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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 재즈, 미 주류음악계 화려한 신고식

by 내오랜꿈 200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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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미 주류음악계 화려한 신고식 
[세상을 바꾼 노래] ⑧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1938년)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15일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Sing Sing Sing" - Benny Goodman Band



»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1938년)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소설의 배경이기도 했던 1920년대를 ‘재즈의 시대’라고 칭했다.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활기를 당대의 유행음악으로 급부상한 재즈의 사운드에 빗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기준에서 재즈의 전성기는 ‘스윙의 시대’ 1930년대다.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빅밴드들이 흥겨운 리듬을 연주했던 그때, 재즈는 마지막으로 넓은 대중적 성공을 누렸고 처음으로 깊은 음악적 가치를 공인받았다. 

1930년대는 한편으로, 존 스타인벡의 소설과 도로시아 랭의 사진을 통해 각인된 대공황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 현대사의 가장 비참하고 가혹했던 시련기에 가장 크고 화려한 형태의 재즈악단인 빅밴드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얼핏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학자 앨런 브링클리의 분석에서 그것은 외려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국의 사회적 가치관은 대공황을 맞아 그리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익숙한 사고와 목표에 더욱 더 집착하며 어려운 시기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재즈학자 마셜 스턴스의 말마따나, 애초부터 빅밴드는 “미국인의 큰 것에 대한 애착의 결과”였던 것이다. 빅밴드의 쾌활한 스윙은 고단한 현실에 찌든 보통사람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한 도피처였고,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은 그 시대 민중에 투여된 가장 강력한 플라시보였다. 

베니 굿맨(1909~1986)은 ‘스윙의 제왕’이라는 애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당대 가장 성공한 밴드 리더였다. 예술적 명성과 사회적 명망을 한 손에 거머쥔 그는 1938년 1월 16일에 그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역사적인 ‘카네기 홀’ 콘서트를 통해서였다. 굿맨과 그 악단이 대중음악가로서는 사상 최초로 ‘고전음악의 전당’에 입성하며 음악사를 새로 쓴 것이다. 재즈가 미국 주류음악계에 공식 데뷔한 그날, 베니 굿맨 밴드가 정규 프로그램의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이 바로 〈싱 싱 싱〉이었다. 기념비적인 클라이맥스였다. 

본래 루이스 프리마의 1936년 작품인 이 곡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베니 굿맨 밴드의 음반들이었다. 12분에 달하는 확장 버전으로 연주된 ‘카네기 홀’ 콘서트 실황녹음은 그 중 단연 최고로 꼽힌다. 특히, 여기서 진 크루파의 드럼과 제스 스테이시의 피아노가 들려준 솔로는 재즈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으로 평가 받는다. 더불어 극적인 것은, 이 실황녹음의 원본 테이프(사진)가 무려 12년 동안이나 분실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재즈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전설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베니 굿맨의 ‘카네기 홀’ 공연은 고전음악의 본향인 유럽에서 먼저 평가를 받은 재즈가 고향인 미국에서도 마침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또한, 다른 인종과의 협연을 금기시하던 분리의 장벽을 깨고, 보수적인 상류무대에 흑인 연주자들을 올림으로써 인종차별에 눈먼 동시대인들을 개안시킨 선구적 사건이기도 했다. 1938년 1월 16일의 몹시 추웠던 일요일 저녁, 베니 굿맨 밴드가 연주한 ‘싱 싱 싱’과 그것을 향한 관객들의 갈채는 두 시간의 공연 동안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나은 곳으로 바뀌었음을 알린 신호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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