재승 : 물어보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죠.
고미숙 : 그렇죠! 연봉이 맞지 않으면 일을 안 할 수도 있는 건데. 교수들도 말을 안 해줘요. 너무 작아서 창피하거나, 많은 걸 내세우기가 그래서인지. 나는 공부를 하고 가르치기 위해 가는 거지, 모든 걸 작파하고 교수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너무 정보가 없었어요.
그때 종교 대학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알았어요. 신자 증명을 다 해야 해요. 나름 무신론자가 된지 오래였는데, 이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잖아요? 담임 목사가 물어봐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계시죠?” 그러면 제가 “서울에 와서 잘 못하지만 마음으로 열심히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토할 뻔 했어요. 정말요. 굴욕적이었죠. 그 일이 결정적이었죠. 그리고 사실은 누가 채용이 될 것인가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죠. ‘너무 소모전이다. 이 시간에 내가 글을 쓰고 공부를 한다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낫겠더라고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정말 실용적으로 생각한 거죠.
‘이렇게 떳떳하지 않은 걸 언제까지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했죠. 내가 원하는 현장을 펼칠 수 있다면 뭐 감수해야겠지만. 갔는데 내가 원하는 연봉도 아니야, 학생들과의 교감도 없어, 그러면 왜 교수를 해? 이런 구체적인 계산이 있었죠.
밥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
정재승 : 그렇게 수유 너머를 만들게 되셨나요?
고미숙 : 그러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민족문학사연구소에서 공부도 했어요. ‘서사연’에서 푸코, 들뢰즈 강의를 들었어요. 뭔가 길을 봤어요. 새로운 공부의 길을 찾고, 이런 공부를 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죠. 그때 제가 임대아파트에 살았는데 책이 많아지니 공간을 넓혔어야 했어요. 그걸 포기하고 수유리에 개인 도서관을 만든 거죠. 세미나를 시작했죠. 잘 하는 사람들 불러서 강의를 시키고, 후하게 강사료와 먹을 걸 주니 모두 좋아했어요. 먹을 걸 잘 주면 사람들이 공부를 잘 하는구나! 이런 진리를 깨닫고 만찬을 열었죠. (웃음)
정재승 : 비용은 어떻게 충당했나요?
고미숙 : 독서지도 하는 알바를 했는데, 돈이 꽤 됐어요. 원고도 쓰고요. 사실, 저는 돈을 쓸 데가 없었어요. 집을 늘리지 않고 차도 관심이 없으니까요. 서울에서도 돈이 별로 안 들어요. 서울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건 고정관념이에요. 밥값은 세상 비용 중 가장 싸죠. 지금은 많이 올랐지만 그때 동네 밥값은 5천원을 넘지 않았어요. 한 달에 몇 십 만원이 든다면, 그 돈으로 모든 사람이 마음껏 먹을 수 있다. 1년에 500에서 1천 만원이에요. 아파트 한 평도 못 늘리는 돈이죠. 그렇게 계산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면! 그게 인생의 굉장한 노하우였죠. “밥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 집기들이요? 주울 데가 너무 많아요. 산 물건이 없었어요. 거의 어디서 주웠어요. 리모델링하는 학교, 학원이 많은데요. 책상, 의자 이런 것들을 안 가져가서 난리에요. 그걸로 잘 만들었죠. IMF라 사무실 임대료도 반으로 떨어졌고요. 건물 주인이 제일 가난했던 시절이었죠.
정재승 : 이진경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고미숙 : 서사연에서요. 사실, 제가 제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어요. 먹을 것도 잘 사주고 했더니 저를 변호사 부인인 줄 알더군요. (웃음) 그런데 고전문학 전공자라고 하니 그 공부를 잘 모르더라고요. 그만큼 멀리 있는 공부를 하니까, 소통이 잘 안됐고, 그래서 정체를 밝히기도 좀 뭐했죠.
이진경 선생님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번역하고 한국에 알리던 때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공간에 왔죠. 그러다, 거기가 해체되어 같이 건물을 구하러 다니다 독립채산제로 동거만 하자, 그렇게 시작한 거예요.
정재승: 아니! 저는 뭔가 철학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코뮌의 융합, 이런 거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고미숙 : 물리학자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한데요.(웃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요. 그런 건 다 거짓말이에요. 생활을 생략했을 때 나오는 말이죠. 생활은 밥입니다.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있는 저는 그들의 학문이 필요했고, 그들은 경제력이 별로 없었으니 서로 상생한거죠. 그렇게 공부가 섞이니, 사람들도 다 섞였어요. 공부를 같이 하고 밥을 함께 먹다 보니, 정체성을 나누는 게 별 의미가 없어졌어요. 제 공부의 범위도 그때 넓어졌죠. 『열하일기』가 그때 나왔죠.
