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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 도사(道士) 혹은 투사로서의 락커

by 내오랜꿈 2009.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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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道士) 혹은 투사로서의 락커
부도옹(不倒翁) 신중현 


인터뷰어:첸 / 편집장:하시진 / 디자이너:이용현
출처 : 도사(道士) 혹은 투사로서의 락커, 부도옹(不倒翁) 신중현
<퍼슨웹> 2002년 10월 31일 





문정동에 있는 작업실 <우드스탁>의 무료 공연을 보러 갔다. 신중현은 박수소리와 함께 광택이 나는 하얀 무대복을 입고 등장했다.

‘뛰융 뛰융 딩기닥닥... 뛰융 띠잉 딩기닥닥 딩기닥닥’ 

기타줄을 몇 번 조율하고 난 뒤, 곧 연주를 시작하였다.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쉰 듯한, 어딘가 막힌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읊듯 가사를 외워 나갔다.

"하늘은 파랗게 나무들도 파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 마음"





몸과 얼굴에 비해 훨씬 커 보이는 손은 기타 현들을 빠르고 섬세하게 훑었다. 가슴이 부풀고,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바로 눈 앞에서 죽지 않은 신화를 보는 감격과 설렘이었다. 

연주하는 늙은 기타리스트의 얼굴은 무표정에서 고뇌로, 고뇌에서 환희로 변주되어 갔다. 깊이 눈을 감고 주름살을 만들어 고뇌를,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려 음에의 도취를 표현했다. 고뇌를 기본으로 한, 초월과 고집이 얼굴에서 나타나고 사라져 갔다. 그 이미지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고집쟁이, 절대적인 비타협이면서도 ‘불기(不羈)’(1)하는 오뚝이였다. 단구(短軀)와 짧게 자른 백발 아래의 얼굴이 무엇을 닮은 것 같다고 한참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등소평(2)과 아주 닮은 것 같다. 등소평은 한 평생 혁명가였고 개혁가였고 절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았었다.



또 한편으로 신중현이 기타 치는 모습은 어느 문파의 장로(長老)가 초식을 하는 모습 같다. 무념ㆍ무상 속에서 지르는 소리와 나가는 품세는 쉬지 않고 수련한 수십 년의 세월을 느끼게 한다. ‘한국 락의 대부(代父)’라는 그는 실제로 80년대 이후에 도를 닦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 한다. 66세에도 현역 락커이려면 도를 닦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듯하다.

공연은 70년대의 명곡들, [아름다운 강산], [빗 속의 여인], [미련]을 거치고 [눈보라], [요강]같은 90년대의 곡들로 이어졌다. 90년대의 곡들은 훨씬 더 ‘정신주의적’이면서도 빨랐다. 가장 수준 높은 보칼리스트들이 불렀던 70년대의 곡들보다는 보다 본격적인 연주가 들어있는 90년대의 곡들이 더 귀에 깊게 들어왔다. 이런 음악들 에서 신중현은 고유한 정신과 멋으로 이루어진 ‘한국적 락’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공연은 싸이키델릭 조명과 피어오른 드라이아이스 안개 속에서 숨막힐 듯한 기타 솔로와 기타를 부수는 퍼포먼스로 끝났다. 원래적인, 또는 ‘좁은 의미의’ 락의 의미에 더 가깝게 말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나는 신중현과 마주 앉았다.

퍼> 어떻게 무료공연을 하기로 하신 건가요? 
신> 저 같은 경우는 나이도 많이 들고 남은 날이 많지 않거든요. 많은 분들이 아니라 해도 ‘리얼 뮤직’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이런 공연을 하게 된 겁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음악성’이 존재하지만 저는 평생 리얼뮤직을 주장해왔거든요. 우리 음악 문화의 한 페이지만에라도 이런 음악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죠. 새로운 라이브 공연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어요. 대중들과 밀착해서 내 음악성을 이해하게끔 하는 게... 이런 것도 괜찮다 싶어서요.
퍼> 리얼뮤직이 뭔가요?
신> 전혀 가식이 없고, 다른 거 꾸미지 않고, 공연장에서 있는 그대로, 실력대로 살아있는 음악의 음을 들려주는 게 리얼뮤직이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런 게 정말 값진 거라 생각하고요, 이런 값진 걸 대중들한테 나눠주고 싶은 거죠.







