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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좌파정치

by 내오랜꿈 2007.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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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좌파정치


출처:www.jinbonuri.com 2004 09 09

PoS



1.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과 논쟁하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하나. 좌파정당이 일상적 존재인 유럽 등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자Socialist'라고 말하면 대충 열에 아홉은 '사민주의자, 사민주의 정당의 당원'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 그것보다 더 자본주의와의 결연한 단절을 추구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아마도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의 명칭을 얻게 될 것이다. 확실히 좀 미국식 표현이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체제적, 거시적 모델에 입각하는 대신 단일이슈에 중심을 두는 좌파세력은 대충 '급진주의' 정도로 불릴 것이다. 아무튼 정치사상에 대한 '글로벌 스탠다드'한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한 종류이다. 즉 '사회주의자와 사민주의자가 논쟁중이다'라는 대한민국 발 기사를 번역한다면 '사회주의자와 또 사회주의자가 논쟁 중'이라는 요상한 문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민주의를 논하기 위해 가장 먼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사회주의'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른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사실상 사라진 현재에서 이 가장 기초적인 정의를 따지는 것은 단순한 자구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2.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1) 사회당 선언?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를 이야기 할 때, 발생하는 혼돈의 핵심은, 오랜 동안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마르크스주의 노선'의 동의어로 사용되어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저술한 것은 '공산당 선언'이지 '사회당 선언'이 아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사회주의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사회주의'를 하나의 과도기로 (혹은 과도기적 방책의 총체)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최종목적이냐 운동이냐'라는 베른슈타인식의 질문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은 사회주의가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그들이 주장한 '역사법칙'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의 물적 조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건으로부터 그 이행에 필수적인 합목적적 방책들을 '사회주의'로 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이전부터 존재하던 공산주의라는 최종목적을 세련화 시키면서, 역시 마르크스주의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회주의'에서 그 경로와 수단을 발견한 것이다. 


덧붙여, 이런 '사회주의'를 필수적인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도 존재해왔고, 또 존재한다. 즉, 과거의 '무정부 공산주의자'나, 현대의 '자율주의'가 그것이다. 무정부주의적 경향이나 최근에는 '코뮤니즘'이라고 굳이 칭해야 뜻이 통할 원론적 의미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궁극적 차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 정도' 같은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라거나 하는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민주주의'그 자체를 넘어서려는 것이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어쨌거나 형식적 평등에서 시작하며, 결론적으로 다수의 의사로 결정되는 공동의 의지에 개개인들이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마르크스가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받는다'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두 문장으로 간단히 압축해 버린 사회주의와 '코뮤니즘'의 차이는 의외로 근본적인 것이다.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사회'라는 주장은 사실상 (현실적으로 국가형태로 요약되는) '객관물로서 사회'를 자발적 결사-연합으로 대체한다는 걸 뜻한다.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를 '방법론상의 문제'라고 평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셈이다. 특히 제1 인터내셔날에서 현실사회주의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이 모두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다.) 


(2) 방책과 수단으로서 사회주의 


아무튼, 이처럼 그것을 '과학'으로 보던, '윤리적 요청'으로 보던, 사회주의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일련의 정책들'을 의미한다. 더구나 현대적 의미에서 그 어떠한 사회주의도 국가기구의 사용, 근대적 법의 형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민'에 근거하는 즉, '민주공화제'를 당연한 전제로서 지니고 있다. 결국, 원론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란 어쨌거나 공공성, 연대성의 시장의 이해에 대한 우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공공성이나 연대성의 '도구'가 되는 국가, 혹은 정치적 권력이란 '민주주의'를 뜻한다.(스스로 비민주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적어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나름의 주장들, 혹은 나름의 '변명들'이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민주주의 담론의 통로를 통해 사회주의적 입장에 상당부분 다다를 수 있다. 


결국, 어쨌든 '사회주의'를 특정화하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문구로 압축되는 사회적 생산의 문제를 결정적인 또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사고하는 것에 있다. 즉, 민주주의적으로 결집된 공동의 의지에 따라, (그 근본에 근대 민주주의, 인권담론이 전제하는 자유-평등-박애/연대성이라는 가치에서 출발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생산을 조절한다는 원칙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적' 대립물은 따라서 '경제적 자유방임주의'이고, 이러 저러한 '사회주의들' 사이의 차이는 경로와 수단, 그리고 강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회주의'의 양대 모델은 아예 붕괴하거나 혹은 후퇴와 곤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회주의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3. 오늘날의 좌파 = 사회민주주의 ?! 


