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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반 고흐의 삶과 예술

by 내오랜꿈 2007.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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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의 삶과 예술 

밀레 흠모 농민화가로 화단 데뷔… 파리서 인상파 접하고 빛·색 대변화
고갱과의 예술적 영감 교류·갈등·자해·정신병 고통속 열정 화폭에


출처 : <한국일보> 2007/11/06 



열세살의 고흐
고흐가 구애했으나 냉혹하게 거절당한 외사촌 누이 케이보스와 그녀의 아들 얀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화가가 되기 전 상업화랑의 직원, 교회의 보조교사, 책방 점원, 전도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1880년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브뤼셀, 헤이그, 에텐, 드레덴 등지를 전전하며 화가 수련을 쌓아나갔다. 

반 고흐가 가장 흠모한 화가는 밀레였다. 1883년 12월 경제적 어려움으로 목사인 아버지의 새 부임지 누에넨으로 돌아온 그는 밀레를 본받아 농민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땅에서 땀 흘리며 노동하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던 그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려 노력했고, 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로 그것을 증명했다. 

1886년 2월, 반 고흐는 새로운 자극을 위해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 오기 전, 네덜란드 그림과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 정도만을 알았던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의 밝은 그림들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파리에 도착한 즉시 자신의 갈색조 팔레트가 얼마나 구식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인상파 미술을 접하면서 그의 팔레트는 점점 밝아졌으며, 붓터치는 강렬한 색채로 진동했다. 

파리에서 반 고흐는 인상파의 빛과 색을 다루는 방법과 신인상파의 점묘기법을 이용해 도시의 카페, 거리, 센강 주변 풍경 등을 자유롭게 그려나갔다. 파리 시대는 그만의 독자적인 미술을 만들기 위한 예술적 실험기였다. 

반 고흐에게 파리는 인상파라는 새로운 미술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지만 추운 겨울과 과로, 퇴폐적인 생활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인 피로는 그로 하여금 다시 파리를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인상파 미술의 극복과 자기만의 새로운 미술의 완성, 평생의 목표였던 농민미술의 추구, 자연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그는 1882년 2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향했다. 

아를에 도착한 그는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의 주제를 찾았고 아무데서나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밤에도 거리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식사를 주문하는 일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동생 테오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밝고 강렬한 색채, 명료하고 간결한 구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아를은 반 고흐가 가난으로 고통받는 동료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예술적 영감을 나누는 화가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려던 장소다. 

이 꿈을 위해 그는 고갱, 베르나르 등에게 편지를 보냈다. 1888년 10월 어렵게 반 고흐의 요청을 수락한 고갱(1848~1903)이 아를에 도착했다. 세계미술사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의 순간이었다. 

이 빛나는 두 거장은 아를의 <노란 집(The yellow house)>에서 두 달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함께 그림을 그렸고 예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강렬한 개성을 지닌 두 대가는 서로 다른 예술관과 생활태도의 차이로 갈등을 겪다가 급기야 1888년 12월 23일 고흐가 면도날로 고갱을 위협하고,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귀를 자른 사건은 단순히 그를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것에서 끝난 일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향후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고흐는 아를 시민에게서 미치광이로 낙인찍혀 독방에 갇히고, 1889년 5월 생레미의 생폴 드 무솔 요양소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열정적으로 자연을 화폭에 담아냈다. 

생의 말기,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겪던 고흐는 치료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1890년 5월 가셰 박사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한다. 

오베르의 자연에 만족한 고흐는 정신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집중력을 지니고 작업하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감동적인 그림들을 제작했다. 1890년 고흐가 파리의 앙데팡당 전에 <아이리스>와 <별이 빛나는 밤에>를 전시했을 때, 인상파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고흐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고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자신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1890년 7월 29일 오베르 쉬르 우와즈의 밀밭에서 자신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세상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흐가 온다] 불꽃같았던 37년…반 고흐 연보

열아홉살의 고흐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장남으로 출생 
△1857년 동생 테오 출생 
△1869~75년 구필 화랑의 헤이그ㆍ런던 지점 근무 
△1877년 신학 공부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 
△1878년 신학대 입시 낙방 후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 재직 
△1879년 광부들의 근로 조건 개선 위한 시위 선동으로 전도사직 해고 
△1880~85년 그림 입문. 네덜란드 에텐ㆍ헤이그 등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 등 어두운 색채의 초기작 그림 
△1886~88년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테오와 함께 살며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 밝은 색채의 ‘자화상’ 등 그림 
△1888~89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옮겨 ‘노란 집’ 등 그림. 고갱과 함께 지내다 심한 언쟁 후 귀를 자름 
△1889~90년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에 입원. ‘아이리스’ 등 그림 
△1890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 ‘까마귀 나는 밀밭’ 등 그림 
△1890년 7월27일 오베르 밀밭에서 권총 자살 시도 
△1890년 7월30일 사망 
△1891년 1월25일 테오도 신경쇠약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사망 


반 고흐의 어록…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나는 풍경화가는 아니다. 내가 풍경을 그릴 때도 그 속에는 늘 사람의 흔적이 있다.(1882년 3월14~18일)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1882년 7월21일)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을 빠른 속도로 받아적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방법이나 체계 안에서 습득한 인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서 나온 언어다.(1882년 9월3일)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1883년 8월4~8일)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885년)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1887년 여름~가을)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1888년 5월)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1888년 10월24일)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1889년 1월28일)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1889년 9월5~6일)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가면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한다.(1889년 12월)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지. 그런 건 좋다.(1890년 7월29일 고흐가 사망시 지니고 있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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