노대가는 단지 두 사람의 세션, 나이 지긋해 보이는 드러머 하나, 베이시스트 한 사람과 함께, 그리고 상태가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앰프가 있는 좁디좁은 공연장에서 연주했다. 이날 관객은 많이 봐야 70명쯤이었다. 리얼뮤직? 공연을 보고 나서라 그런지 이 단어는 실로 강하게 느껴진다. 통조림에 담기지 않은, 기계로 양식되지 않은 ‘진짜’, ‘음악’은 있다.


프로필 

1938년 서울 생, 만주에서 성장
1957년 미 8군 무대에서 기타 연주 시작
1964년 한국 최초의 락그룹 <에드 훠 Add Four> 결성. [빗속의 여인]
1960년대말 - 1970년대초 펄시스터즈, 김정미, 김추자, 박인수, 장현 등이 [커피 한 잔], [미련],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석양], [님아], [봄] 등을 히트 시킴.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결성. [미인] 등 히트. 
1975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 구속. 노래와 음반이 유신정권에 의해 금지됨.
1980년 활동정지 해소 <신중현과 뮤직 파워> 결성. 
1982년 <세 나그네> 결성
1980년대 중후반 클럽과 <우드스탁>에서 고군분투
1994년 음반 [무위자연] 발표
1997년 헌정앨범 [A tribute to 신중현]. 발매. 16개팀이 참여한 <신중현 트리뷰트 라이브 콘서트>
1998년 <김삿갓 밴드> 결성
2002년 클럽 <우드스탁> 무료공연


70년대의 노래들





신중현은 알다시피 70년대에 한때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강권을 거절해 박정희 정권에게 밉보였고,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을 전면 중단 당하였다. 

그러나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런 사실과 직접 연관된 흔한 질문들 - “어쩌다가 ‘대마초 왕'이 되었는가”, “왜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탄압을 받게 되었는가”, “활동중지를 당했을 때 심경이 어땠는가” - 은 피하기로 하고, 대신 나는 그 시절에 관한 약간 다른 몇 가지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퍼> [미인]이나 [커피 한 잔], [아름다운 강산]과 같은 락넘버들 외에도 장현이나 박인수 등이 불러서 엄청나게 유명해진 노래들, [석양], [미련], [봄비] 등의 작곡가이기도 하신데요. 이런 노래들은 성인 취향이면서도 멜로디가 아름답습니다. 이런 멜로디나 감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요? 
신> 음악이라는 게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저는 음악의 궁극적인 것이 곡에 있다고 생각하고요. 테마가 없는 곡은 음악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곡이라는 것이 한 번에 테마가 안 떠오르면 명곡이 될 수 없어요. 저는 곡을 만들 때 테마가 안 떠오르면 억지로 만들려 안 하고 그냥 놀아요.


장현 [석양] / [미련]
박인수 [나비] '신중현 M&C' / '신중현 음악세계' - 

결국 곡(멜로디)이 모든 음악의 ‘최종심급'이라면, 신중현 역시 그 방면의 귀재이다. 서태지도 그렇고 조용필도 그렇고, 비약이 될지 모르지만 클래식의 대가들도 그러하다. 매우 보편적인 감성에 깊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독특한 멜로디를 만들지 못 하면서 뛰어난 음악가일 수는 없다. 

내가 한 질문에 대한 직답은 신중현의 에세이집에 있었다.