(1) 아직 죽지는 않은 사회주의 


그런데, 사회주의의 지배적인 양대 모델이 모두 일정한 곤경을 겪고 있다고 해도, 확실히 한쪽은 아예 '죽어버렸고' 다른 한쪽은 '후퇴와 곤경을 겪는다'면, 그 '정도의 차이'는 확실히 쉽게 무시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사민주의를 '후퇴와 곤경'에 빠뜨렸다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다준 재앙에 가까운 결과들에 많은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담고 있는 맹목적 시장지상주의를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 신자유주의 담론의 주된 내용이 자본의 무제한적, 특권적 자유인 이상, 그 신자유주의 담론에 의해 옹호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 결과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우려는 대상은 바로 자본주의적 시장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경향에 대한 것이다. 그 속에서, 생존한 '지배적 사회주의'로서 사민주의와 그 영향 하에 성립한 사회보장국가는, 정작 그 자신은 후퇴를 하는 가운데도 정치적 논의의 중심적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때 사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과 시장에 대한 (민주적) 공적 통제의 필요성이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사회주의적 문제'이다. '역사적 공산주의'에 대비되는 개량주의, 점진주의로서의 사민주의의 의미는 여기에서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2) 혁명이냐 개혁이냐? 


스스로 '정치적 좌파'를 자임하는 그 누구도 '조건과 수단'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싫다고 할 사람은 없다. 언제나 문제는 그 '조건과 수단' 혹은 '경로와 방법'에 있다. '혁명적 - 개량적'이라는 구분으로 '진정한 사회주의'를 판별하려는 논의의 중심에는 '혁명적 이행의 구체적 형태'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전면적 국유화'가 백년 이상 자리하고 있어왔다. 문제는 그 '혁명적 길'의 현실적, 구체적 경로와 형태가 생존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목표의 성취에 있어서도 역시 일련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적어도 지금 당장은 '혁명과 개혁'이라는 논점은 현실적 의미를 지닐 수 없다. '혁명적'이라는 단어는 급진적이라거나 전투적이라는 단어와는 확실하게 다른 것이다. 즉 '혁명적 노선'이란 '봉기적 수단에 의한 국가권력의 탈취'라는 '정치적 혁명'을 필수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노선을 말한다. 


마르크스 이후 사회주의의 전통 속에서 '정치적 혁명'의 요청은 '생산수단 소유(권)의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국가로의 집중'과 '부르주아 민주주의/대의제 민주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프롤레타리아 직접 민주주의로의 대체'서 구체화된다. 바로 이 두 가지 핵심교의에 입각한 '현실 사회주의/역사적 공산주의'의 시도가 '실패'로 인식되는 이상 '봉기적 수단을 통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장악/분쇄'의 요청은 기술적으로 필연적, 필수적인 문제로 존재할 수는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 등의 폐지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를 수립했을 뿐이라는 비판 뿐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사회적 생산에 대한 실질적 통제력이라는 관점에서 구 사회주의가 사실상 '(사적)자본가 없는 변형된 자본주의'에 가까웠다는 좀더 좌익적인 비판까지 고려한다면, 국가권력의 장악과 소유(권)형태의 변경을 결정적 단절의 지점으로 사고하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 된다.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과들이 보존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귀속이나 소유권이라는 명목상의 지표를 넘어 생산과정을 비롯한 사회적 관계들 전반에서 다양한 권력의 기술적 양식들에 대한 급진적 비판에 대한 요구가 부상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회주의를 포함한 좌파정치 일반은 이미 알려진 모델이 아니라 다시금 지속적인 '정책들', '운동들'을 축으로 규정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과정에 밀착된 '아직 생존한 또 하나의 지배적 사회주의'로서 사민주의(적 실천)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그것에 대한 개입이 지니는 의미만큼의 정치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3) 조건이자 대상으로서 사민주의 


따라서, '오늘날의 좌파 = 사민주의'라는 (좀 과도하게 보이는)등식은 현재 자본주의를 둘러싼 '전통적인' 좌파 정치적 의제를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동일시해야 할 신념은 아니지만, 그들이 좋던 싫던 마주하게 되는 하나의 '객관적인 상태'에 해당한다. 사회민주주의, 아니 하나의 이념이기에 앞서 하나의 정치적 행동양식, 하나의 정치적 조건으로서, '사민주의적 상황'은 좌파적 정치행동이 그것에 (많건 적건) 의지하고, 동시에 그 자체를 하나의 정치적 실천의 대상으로서 사고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제도적 형상'이 되는 것이다. 