▲ 저자 고미숙은 박지원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자신만의 발랄하고 경쾌한 문체로 <고미숙표『열하일기』>를 선보인다. |
정재승 : 그 때가 언제죠?
고미숙 : 98년에 제가 수유 연구실을 시작했으니까, 2000년에 대학로로 왔죠.
정재승 : 수유+너머 10년을 정리해 보신다면요?
고미숙 : 인간에 대한 무지막지한 탐구! 근본적인 나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죠. 그걸 안했더라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구체적인 현장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연구생활공동체에서 요리를 둘러싼 권력을 보다
정재승 : 어떤 방식의 탐구였나요?
고미숙 : 생활의 희로애락이었죠. 지식의 대융합, 코뮌주의의 결합! 그런 걸로 생활은 되지가 않아요. 공존을 하려면 먼저 책상을 어떻게 안배할까?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해요. 사먹으면 너무 부담이 돼서, 해먹자고 했어요. 그런데 누가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지? 이런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말 치열했어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거기에 감정의 잉여가 쌓입니다. “왜 나만 설거지를 해야 돼?” 이런 게 쌓이는 거에요. 처음에는 남녀 문제에 부딪힙니다. 제가 갈등을 조정, 진압하려고 공약을 발표했어요. 그 자료를 보면 정말 웃겨요. 공산당 선언처럼 발표하고 붙여 놓았으니까. (웃음)
정재승 : 10년 동안 그 갈등이 유지되었나요?
고미숙 : 변주가 되죠. 그걸 넘으면 다른 게 또 나옵니다.
정재승 : 저는 당시 수유+너머에 갔을 시 여기는 밥을 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기가 먹을 걸 하고, 씻고 하는 것들이 정리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뭔가 자발적으로 한다는 느낌?
고미숙: 인간의 자발성은 절대 믿으면 안돼요. 습관이 안 돼 있으니까요. 많은 장벽이 있어요. 어떤 형태를 갖추기 위해선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죠. 어떤 분들은 와서 놀래요. 50대 중년 남자가 설거지 하는 모습을 보고요. 또 여자들은 어떨까요? 요리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요리를 둘러싼 권력, 정말 대단해요. 고부갈등도 이해해요. 둘 다 살림을 잘 하기 때문에 그 권력을 서로 포기하지 않는 거죠. 완벽하게 못하는 사람은 권력의 장에 못 들어가요. 관심이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거든요.
그런데 잘하는 사람은 자기의 요리법을 포기 안 해요. 거기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있어요. 저는 이런 걸 모르고 공동체, 귀농, 사회운동을 한다는 게 공염불처럼 느껴져요. 그 많은 조직들이 왜 와해됐는가. 명분, 노선? 아니에요. 서로 삐져서에요. 그걸 공론화 할 장이 없으면 묻히고, 쌓이는 거죠. 그걸 적나라하게 본거죠.
저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은 걸 정당화 하고 미봉했는지 보게 됐습니다. 감정은 원래 저급한 게 아니라 그렇게 움직이는 거죠. 제가 많은 걸 하면 권력이 커집니다. 제가 안 한 일도 배후 조종자가 됩니다. 만나서 같이 활동하다 감정이 상해 나가는데, 몇 년 뒤에 만나면 자기와 적대적인 건 모두 제가 배후 조종한 게 됩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도요. 그때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정재승 : 10년간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나요
고미숙: 글쓰기 한 것과 평행선입니다. 공부를 왜 분과에 갇혀 하느냐의 문제가 있었어요. 전공 공부간의 장벽이 견고한 게 현실이죠. 내 영역에 들어오면 불편해지고요. 그때부터 횡단, 융합, 통섭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학자들이 뭘 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사실 병렬적이죠. 융합이 아니죠. 이 사람이 완전히 그 공부로 들어가고 주체가 변형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욕망과 앎의 일치, 『열하일기』와 만나다
왜 고전문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만나면 안 되나! 그런 고민을 했죠. 그렇게 보면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는 거죠. 욕망과 앎의 일치? 그러면서 <열하일기>가 나온 거죠. 우연히 읽었다가 완전히 몰입한 책인데요. 여러 번 독파하면서 경이로웠던 기억이 나요. 여행이 길이 되고 길이 삶이구나! 라는 걸 느꼈습니다. 여행이 삶의 일탈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현장이구나! 이 사람은 길과 글이 일치되는구나. 길 위에 있으면 글이 쏟아지고, 글과 앎의 일치! 이것이 경이로웠어요.