“물론 나는 고독이나 슬픔을 담은 곡을 많이 만들었다. (중략) 그래도 기쁨보다는 슬픔이 예술의 빛나는 동반자라고 여겨졌었다. / 사람들은 흥겨운 리듬과 가사를 더 선호하기도 했지만 내 곡들 중에서 혼자 자주 흥얼거리는 곡들은 대개가 슬픈 멜로디와 가사의 곡들이었다. / 나 자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에 노래를 부를 때 더 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242-3쪽)





퍼> “아이고 뜨거워 놀래라 꽁초에 손을 디었네”([담배꽁초]), “8분이 지나 9분이 오네 1분이 지나면 나는 가요”([커피 한 잔]),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미인]), “말썽 많던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이런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유머러스한 가사는 어떻게 쓰시게 되었나요? 
신> 제가 곡을 만들면서 제일 고민을 많이 한 게 가사거든요. 우리말은 받침이 너무 많아서 영어에 비해서 노래부르기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영어나 다른 외국어는 노래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우리말은 안 그런 거예요. 받침이 많기 때문에 발성이 막히고요. 그래서 가사 때문에 고생을 좀 했죠. 남이 쓴 가사를 쓰면 되는데 그건 제 음악성 하고는 맞지 않은 거 같고요. 현대적이고 새로운 가사 형태를 만드느라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었어요. 

재치와 감각적인 것을 표현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가사를 만드는 방법을 고민했는데요. 한 소절에 한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는 방법으로 써본 거예요. 그러다 보니 우리말이 정말 ‘맛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대중과 대중적인 것
 

70년대 중반, 일련의 히트곡과 ‘프로듀스' 해낸 가수들은 최고의 ‘인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이 절정의 인기는 곧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 음악 인생의 대부분은 대중으로부터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고독감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퍼> 신중현 사단 당시의 가수들, 박인수, 장현, 김정미, 김추자, 김명희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참 대단한 실력들을 갖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들은 거의 그 이후에는 별로 행복한 음악생활을 하지 못한 거 같고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박인수 같은 뛰어난 가수는 지금은 병 때문에 거의 죽어간다는 말도 들었고요. 이런 일들이 선생님 개인의 불행과도 연관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요? 
신> 그 당시에 실력이 뛰어났던 거는 사실인데요. 가수들이란 사람들이 별로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당시에도 내가 시키는대로 연출된 거지, 자기 생각을 확고하게 가진 경우는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당시에도 갈등이 많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신인 때는 시키는대로 하다가 좀 크면 생각이 달라지고, 신중현에 대한 비난을 다른 데서 듣는 경우가 많았고요. 또 실제로도 내가 요구하는 건 다른 사람들 거보다 훨씬 어려우니까 힘들어했고요. 상업적인 걸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데 그러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오래 머무른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보통 한 1-2년만에 다 떠났지요. 지금 연락하는 사람도 없고요. 뭐,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퍼> 당시 만들어진 노래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는 어떤 겁니까?

신> 역시 대중들이 좋아해준 노래들이지요. 그런 노래들은 아직도 안고 자다시피 합니다. 

퍼> 책에서 보니까 “대중들과 만나겠다는 의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음악은 대중의 호응과 비난을 받을 때에 크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시고, 또 ‘대중은 대단히 무서운 존재'라고 도 하셨는데요. 
신> 저는 제 음악이 늘 대중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작자들은 생각이 달랐어요. 참 답답한 거죠. 그런데 대중성이 늘 천한 건가요? 대중이 천한 그런 거는 아니잖아요? 



대중은 무서운 존재죠. 우선은 자신에게 달렸는데요, 자신이 올바르고 제대로 된 실력과 뚜렷한 신념이 없으면 대중이 절대 좋아해주지 않아요. 대중의 힘이 무서운 거죠. 대중을 의식할 때는 자신의 한계나 위치를 알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만큼 무서운 게 없어요.

퍼> 지금 우드스탁을 찾는 관객들은 그야말로 소규모인데요? 
신> 신세대들은 저에 대해 전혀 모르고 나이 든 사람들 중에서 저를 관심있게 본 분들이야 기억을 하겠지만, 대부분은 잘 모르죠. 제가 여기서 공연을 하는 건요, 여기서 뭔가를 의도적으로 거창하게 알리겠다는 거보다도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공개하는 것이나마 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런 조건이 없고요. 