분명, 오늘날 국가, 특히 국민국가의 정치권력이라는 문제는 정치적 실천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국가중심적' 사고와 실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국가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어쨌든, 좌파가 대의제 민주주의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그것을 포기한 다음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와 연루되는 한, 넓은 의미에서 '사민주의적 실천형태'는 여전히 정치적 실천의 자원이자 동시에 그 대상으로서, 하나의 문제로서 존재할 것이다. 



4. 사회민주주의는 하나의 이념인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솔직히 나는 '좌파일반'의 의회주의적 정치행동과 사민주의를 열심히 구분할 생각이 거의 없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조건 하에서 ('부르주아 대의제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이건,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포함하는 원칙적인 비의회적 - 비국가적 노선이던) 대의제 민주주의의 활용을 거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소수의견'(요즘 흔히 말하는 '소수자'가 아니라)이 될 것을 스스로 감수하겠다는 것이 된다. 나는 그것이 그저 잘못된 것,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가, 더구나 대의제 과정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으며, 의회주의적 형태이던, 비의회주의적 형태이던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대중의 힘 자체를 형성하는 과정 그 자체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의 - 정치적 과정과 등치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언젠가는 법이라던가 예산이라던가 하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내전이라던가 무장봉기등 군사적 과정을 사실상의 근본적 구성요소로 하는 '소비에트형 이행모델'에 입각한 사고 속에서만, (그것도 그 지극히 단순화되고 속류화된 형태에서만) 자본주의 국가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통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문제를 사고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특히 2차 대전 이후의 대중 민주주의의 일반화 속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과정에 개입하는 좌파의 정치적 실천이 과연 그 실제적인 행동과 결과에 있어서 사민주의라 불리는 정치적 경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이후 서구 '공산당'들의 사민주의로의 신속한 전환의 토대는 이론적인 숙고보다는, 그 동안의 실천형태에 기반 한다는 평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신좌파적 운동'의 대표적 산물로 간주되는 독일 녹색당의 '성공'의 귀결이 역시 사민주의적 정치형태와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 또한 생각해보자. (의회정치, 정당정치의 문제에 대한 '녹색당'의 가장 주요한 문제의식은 의회정치 자체보다는, 의회정치에 대한 개입과 의회 밖의 운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정당으로서의 성공이 이 문제에 지속적인 곤란을 야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조건 속에서 의회를 상대하는 좌파일반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 그들이 '범 사민주의'임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조건에서 '사민주의적 경향'이라는 것을 하나의 이론적, 사상적 조류로서 다루는 것은 그렇게 까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정치적 입장은 스스로를 하나의 이념으로 주장할 수 있다. 또한 나름의 사상과 이론을 일정한 형태로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의 표명'이 모든 정치적 입장들에게 항상 같은 수준의 실제적인 필요나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지닌 사람은 대체로 알고 있듯이, 정책과 정치적 행동양식으로서 '사민주의적 경향'이라는 것은 수정주의 논쟁 등을 통해 그것이 이론적, 사상적으로 표현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제2 인터내셔널 시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혁명적 수사와 개량적 실천'이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듯, 사민주의적 경향이라는 것은 노동조합과 의회정당의 결합이라는 운동의 형태 그 자체로부터 산출된 하나의 '효과', 노동조합과 의회정당이 결합된 운동의 일상적인 정치적 실천의 형태 그 자체와 별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미 여러 역사가들은 '베른슈타인 논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향방에 대해 그다지 큰 실제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즉 베른슈타인은 논쟁을 통해 도입하지 않아도 이미 일상적으로 진행중인 정치적 실천형태를 굳이 논란거리로 삼으려 한 셈이라는 것이다.) 즉, '최종목적은 없으며 운동만이 모든 것'이라는 베른슈타인의 언명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민주의적 경향' 그 자체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사민주의적 경향이 스스로를 하나의 이론과 사상의 형태로 표현하려 했던 시기는, 주로 이른바 '혁명적 경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할 필요를 강하게 제기 받던 상황들이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사민주의'가 스스로를 주장하는 변별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이나 그것이 발생시키는 사회적 고통들에 대한 처방보다는, '혁명주의'적 주장들이나 '현실 공산당'(즉, '코민테른')과 '현실사회주의'와의 구분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 주장들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사민주의를 사고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 탈-냉전'이라는 조건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식화되어 현재에 전해지는 사민주의에 대한 '정의방식' 그 자체가, 사실 '냉전'의 맥락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일 수는 없었다. (한동안 서유럽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 - 혹은 국가에 따라 사민주의 좌, 우파의 - 핵심적인 대립점이 NATO에 대한 입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과연 탈-냉전,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냉전구도 하에서 형성된 그 구별의 방식들이 얼마나 합당한 것이 될 수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5. 그런데 오늘날 사민주의는 존재하는가? 