좋은 앎과 좋은 삶의 일치. 이런 걸 우리를 대표하는 말처럼 만들기도 했죠. 공동체에 있는 지식인들은 아무 권력이 없어요. 거기선 존재론적인 간격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머리로는 동의를 했는데, 몸의 습관은 전혀 작동이 안 되는 게 문제였죠. 공부할 때는 반자본주의 이런 걸 생각하면서도 막상 연애를 하면 완전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일치가 안 되는 거죠. 노처녀, 노총각이 결혼할 때는 완벽하게 가족의 틀로 들어가요. 부모에게 의지하고, 중산층을 바라고요. 자식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이 강남에 사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코뮌이 뭔가요? 잠시 쉬어가는 곳인가요?
이렇게 해서는 대안은커녕, 우리 자체가 비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정치적 이슈 나올 때 파이팅 하는 것. 그게 진보인가요? 전 그런 게 싫어요. 너무 안일하고 편리해요. 자기가 무엇을 감수하지 않는 건 혁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을 주목하게 된 거죠. 『열하일기』 이후엔 제 몸을 더 보게 되었어요.
왜 감정의 컨트롤이 안 되는가? 고민했죠. 판단력이 흐려지는 제 자신이 한심했어요. 몸은 자본을 욕망하고, 중산층의 삶이 편한데? 이런 고민을 하다, 한의학 역학까지 온 겁니다. 몸, 삶, 글의 일치를 생각하고 글쓰기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년간 활동했는데 글을 생산할 수 없다면 아마추어리즘이죠. 그것 가지고는 자본의 역동적 힘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말로만 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자본의 역동적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고, 개의치 않을 수 있어야 해요.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떡해.” 제가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말입니다.
자율적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글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때 글쓰기 수련이 아주 필요하단 생각을 했어요. 자율적, 자발적인 공부를 하면 저절로 글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소비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생산자가 되어야 해요. 대학생이 사실 소비자가 됐죠. 글 하나 쓸 수 없는 대학생은 뭔가요? 대학은 문(文)을 배워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고 있죠. 글 못 쓰는 대학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자고요. 과학자나 의사도 마찬가지에요. 왜 글 잘 쓰는 과학자, 의사가 없죠? 과학자는 최재천, 정재승 밖에 없는 거죠? 말이 됩니까. 과학처럼 재미있는 게 없는데요. 공학은 왜 글이 되면 안 되나요? 의사는 어떻죠. 의사야 말로 글을 잘 써야죠. 매일 환자들의 몸을 보는데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아요. 진짜 의학 책은 봐줄 수가 없어요. 문장이 하나도 맞질 않아요. 번역도 어처구니가 없어요.
2008년부터 배치를 바꾸고 관계망을 떠나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세대교체도 필요했죠. 그 사이에 와서 공부하고 밥 먹고 자고 했던 아이들이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선배들은 없어져야 하죠. 그런 마음이 생겨서, 수유+너머를 떠나기로 한거죠.
의역학 공부로 오면서 이제는 반드시 글쓰기를 수련으로 해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대학에서는 물론 대학원에서도 안배우고 옵니다. 문제죠. 지금은 대중지성의 시대입니다. 그린비와 함께 출판사 ‘북드라망’(책으로 여는 인드라망)을 만들고 『갑자서당』을 냈어요. 1년간 지속적으로 수련하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모두 책을 낼 수 있어요. 『갑자서당』은 이를 보여주는 결과물입니다.
정재승 : 이진경, 고병권은 어떤 분들이셨어요?
고미숙 : 스승이었죠. 서사연에서 첫 만남을 가졌어요. 고병권은 이십대에 니체에 대해 몇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사람들이 사십대인 줄 알았는데, 이십대인 걸 알고 절망감을 느꼈죠. (얼굴도 그렇고!) 이진경 선생님은 이미 유명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어요.
정재승 : 서로 어떤 방식으로 교류를 하셨나요.