공연을 보러 갔던 바로 10월 26일 저녁, 80년대 후반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서 <우드스탁>을 출입했던 서태지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3만 명의 관중을 모아 놓고 근래 일본과 미국을 대표한다는 신세대 락그룹들을 모아 놓고 8시간짜리 공연을 하였다. 서태지이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운집하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락을 선택한 서태지에게조차 기획된 이런 대규모 공연은 예외적인 일이 된 것 아닐까.


고문당한 락커 

신중현은 박정희 정권과 대단한 악연을 맺었다. 야만적인 정권은 강요하고 고문하고 처벌하고 금지했다. 

퍼>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고문당했다는 이야기는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신> 허허. 그 뭐 좋은 이야기라고 자꾸 하겠어요? 얼마 전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지만(서울지검에서 피의자가 검찰수사관들의 폭행으로 숨진 사건) 아주 그런 관행이 공식이예요. 거기는. 일단 가면 무조건 때리고 맞고 보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뭘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현명하게 해결하려는 머리가 안 돼요. 무조건 실적 올리는 게 중요하니까, 그렇게 무식하게 한 거죠. 더구나 독재정권 시절이니까 오죽했겠어요?

책에는 검찰에서의 고문 뿐 아니라 구치소에 수감되기 전, 정신감정을 의뢰받는다는 명목으로 정신병동에 감금되었던 일과 구치소의 경험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아프게 기록되어 있다. ‘도(道)'에 대해 생각하고 난 이후에 모든 사람과 사물을 관용 있게 보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만은 항상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퍼> [신중현과 엽전들 1]에는 상당히 많은 건전 가요들( ‘지키자 우리나라 우리 모두 지키자')이 실려 있는데요. 지금 들으면 곡들은 코믹하기도 하고, 내용과 형식이 안 맞아서 장난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신> 지금 말하면 믿지도 못하고 그냥 코믹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요. 정말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마 이해가 안 될 거예요. 그런데 그 곡들은 정말 락 형식을 갖춰서 제대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자기가 정권을 쥐기 위해서는 모두를 바보로 만드는 거죠.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탄압하는 거죠. 얼마나 황당한 거예요? 그것을 무력으로 하니까 양민들이 무슨 힘이 있어요? 정말 두 번 다시 접하기 싫은 비인간적인 세계죠. 그런데 그 곡들도 나중에는 무조건 다 금지당했어요. 그냥 저를 죽이려고 했던 거지, 뭐 특별한 노래가 맘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노래평론가 이영미는 이런 ‘건전가요들'을 문제 삼아 “신중현 역시 그의 록에의 천착은 양식과 질감, 감각에 머무를 뿐 록적인 세계 인식, 내용성 있는 록 정신의 천착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다. (중략)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란 노래와 월남전 반대를 시위하러 온 히피들로부터 받은 대마초, 이 양자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신중현과 70년대 록의 성과와 한계는 바로 이만큼”이라 평가한 적이 있다. 탄압을 피하는 타협으로서 ‘지키자 우리나라 우리 모두 지키자' 따위의 가사로 된 가사로 된 노래를 썼다는 것인데, 참으로 일방적인, 지식인적인 평가라 생각된다. 이는 드러난 표면 이외의 것에는 전혀 눈을 두지 않은 채, 변하지 않는 락의 본질과 락의 ‘개념사'가 있다는 식의 태도이다. 그리고 양식과 어긋나는 내용이야말로 오히려 예술이 처한 상황의 모순을 보여준다는 점을 평론가는 간과한 것 같다.


싸이키델릭(the Psychedelic)과 자유 

신중현과 독재정권이 절대로 화해하지 못하게 한 것은 두 가지 요소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것은 기질과 음악에 대한 고집인데, 그것을 신중현은 ‘락 기질'과 ‘싸이키델릭'(3)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 표현해왔는데, 본질적으로 둘은 다 ‘자유'에 관련된다.