그런데, 사회보장국가가 일정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아직 존재하고 있고, 그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민주의 정당들이 아직도 유럽 등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 좌파 일반에게 '사민주의적 정치적 행동양식'의 불가피성에 대한 근거로 충분할까? 답은 '아니다'이다. 


오늘날 '사민주의'라는 것은 매우 모호한 존재이다. 

그것은 소위 '제 3의 길'등을 주장하며 진행된 사민주의 정당들의 사뭇 '자학적'인 우경화에서 잘 드러나듯, 단지 전통적 '좌파'정치세력의 위치라는 것을 넘어서, 고유한 정치적 지향으로서 사민주의가 오늘날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피하기 어려운 의구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냉전의 해체라는 상황도 함께 사고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고데스베르그 강령'으로 대표되는 전후 사민주의의 '자기 규정'을 냉전의 구도에서 충분히 자유로운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전히 주요 사민주의 정당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해도 오늘날 서구 '좌파'의 정치적 의제들의 많은 부분은, '포스트 신좌파'의 의제들이 채우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는 특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전통적 좌파'가 우경화에 따라 '계급적'인 정치 의제들에서 보인 지속적 후퇴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극단적인, 희화화된 형태를 우리는 아마도 - 사회주의적 정치세력의 전통적 부재 속에서 - '정체성의 정치'가 정치적 의제를 과점 하던 '8-90년대 미국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현재의 상황은 사민주의 내부의 '종차'의 확대가 통일성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분명 그 한가지 원인은 애초부터 사민주의에 통일성을 부여해온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역사적 공산주의'의 존재였다는 점 일 것이다. NATO에 가입하지 않은 북유럽의 중립주의도 넓은 의미에서 '서방'이라는 경계를 파괴할 만한 것은 아니었던 만큼, 사민주의의 통일성은 그들 자신의 경향상의 내적 일관성이나 그들이 국민적 정치의 맥락에서 실제로 행했던 결과들이나 지녔던 위치보다는 '서방 민주주의의 일원'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자동적으로 통일성을 부과해주었던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때문에 '동과 서' 모두의 지배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대두한 신좌파의 충격이나 구 공산권의 해체는 곧 '서'의 사민주의의 통일성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일부 외신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제 3의 길/신중도주의'에 대한 내부 반발이 (6-70년대 이후 신좌파적 움직임과 연관되어 등장한 '비제도권 좌파'가 가세한) 사민주의 중도파/좌파의 분리로 귀결된다면, 단일한 경향으로서 사민주의 그 자체의 해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민족해방운동들의 퇴조, (광의의) 사민주의라 통칭해도 무방할 의회주의 좌파의 약화로 요약되는 '반체제운동들의 고전적인 제도적 형태들'의 위기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 뿐 아니라, '새로운 급진적 운동들'의 등장에 의해서도 설명된다는 주장은 이미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I. 월러스틴 외, "반체제 운동" 등) 


하지만, '2004년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여기에 한가지 고민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분명 서유럽의 '신좌파'가 태동할 당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비판대상은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 정당들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사회보장국가적 합의의 한 축을 이루었던 사민주의 정당들이었다. 녹색당을 비롯, 이후 여러 사회운동들의 '모태'가 된 '6-70년대 서독 신좌파 청년운동의 주축,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은 다름 아니라 당 지도부에 반기를 들고 분리해 나간 즉 독일 사민당 학생조직이었다. 이런 '과거사'를 생각해 본다면 '적-록 연정'은 확실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 하는 점은,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의 우경화 속에서, 오늘날 고유한 정치적 지향으로서 사민주의가 과연 실존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바로 그 '적-록 연정'의 한 축인 '독일 녹색당'의 경험처럼, '새로운 급진적 운동들'조차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개입하는 과정 속에서 사민주의로 대표되는 의회주의 좌파의 정치형태를 회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는 점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필요하다. 이제 막 대의제 민주주의의 장에 직접 발을 들여놓은 대한민국 좌파정치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말이다. 