고미숙 : 이진경 선생님은 일상적인 대화를 거의 못해요. (웃음) 철학과 관련한 대화를 해야 가능합니다. 고전문학 하는 사람들은 정으로 맺어진 관계라 많이 달랐죠. (웃음) 처음에 제가 ‘냉각기동대’라고 했어요. 모든 걸 얼어붙게 한다고요. (웃음) 『천의 고원』을 정말 열심히 들었어요. 노마디즘을 하도 들어서 사실 『열하일기』 에 『천의 고원』을 많이 등장시킨 줄도 몰랐어요. 문화일보에 ‘연암, 들뢰즈를 만나다’ 라는 기사가 나와서 “어 뭐지? 어떻게 이렇게 읽었지?”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하도 많이 들어서 개념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함께 밥을 먹고, 공부를 한다는 건 상대의 지식이 내 안에 섞이는 것입니다. 이미, 제 목표는 달성한 거죠.
정재승 : 『열하일기』를 읽으며 이진경 선생님께 영향을 받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모 코뮤니타스>는 고병권 선생님과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나요?
고미숙 : 아뇨. 고병권은 니체주의자라 일상생활에는 무척 약해요. 생활의 현장은 달라요. 일상은 감정과 동선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몰라요. 제가 그 몫을 감당했기 때문에 셋이 공존했죠. 이진경 선생님은 철학으로 사람들을 얼어붙게 하고 고병권은 따뜻하게 하죠. 말이 많아요. 말 하면서 스스로 도취되죠.
정재승 : 지식과 유머를 섞어서 속사포같이!
고미숙 : 맞아요. 고병권 선생은 사주에 말이 너무 많아요. 수사학이 발달했어요. 영어를 너무 하고 싶어 뉴욕에 가있어요.
저는 말 대신, 사람이 많아요. 초등학교 때 말이 없었는데 친구들 모아서 축구하고 독서모임하고 그랬어요. 선생님들이 놀랬죠. “저렇게 말이 없는 애가, 사회성이 없을 줄 알았는데 뒤로 저런 걸 하고 있을 줄이야!” (웃음)
정재승 : 재밌네요.(웃음) 『호모 코뮤니타스』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와 닿을 내용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고미숙 : 사실, 이희경 후배가 쓰라고 해서 쓴 책이에요. 초창기부터 함께 한 친구에요. 문탁네트워크를 하는데, 이우학교도 만들었죠. 그때, 애들이 돈 쓰는 걸 보며 기겁했대요. 사실, 거기 있는 애들 돈쓰는 게 강남 애들과 다르지 않아요. 왜 사회를 바꾸는 진보적인 사람들은 이런 걸 안 보는지 몰라요. 좋은 학교만 만들고 돌보지 않는가 모르겠어요.
무상급식,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
무상급식 중요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입니다. 막 먹고 막 버리는 애들을 키우면 어떻게 하나요? 대안학교 가면 환경은 좋은데, 교실은 쓰레기통이에요. 밥도 엄마들이 다 하고, 먹어만 달라고 하고. 이건 궁중에 사는 거지에요. 자기 배려가 아무 것도 없어요. 절에 가서 공양을 하는데 왜 일상에서는 안 되죠? 무상급식 논쟁도 코미디인데, 그보다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죠. 아무렇게나 먹다보면 탐욕적으로 됩니다.
『돈의 달인』을 쓰게 된 건 제 의지가 아니에요. 후배 때문이었죠. 사실, 저는 돈 쓰는 연습을 많이 해봤어요. 여기는 경제 공동체거든요.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 그걸로 밥벌이를 해라!” 이게 제 주장입니다. 따로 놀면 안 된다고 하죠. 결혼할 때 되면 부모님께 의존하고, 자립성이 없으면 소외를 느끼죠. 공부를 원하면, 글 써서 먹고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대안공동체에서 돈 쓰기가 궁금해서, 저를 협박하다시피 해서 쓰게 했습니다. 쫓기면서 쓴 책이에요.
정재승 : 『호모 에로스』를 보는 젊은이들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겠죠. 20, 30대 입장에서는 뒤통수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고요. 어떤 문제의식으로 쓰셨나요.
고미숙 : 이 아이들에게 공부가 얼마나 실존적 의미를 갖나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나이에는 연애에 관심이 많죠. 어떤 애가 “연애를 잘 하려면 책을 읽어야 합니까?” 그렇게 물어봐요. 그래서 “연애를 잘하려면 내가 존재감이 있어야 해. 책을 읽지 않고는 불가능해”라고 했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죠. 예쁜 게 아니라, 알면 알수록 깊이가 있다. 그건 지성밖에 없다. 이렇게 꼬시다가, 점점 생각이 커졌어요. 연애와 공부를 연결해야겠다!