퍼> 락기질을 아들들도 물려받았다 그려셨는데, 락기질이 뭔가요?
신> 깊이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은 락을 시끄럽기만 한 것으로 오해하는데요. 그렇지만 락은 자유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자유는 그리고 ‘인간 위주'거든요. 과학문명이나 학문 같은 데 억압되어서 틀에 박힌 어떤 형식을 벗어나서요,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장르가 락이예요. 남 춤추는 데 발 맞춰주는 음악이나 하고 술 먹는 데 반주나 하는 그런 게 아니라, 자기가 추구하는 음악과 자유의 세계, 평화의 세계를 표현하는 게 가치가 있는 거죠. 제 아이들도 제가 추구한 그런 음악을 좋아하고 인정했기 때문에 락을 하게 된 거겠죠.

퍼> 공연에서도 싸이키델릭 음악에 대해 말씀하시던데요, 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말이지요.



신> 싸이키델릭은 ‘환각'이라는 얘기거든요. 인간이 정상적으로 사는 게 기본이지만, 그런데 살다 보니까 옆에 술도 생겼고 담배도 생겼고 약물도 생겼거든요. 의학적으로 구상해서 만든 환각제나 마약도 생기고요. 우리가 몸이 아플 때 먹는 진통제 같은 거도 마약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서 그런 게 존재하고 있는 거죠. 그런 세계를 전혀 가까이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죠. 예를 들어 술 한 잔 먹으면 그냥 정상으로 생각되던 것들이 달라지고,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요. 평소에 생각 못 하던 것도 광대하게 펼쳐지고 자기가 달라질 수도 있고요. 인간 머리 안에 그런 힘이 잠재되어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을 약품이나 술 같은 걸 통해서 그런 세계가 있고 자신이 그런 데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거기 빠질 수도 있고요.

신중현은 이 대목에서 매우 공을 들여서 상세히 자신의 약물관(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정상적인 ‘이성' 너머에 또 다른 인간적 세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세계는 사실상 보다 폭넓고 풍부한 상상력과 정서를 가진 괜찮은 세계라는 점이 우선 전제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물이 이 세계를 체험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이 대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약물 긍정'에는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다.

신> 인간이 그런 것을 거부하며 사는 것도 방법이지만, 자연적으로 접하는 깨끗한 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를 맛볼 수 있거든요. ‘정상'에서 벗어난 그것도 사실은 인간적인 세계거든요. 결국 그것도 수용할 문제인 거고요. 그것을 음악에 수용한 것이 싸이키델릭인 거예요. 이 세계를 저는 ‘제2의 세계'라고 하는데요. 그건 꼭 환각의 세계와는 같은 건 아니고요. 

락 뮤지션들이 그것을 알고 빠져서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건데, 그런 것은 우리의 문화에서 주어진 것보다는 더 풍부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어요. 그림이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세계인데요. 그거는 락이 추구하는 자유와 관계있는 건데요.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이죠. 

그런데 그런 음악을 하려면 마약을 해야된다는 게 아니라, 음악을 들어도 그런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거죠. 마약을 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클레어(clear)한 맨정신으로도 그런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거죠. 착각을 하면은 마약을 하면서 듣거나 하는 음악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잘못 인식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죠. 누구한테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요, 언젠가 인간의 모든 지혜가 더 발달하면 그런 세계도 하나의 문화를 평가할 수도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앞서있는 건지도 모르죠. 그런 세계를 나쁘게만 생각할 수는 없어요.
 