정치혁명을 통한 자본주의로부터의 결정적 단절의 구체적, 기술적 경로로 제시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패가 좌파정치에게 사민주의적 '상황'을 일반화시키는 가운데 정작 고유한 정치적 경향으로서 사민주의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조건은 확실히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라는 주제로 논쟁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논쟁의 주제로 그것도 핵심적인 쟁점으로 삼기 곤란한 현실은 또 존재한다. 어쨌든 그 논쟁은 모종의 사회주의적 접근이 '좌파'를 대표하는 지배적인 정치적 대안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과연 그 전제는 사실에 해당할까? 과연 (사민주의를 포함하는 광의의) 사회주의가 좌파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정치적 대안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사회주의적 접근'은 계속 옹호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계속 주요한 정치적 대안으로 유지되고 옹호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6. '반세계화 운동' 혹은 '반자본주의자들' 


(1) 시애틀의 '반자본주의 시위대' 


잠깐 지금 '좌파'들을 둘러싼 몇 가지 상황들을 살펴보자. 

그것은 한편으로는 '글로벌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불리우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사회주의/지배적 공산주의운동'의 붕괴와 '사민주의 후퇴', 그리고 그 와중에, 흔히 '반세계화 운동'으로 통칭되는 다양한 원천과 방식을 통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등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반세계화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던, 1999년 시애틀의 'WTO 각료회담 반대투쟁' 참가자들이 CNN등 언론의 보도에서 '반자본주의(자) 시위대Anti-Captalist Demonstraitors'라는 무지막지한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반자본주의(자) 시위대'라는 호칭은 확실히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 호칭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른바, '반세계화 운동'은 분명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문제들과 주체들로 구성된 흐름이다. 그 구성이 복합적인 만큼 대안이 명료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자본주의(자) 시위대'라는 어처구니없는 작명법은,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는 작명법이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움직임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보라. 이른바 '반세계화 운동'은 결국 명료하게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주도적인 자본의 운동형태, 그 축적전략에 대항하는 흐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시장과 자본이동의 지상권을 반대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이윤만을 위한 생산으로 생태학적 재난을 초래하는데 반대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초과착취를 위해 유지되고 강화되는 각종의 차별들에 대항하는 운동이며, 공공재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운동이며, 문화와 일상의 자본화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운동(들)을 어째서인지 '세계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그 일부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호부호형 하지 못하는 길동의 설움'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동과 서'의 '역사적 사회주의운동'이 생태학적 갈취를 수수방관했고, 성별, 인종, 국적, 지식과 숙련 등 각종의 차별에 대해, 심지어 그러한 차별이 결국 사회주의 운동의 보루라 스스로 주장하던 노동자계급을 위계적으로 분할하는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짊어진 업보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오늘-대한민국의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반자본주의(자) 시위대'라는 이 우악스런 작명법은, 좀 무식해 보여도 오늘날 세계에서 좌파정치가 직면한 상황에 대해 일단의 진실을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자본의 논리, 자본의 폭력에 대항하는 움직임들이 곧장 '사회주의'와 같은 단일한 체제적 대안 모델로서 총괄되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동'의 '현실사회주의/역사적 공산주의'의 붕괴 뿐 아니라, '서'의 사민주의 또한 이미 많은 한계를 노출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근 서유럽 좌파정치의 몇몇 주요쟁점을 살펴보자. 노동시간단축, 이민노동자, 생태학... 과연 이들 중 전후 사민주의적 노선의 핵심적 기반이었던 고전적인 '케인즈주의적 생산성 협약'과 친화적인 것이 무엇일까? 앞서 이미 지적했듯, 사민주의적 정치세력이 전면에 나서는 상황에서조차 이처럼 정치적 의제의 상당부분은 '포스트 신좌파적'인 것이 점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가속화되는 만큼 대중의 생활조건을 방어한다는 가장 원칙적인 차원에서 사회보장체계의 유지/강화와 시장에 대한 공적 개입과 조절이라는 논점은 사라지지도 축소되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한다면 사민주의자이든 아니던 '모종의 좌파'라면 블레어-슈뢰더류의 길을 가지 않는 이상, 당장 별다른 차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시 고전적인 (케인즈적) '생산성 협약'으로 귀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절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조차 종종 그 협약에서 배제되었던 많은 국외자들, 소수자들은 이미 뚜렷한 정치적 목소리로 존재한다. 대중소비사회를 모델로 구축된 과거의 협약과는 이질적인 가치들 또한 이미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존재한다. 만일 수많은 다양한 정치적 주장들, 대중적 저항들 속에서 언뜻 언뜻 내비치는 대안적 가능성을 기초로 '새로운 협약'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자전거와 사회주의 