제 20대를 돌이켜보니 연애할 때 많이 창피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사려도 없었는지 참. (웃음) 낭만이 어쩌고 그런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사랑했던 기억이 나면 달콤한 게 느껴지나요?
연애를 잘 하려면 존재감이 있어야… 결국, 공부다
정재승 : 부끄럽죠. 치졸한 일들이 떠오르죠.
고미숙 : 쪽팔리죠. 자유, 진리, 정의. 이런 것이 눈꼽만큼이라도 반영되나요? 그런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한다면 세상이 개판 될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나 소설은 왜 그런가요? 그것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요. 자연히 “내가 하는 사랑은 후져서 그래, 내 탓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자책합니다. 사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어느 시대 문명이건 간에 생로병사, 사랑하고 죽음에 대해서 배우고 큽니다. 우리처럼 죽음에 대한 지혜가 없고, 연애에 대한 최소한의 지혜가 없는 시대가 있나 싶어요. <나비와 전사> 쓸 때 계보학적으로 이광수부터 추론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보니, 민족주의의 변형이라는 결론에 닿았습니다. 그게 바로 멜로의 순정이죠. 공지영의 멜로가 불편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성성, 사랑의 순수함! 이게 훼손되고 상처. 상처는 순수한가요? 상처를 받으면 면피가 됩니까? 말도 안 되죠. 유교, 불교, 동양의 사상만 배워도 말이 안 됩니다. 나도 이런 걸 배운 적이 없었죠.
삭제된 것도 있어요. 학생 운동하면서 남녀가 여관에서 함께 있고 그러다보면 성욕이 컨트롤 안 되죠.
▲ 사랑을 하고 싶어 하지만 도무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기술을 인문학적인 성찰과 몸(곧 우주)에 대한 탐구로 풀어내고 있는 본격 연애 ‘인문서’이다. |
정재승 : 당연하죠.
고미숙 : 그러면, 소위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조직적으로 드러내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페미니스트로 일어난거죠.
정재승 : 왜 삭제되었죠?
고미숙 : 출판사 사장님이 무리한 일반화는 곤란하다고 그랬어요. (웃음) 사실,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후일담으로 들었죠. 드러내놓고 어떤 욕망이든 감정이든 볼 수 있어야 컨트롤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데 너무 많은 걸 숨기고 있어요. 그게 상처받은 영혼, 순수성. 연애는 이래야 돼! 제가 볼 땐 원초적으로 그런 게 없어요.
『호모 에로스』는 나의 부끄러움에서 시작된 책입니다. 성숙한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스스로에게 떳떳한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요
정재승 : 미래의 인문학은 어떤 주제를 다뤄야 할까요?
고미숙 : 몸이죠. 디지털 문명 때문에 신체가 소외됩니다. 모든 정보가 스마트폰에 있죠. 정보를 어떻게 내 삶에 가공하고 운용할 것인가가 남습니다. 이 힘은 신체에서 나옵니다. 신체가 완벽히 소외되는 방식으로 배치됩니다. 손가락, 뇌만 씁니다. 절박한 문제가 될 겁니다. 기억력을 전혀 쓰지 않죠. 치매든 아니든 접속할 때 아니면 멍해지는 거죠. 이미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보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있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허리가 중심인데, 그걸 못 잡아요. 또, 낮에는 비몽사몽상태죠? 밤새 폰을 붙들고 있으니까요.
제가 기차를 많이 타고 다니는데요. 누구나 자리에 앉으면, 폰을 꺼내 몇 시간이고 손가락을 쉬지 않아요. 그러면 언제 쉬고 언제 사색을 해요? 그 사람에게 쉰다는 건 그저 ‘멍~’한 겁니다. 디지털은 멍하거나 방방 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신체는 계속 무능해지죠.
병은 세대와 관계없습니다. 다들 얼굴만 동안이에요. 방부제치고 성형하니까. 그런데 정기는 흐르지 않아요. 감동도 없고 경이로움도 없고, 내 힘으로 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동양생리학에서도 신장에 정이 있거든요. 동의보감에 쓰기도 했지만,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정은 진액대사인데 땀, 눈물. 촉촉하다는 게 그런 겁니다.
남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정액입니다. 신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척추가 바로 서지 못합니다. 디스크, 난청이 많아요. 이어폰으로 큰 음악을 들으니까요. 몇 십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신체가 되어 있을 거예요.