신중현의 답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 인터뷰에서 가장 길게 단번에 이어진 대답이었다. 신중현은 LSD와 알콜 중독 경험에 대해 매우 상세히 써놓은 적도 있다. 좀 길지만, 흔치 않은 기록이니 한 번 옮겨보기로 한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운전기사가 부처로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택시는 곧바로 하늘로 날아 오르더니 극락 세계가 펼쳐졌다. 정말이지 오색 꽃이 찬란하고 선녀들이 날아다니는 그림에서만 보던 극락이었다. (중략) 
사슴과 꽃나무들이 우주 공간처럼 드넓은 곳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지붕과 벽이 낮아졌다가 다시 커지면서 멀리 사라지는 등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이 어지럽게 떠다니는 것이었다. (중략) 아무리 머리를 세게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영상은 내 온몸과 정신을 녹초로 만들어버리고 나서야 빛의 강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축제는 그 다음 날 낮까지 이어졌다. (중략) 그 후로 환각은 다시 없었지만, 일주일 동안을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고도 한 달 동안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받았다.”

그리고 심하게 알콜리즘에 빠져들었던 1974년의 어느 날, 신중현은 생의 위기까지 느끼게 되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는데, 지미 헨드릭스가 저승사자로 나타나서 손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후 신중현은 술 담배를 완전히 끊고 채식을 하면서 건강을 회복했다 한다. 약물의 인간적 의의(?)에 대해 신중히 긍정했던 그가 그것을 부정하는 근거는 존재 조건으로의 ‘건강'이었다.

신> 물론 그런 것(약물)이 나쁜 점도 있어요. 나쁜 점은 거기 빠져 들면은요, 건강을 해칠 수 있어요. 장기적으로 빠져들면 후유증이 생겨서 아무 일도 못해요. 그래서 제가 그 경험을 공개하기도 한 거고요. 그 상태는 굉장히 압(Up)이 되어 굉장히 좋거든요. 근데 그것이 효력이 지났을 때 다운이 되거든요. 압 됐다가 다운이 될 때는 고통은 그만치 비례하죠. 굉장히 고통스러워요. 인간을 망칠 정도까지요. 건강한 데서 건강한 것이 나오기 때문에, 건강이 없으면 아무 행복이 없다는 걸 알았죠. 저는 직접 체험해봐서 알아요. 그런 거를 안 의지하고도 더 넓은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워야죠. 

나는 마지막으로 농담 섞인 질문을 한 가지 했다.

퍼> 독재정권과 약물 중에 어떤 쪽이 더 나쁜가요? 
신> 하하. 똑같지요. 나쁘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은 정말 반문화적인 정권이죠. 거기서 파괴한 우리 음악이나 문화자산이 정말 엄청날 거예요. 말로 다 하면 책 몇 권은 될 거예요.




‘저주받은 천재'라느니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음악가'라는 신중현에 대한 클리셰는 일면만 맞는 말인 듯하다. 긴 고난과 잊혀짐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은 90년대 이후 ‘한국 락의 대부'로 복권되었기 때문이다. 97년, 1급의 뮤지션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헌정 음반이 만들어지고 헌정 공연이 열렸다는 사실이 이를 충분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대단히 큰 명예를 가져다준 이러한 재평가도 끝까지 지고 가야 할 고립과 고난을 없애지는 못한다. 락은 절대로 주류가 될 운명은 아니기 때문에, 고립과 가난은 영원한 동반자이다. 지금 신중현이 보여주는 것은 영원자 동반자들에 대한 여전한 투쟁과 노력이면서도, 한편 초극이다. 투쟁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66세의 그가 70여명의 관객들 앞에서 2주마다 한 번 무료공연을 하는 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극은 무엇인가.

퍼> 선생님은 도를 추구한다 하셨는데, 그 도가 무언지 좀 말씀해주세요. 
신> 도가 뭔지 말한다면 도가 아니겠지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진 삶의 방법이나 경험해서 얻은 깨달음이 있겠죠. 그게 도일 건데, 제 나름대로 많은 시간에 걸쳐 얻은 진리와 방법과 깨달음'을 감히 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도인만 도가 아니라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80년대 중반부터 노장(老莊)을 읽기 시작했다는 신중현은 [도덕경]에 나오는 첫 대목으로 답을 시작하였다. 그 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기타 주법에서는 이른바 3-3주법이라 했고, [김삿갓]의 단계에서부터 만들어진 정신주의의 음악인 것만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퍼> 선생님의 인생을 보면, 오뚝이처럼 쉼 없이 방해하는 것들, 좌절과의 싸움인 듯합니다. 타협하지 않고 한 길을 오게끔 한 힘은 무엇입니까?