물론 대중의 삶과 연관되는 한 어떠한 쟁점도 '자원의 분배'라는 문제, 사회적 생산의 통제와 영유에 대한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정체성과 차별의 문제이건, 생태학적 안전성의 관심이건,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이건, 그 어떤 관심에서 시작하건 그것이 대중의 삶에 진지하고 유의미한 개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원의 흐름과 사회적 생산에 개입하는 힘을 요구한다. 즉 그것은 '자본'을 대면해야 한다. 국민국가와 대의 민주주의의 기제를 그 개입의 가능한 경로, 수단에서 원론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최소형태일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회주의적 접근과 재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그것은 대중의 삶의 조건을 방어/개선하고 사회적 평등과 개개인의 삶의 자율성을 향상하기 위해 사회적 생산의 과정에 공적-민주적 조절을 시도한다는 기본적 형태의 사회주의적 접근일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과정에 개입된 다양한 세력들과 그들의 가치들, 목표들이 절합된 것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사회주의는 언제나 그렇게만 제기되었고 존재해왔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그 사회주의'는 ('동'이던 '서'이던) 근대적 사회주의-노동자운동이 출발한 핵심적 기반으로서 (단지 프롤레타리아/임노동자계급 일반이 아니라) '내국인-대공장-남성-정규고용'이라는 특정화된 정체성의 형태를 축으로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절합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어떤 초기 사회주의 사상가도 가족의 존속을 주창한 바가 없다. 하지만 20세기에 '실현된 사회주의'는 가부장제적-사적가족으로 짜여진 가계는 서구 사회보장국가의 공적보장체계는 물론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결국은 사회적 결연의 기본구성으로 특권적 지위를 유지했다.) 


말하자면 지난 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한편으로 근대의 지배적 사회주의가 일정한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의 좌파정치는 '이주노동자-가사노동자-비정규고용-분산된 서비스 노동자'나 생태학적 위기를 충분히 끌어안을 만한 사회주의적 정치의 프로그램이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구'의 '현실사회주의'는 생존에도 뿐만 아니라 자본관계와 다양한 지배-종속 형태의 극복에도 일정한 실패를 겪었음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두 양상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 간주될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19세기 말 유럽의 어느 사회주의운동 지도자는 '노동자계급이 모두 자전거를 소유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19세기 말의 자본주의에서 이것은 일말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이 자전거는 물론 자동차까지 소유하게 되는 것은 결코 '공짜'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거꾸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교통체계'를 대안적 사회상에 끼워 넣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세계적 보편현상이 되어 버린 저성장-고실업 혹은 '고용 없는 성장'속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금융투기적 속성을 보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직접적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산 노동'의 양이 부의 원천으로 존재하기를 그치게 될 것이라는 '옛 예언'을 또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부 급진적인 이론가들은 여기에서 '노동중심사회의 위기'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좌파정치의 미래대안은 과연 '완전고용사회'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탈-노동사회'여야 할까? 


즉, 현재는 고전적 사회주의 모델 전체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는 시대에 속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의 점진적 변화냐, 정치혁명을 통한 결정적 단절의 시도이냐 등은 오늘날 좌파정치가 직면한 과제들을 포괄할 만한 중대성을 지니는 것은 사실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사민주의'적 실천양식이, 어쨌거나 아직 생존한 지배적 사회주의의 형태로서 좌파정치가, 특히 국가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상대할 때 일단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조건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7. ... 적·녹·흑의 연대를 


(1)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먼저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사민주의-사회주의 논쟁을 다루는 듯 하면서 정작 민주노동당 내의 논쟁의 한 축인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인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민주노동당식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기원은 '유로코뮤니즘'에서 시작된 주장이다. 그것은 일단은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이지만, 그 결과로 성립하는 사회주의에게도 '민주적'일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지 이행노선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주장이 제기된 '70년대의 맥락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이중의 이행'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 + '현존 (국가)사회주의의 민주적 개혁'의 주장이다.('90년대 초·중반 한국 진보진영 '좌파'가 언급하던 '민중적 통일론'과 매우 닮아있다.) 