▲ 2003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전국적인 “열하일기” 붐을 몰고 왔던 고미숙이 이번에는 고전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삶의 비전을 탐구하는 인문의학서”로 다시 읽어 냈다. |
고전은 생존의 필수전략, 몸 전체가 동의를 해야 읽힌다
정재승 : 현대인에게 고전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미숙 : 생존의 필수전략이죠. 내 존재를 어떻게든 삶의 동력으로 삼겠다면요. 존재감이 어디서 생기는지, 통째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전은 인생이 걸어가는 우주적 길이예요. 동서양의 어느 것이든, 삶을 통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은 책들은 부분만 보게 합니다. 하나의 국면만요. 짜릿짜릿하죠. 생체회로를 축소시켜버리는 책들입니다. 고전은 몸 전체가 동의를 해야 읽어집니다. 매트릭스로 들어가기 어렵죠. 그래서 낭송을 해야 합니다. 치매 안 걸리려면 어려운 거 읽고 외워야 해요. 동의보감을 배우면서 알게 된 건, 아 이제 지구상에서 나오는 어떤 공부도 재밌다 생각했습니다.
불교와 물리학을 친근하게 느끼게 된 게 좋아요. 감동받는 나를 보면 기뻐요. 도달은 못해도, 그 안에서 놀 수 있고. 앎과 접속했다는 사실이 몸을 태평하게 해줍니다. 고전을 읽지 않으면 이런 식의 신체가 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재승 : 고전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인데요. 시간과 상관없이 유지되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죠?
고미숙 :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항상성을 갖고 있는데 구체적인 장면에 들어가면 다 달라지죠. 항상성이라는 리듬과 각 현장들의 강렬함! 이 두 가지가 있어야 고전이 됩니다. 생로병사가 인간의 보편적 리듬이죠. 그런데, 개체별로 보면 다릅니다. 단 하나의 잎사귀도요. 우주에 사는 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건 태어나면 죽어요. 어떻게 죽느냐 그 차이를 만들기 위해 스승이 있어야 하는데 그 스승이 바로 고전입니다. 삶에서 멘토가 없다면, 아직 삶이 시작되지 않은 겁니다.
비전을 공유하는 훈련이 없는 공동체는 오래 가지 못한다
정재승 : 그런 고전을 쓰려면, 그런 스승이 되려면 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내야겠죠? 그런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고미숙 : 저보다 잘 쓰실 것 같은데요.(웃음) 공동체는 지성의 비전, 구체적인 현장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부딪혀서 일어나는 건 고유하고 보편적이죠. 비전을 공유하는 훈련 없이, 공동체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짜증, 싫증이 나거든요. 이 두 개가 맞물려야 합니다. 붓다의 공동체, 공자의 공동체, 예수가 보여준 삶을 보며 확신을 가졌습니다. 아, 여기에 길이 있구나!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유인들이죠. 매일 아침 탁발하고, 밥 먹고 가르침을 논하는 현장을 겪었습니다. 제가 꿈꾸는 공동체의 비전은 승속(僧俗)을 합치한 길을 여는 겁니다. 바로 도심 한가운데서. 감이당이든 남산강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직이 개인보다 커지는 건 옳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개인이 소외 된다면 잘못된 겁니다. 자기의 잠재력이 크는 걸 못 느낀다면 공동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선 조직이 아니라 개인의 이름을 씁니다. 각자 책에 이름을 올립니다. 조직에 이름이 묻어가는 게 아니고, 새로운 주체가 되는 거죠.
그래서 공부(지성)가 자본과 정보의 바다에 스스로 수련하고 구원하는 길이 되는 것이죠.
정재승 : 선생님 말씀 듣다 보니, 울림이 크네요. 대학, 연애, 돈에 대한 비판을 하시는데. 바로 그 대안적 삶을 살고 계시니까요. 앎과 삶이 일치하시잖아요.
고미숙 : 안다는 건 모르는 게 많아지는 거라고 합니다. 앎이란 무한한 거니까요. 사실 제가 저를 보면, 간극이 너무 커요. 전에 안 본 게 확대가 돼서, 대안이라기 보다 제 앞가림하기가 더 급하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정치적 이슈에 무감각해요. 저 자신에게 무지가 훨씬 늘어나니까요.
지금까지 한 공부의 결론, 자기를 구하는 건 자기다!
정재승: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말씀 부탁드릴게요.
고미숙 : 저의 스승이자 멘토들의 공부의 비법을 하나로 요약하면 자기를 구하는 건 자기다! 천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나를 구하기 위해 누굴 만나 앎을 찾아다니고, 나를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자기를 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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