신> 그게 도인데요. 제가 도라고 나름대로 부르는 것은 많은 시간에 경험하고 깨달은 것이 정리가 되기 시작한 시간이 되니까 감히 도가 어쩌고 그러는 건데요. 저는 제가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음악과 건강에 결부시키고 있는 건데요. 도는 인간이 더 넓어지고 무한대로 나아가는 길이죠. 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이고요. 즉 젊은 세대가 할 수 있는 주법이 있는데 그런 것을 벗어나서 넓은 다른 방법을 보는 거죠.



그러면 한계를 벗어나서 광범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느끼는 거죠. 그러면 더 살 수 있고 희망도 볼 수 있는 거죠. 희망이 보인다면 사람들이 조급하지도 않을 거예요. 젊을 때는 항상 빨리 돈 벌고 성공해서 빨리 잘 살아야지, 이런 생각 때문에 급하고 여유가 없는데요. 그러다 보면 자기를 망각하고 망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진리가 있는데 노인이 하는 걸 보고 한 번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제가 지껄이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도'는 어떤 진리의 형식이자, 나이 든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특히 노년에 관한 신중현의 말은 귀에 깊이 울린다. 노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일 수 있다는 저 깨달음. 그래서 이 때에도 삶의 ‘전략'이 필요하다. 심지어 희망이 있는데. 물론 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넘는 전략 너머의 전략일 것이리라. 이렇게 되면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될 테지만, 그 경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배우려 해도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젊은 것들은 사람도 아니라'며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합니다. 이빨 하나 없는 늙은이라면 <안 돼, 얘들아. 깨물면 못 써>하고 소리치긴 쉽습니다. 그러나 이빨 서른두 개가 말짱할 때는...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 봐요.”(그리스인 조르바, 35쪽)라 했다.

이와 흡사한 요지의 말을 신중현은 들려주었다. 이는 지금 자리에서 돌아 본 자기 인생의 교훈이자, 스승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30대가 되고 난 뒤에, 내가 20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깜짝 놀라거나 혹은 스스로에 대해 혐오증을 내기도 한 나는, 다음과 같은 신중현의 말을 조로(早老)를 방지하기 위한 약(藥)으로 삼기로 했다.

신> 나이 들었을 때 오히려 자기 위치가 중요하거든요. 젊었을 때만 인생이 아니예요. 사람이 인생의 길이 100년 이낸데, 제가 나이 들어서도 기타 치는 거도 바로 그런 이유인데요. 노년기에 들어서서 자기 위치가 없으면 허전한 거예요. 젊었을 때는 상관이 없어요. 뭘 하든지 간. 그런 거를 저는 강조하고 싶어요.

인생이 뭐냐? 요새 노년에 와서 인생이 진짜구나, 하고 느끼는 건요. 이제 와서 모든 걸 어느 정도 알 거 같아요. 세상을요. 음악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살아가는 방법도 그렇고... 노년기에 들어서 이제 진짜 눈이 트이는 거예요. 그게 진짜 인생이 아닌가? 그렇다면 조급하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고, 20년이고 30년이고 진득하게 자기 하고 싶은 거를 하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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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이나 관습 따위에 얽매지 아니함, 재능이나 학식이 남달리 뛰어나 일반 상식으로는 다루지 못함’ - [표준국어대사전]
(2) 중국 혁명의 전과정과 문화혁명의 과정 속에서 1979년 이후 중국의 개혁 개방을 지도한 현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단구(短軀)와 유연하고도 단호함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별명이 부도옹이었다.
(3) psychedelic : a. 황홀한, 도취적인; 환각을 일으키는, (색채ㆍ무늬가) 사이키델릭조(調)의(환각상태를 연상시키는) / n. 환각제, 환각제 상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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