그런데, 대체 왜 '민주적 사회주의'의 원조인 '유로코뮤니즘'이 동구권의 붕괴에 충격을 받아야 했을까? 왜 자신들이 왜곡되고 잘못된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던 권력들이 붕괴했는데, 유로코뮤니스트들 대부분은 사민주의로 방향을 바꾸었을까? 물론 거기에는 유럽의 공산당들이 의회정당으로서 거의 사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실천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사회주의'가 국가기구와 생산수단의 소유권이라는 이행의 관제고지를 이미 접수한 상태에서 '민주적 개혁을 통해 진정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는커녕, 민주적 개혁에 실패하고 심지어 노멘클라투라의 사적자본가로의 변신을 통해 신속하게 '역 - 이행'해 버린 결과와 무관한 일일까? 


즉 사민주의의 모든 조류가 한계 뿐 아니라 후퇴를 겪고있을지언정, 사회보장국가 그 자체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지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유로코뮤니즘의 '민주적 사회주의' 역시 왜곡된 것이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의 우위에 기반 한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통독당시 동독의 '사회주의적 반대파'들이 느꼈던 당혹감은 서구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지만 이 상황 속에서 권력의 양식, 지배의 기술적 형식들에 대한 한층 급진적인 비판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급진적 비판에서도 사회구성체의 진보적 이행을 비가역적인 사실로 굳힐만한 관제고지, 즉 단절점들이 설자리는 없다. '소비에트형 이행노선'을 통한 전면적 단절이든, '민주적 길을 통해 복수의 단절점들을 거치는 구조개혁'이든 그것은 일정한 불회귀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 그 모든 것이 유동하는 사회적 세력관계에 활짝 열린 것으로 규정된 이상 남는 것은 '영원한 투쟁' 혹은 '운동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던 무엇을 이야기하던 그것은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애당초 '과학적 사회주의'는 달성될 모델 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 사회적 동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영역에 대안적 사회에 대한 모델이 자리를 잡게된 것은 결국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시작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상, 모델에 대한 모든 주장은 다시 '과학에서 유토피아로' 그 영역을 옮길 수밖에 없다. 즉 민주적 사회주의는 딱히 '파레콘'이나 '대안 공동체' 보다 더 과학적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결국 '사민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언명은 미래적 전망에 대한 개방성의 표현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2) '운동 속의 운동' 


그럼에도 우리는,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에 관여된 정치세력이라면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대중의 요구를 정책들, 방안들로 가공해서 제출 할 수밖에 없다. 자 그럼 지금 한국사회에서 당신이 과연 그것을 위해 참조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무엇일까? '파레콘'이나 아나키즘적 공동체인가, 아니면 사회보장국가의 정책들인가? 


그런데 과연 당신은 사회민주주의에 만족하는가? 과연 사회민주주의는 정답인가? 이미 사회보장국가를 성립시켰던 (케인즈주의적인) '사회적 협약'이 일정한 배제들을 내포했고, 그것이 그 협약의 위기에 일조 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배제들은 사민주의자들, 사민주의적 정당들이 아니라 결국 '외부'의 비판과 개입에 의해서 교정되어 올 수밖에 없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아직은 생존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보장국가와 그 성립에 공헌한 사민주의에 올인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사민주의이든 그 무엇이든 사회주의적 접근 그 자체가 이미 확정된 답안이 아니라, 재검토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리고 원론적인 문제로, 남은 것이 '운동 그 자체'라면 운동이 어떻게 계속 앞으로, 아니 더 왼쪽으로 이동하게 만들 것인가? 즉, 어떻게 '운동 속의 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사민주의를, 사회보장국가를 참조하는 만큼 사민주의의 전통 외부에서 사회보장국가의 '사회적 협약'이 내포했던 배제들을 비판하고 교정해온 흐름들, 나아가 사민주의 또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리어 그것을 그 조직과 실천 속에 반복했던 대의제 민주주의-국가의 모순에 대한 비판의 원천들 또한 참조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앞으로 수많은 한계와 곤란들에 부딪힐 의회적 좌파정치에 힘을 보태는 한편, 그 의회적 좌파정치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나 또한 (약간은 다른 이유로) 과거 진중권씨가 언급했던, (이를테면)'적·녹·흑의 연대'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싶다. 필요한 것이 단지 '적·녹·흑 뿐이겠는가? 민주노동당과 연관해서도 참조대상으로 언급되었던 노르웨이의 '사회주의 좌익당'의 경우처럼 오늘날 사민주의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자본과 시장에 대한 것뿐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반전평화, 소수자/차별철폐 등의 논점을 지닌다. 당장 어쩔 수 없이, 사민주의적 정책을 제시하면서도, 제3의 길을 주장하다 이라크 침략전쟁의 푸들이 된 블레어의 꼴이 걱정된다면, 일단은 이 나라의 진보정치가 최소한'사민주의 좌파'의 길은 걷도록 몰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위의 리스트에서 대충 보이듯이 오늘날 '사민주의 좌파'는 사민주의적 전통 그 내부에서 발흥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신좌파와 같은 '외부'의 급진적 문제제기에 대한 사민주의적, 의회주의적 좌파의 적응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 오늘날 사민주의는 신념이나 이론이기 이전에 사회보장국가라는 하나의 체제형태와 연루된 정치적 실천의 대상이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사민주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제도-정치적 실천에 대해 (이미 사라진 또 다른 지배적 사회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급진적 개입을 지속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을 획득하는 일이다. 


굳이 생태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당장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것이자, 현실 사회주의/역사적 공산주의와 사민주의 모두가 기반 했던 욕구와 가치의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서 생태학적 접근을 수용하는 것은 시대의 대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좀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흑색', 즉 아나키즘적 권력비판이다. 권리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민주주의적 담론에는 하나의 함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다루는 것은 언제나 이미 표상된 주체의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민주주의적 담론'은 절대로 대중의 힘 그 자체가 구성되는 것에 대한 해명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대중의 힘, 대중의 구체적 요구들은 언제나 항상 민주주의적 담론질서를 '외부'에서 침입하고 민주주의적 담론은 언제나 그것에 사후적으로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논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운동 속의 운동, 운동의 지속적인 급진화는 하지만 결국 대중을 사로잡은 적대에서, 그 적대 속에서 등장하는 대중의 힘에 대한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에 대한, 지배-종속의 제 형태에 대한 민감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적 권력비판의 자세보다 이것에 더 유용한 수단이 무엇이 있겠는가. 


당장 우리의 진보정치는 사민주의를 넘지 못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당장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이미 뻔히 알려진 한계를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다. 


귤이 희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모든 타협은 투쟁의 결과이다. 지금 설명해야 하는 것은 당장은 그 내용이 뻔할 수밖에 없는 타협과 협정이 아니라, 그것을 낳는 투쟁이다. 그리고 그 투쟁이 가능한 타협의 내용을 초과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귤을 손에 넣고 나아가 그 타협과 협정을 방어하고 또 갱신할 수 있다. 수많은 노동자투쟁 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수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종종 그 투쟁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그 또 하나의 지배적 사회주의와 등치 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둘러싼 당장의 암울한 정치적 현실에 압도되어 한국사회를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이나 1905년의 제정러시아라고 믿어버린 '80년대 진보운동의 소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1930년대의 스웨덴도 말이다.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초반의 초기 노동자운동의 선언을 방불케 하던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 차티스트나 피의 일요일에 동궁 앞의 노동자들이 외쳤을 리 만무한 - 근로기준법의 제정이 아니라 '준수'였음을. 이식된 전후 자본주의 국가의 표준모델에 딸려 들어온, 하지만 그것을 작동시킬 현실의 세력관계가 없었기에 사문화된, 노동권을 보장하는 사회입법의 '실행'을 요구했던 것임을... 


한국자본주의가 2004년의 세계자본주의의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한 한계는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하는 것 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오늘날 사회보장국가의 제도들, 그 좌파정치의 의제와 요구들은 결국 과거의 사회적 협약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급진적 비판들의 결과라는 것을 망각한다면 탱자 이외에 어떤 결과도 나올 수 없다. 나아가 심지어는 그 급진적 비판의 주체들조차 더 이상 과거만큼 급진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포함해서 말이다. 


당장 우리의 어깨 위에 사민주의자의 두뇌를 얹어둘 수밖에 없다면, 대신 가슴속에는 아나키의 심장을 품자. 권력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지배와 종속, 차별과 배제의 모든 형태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의 자세를 통해서만 현실의 대중의 삶을 사로잡은 적대를, 그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투쟁들을, 그것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을 새로운 대안을 발견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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