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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마르코스,『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by 내오랜꿈 2007.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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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창이 되는 언어
마르코스,『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인디언 500년의 저항을 기념하는 시위대 속에서 갑자기 4천여 명의 젊은 남녀가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나타난다. 개척자가 원주민에게 세금과 노역을 부과하기 시작한 역사의 상징물 마사리에고스 조각상을 향해 그들은 화살을 날린다. 멕시코 원주민의 저항사에서, 이 조각상이 무너진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보다 더 큰 상징적 울림이 된다. 그들은 ‘우리의 나이는 500살’이라며, 인디언 투쟁의 역사가 곧 자신들의 삶 자체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갈색 피부를 가진 수천의 전사들 사이에서 푸른 눈과 하얀 피부를 가진 청년이 나타난다. “나를 통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말한다.”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라 대답하며.

마르코스가 직접 펜으로 쓴 반란군 성명서가 잇따라 신문지상을 뒤덮고, 신문이 그의 발언을 봉쇄하자 그의 말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들불처럼 퍼진다. 사파티스타 전사들이 쓰는 검은 스키마스크는 그들에게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떨쳐버리고 혁명의 집합적 주체로 거듭나는 힘을 부여한다. 그들은 보이려고 얼굴을 감추는 것이다! 사파티스타의 시작은 오직 6명의 신참 게릴라들이었다. 아무도 전세계 수천만 인류가 ‘나는 사파티스타!’라 선언하게 될 것을 예상치 못했다. 사파티스타를 관념적 이데올로기에서 구해준 것은 기존의 모든 이념적 전제들을 과감히 내려놓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무지렁이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울 수 있는 용기였다.

사파티스타 사람들은 바로 옆에서 함께 총을 들고 싸우던 친구들이 귀와 혀가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어떻게 그 죽음을 극복하는가? 그들은 친구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도 않으며, 고문과 처형으로 죽어간 친구들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친구들의 죽음을 자신의 온몸으로 껴안고 매일매일 친구들의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들의 잘린 혀로 하여금 살아 남은 나의 혀를 통해 말하게 하라. 살아남은 나의 귀를 통하여 죽은 이들이 듣지 못한 세상의 맥박을 듣게 하라. 그들은 친구들의 죽음을 산다. 그들에게 ‘삶을 산다’는 ‘죽음을 산다’와 동의어다. 살아 있는 내가 죽어 있는 ‘너’가 됨으로써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강렬도로 비화한다.

“권력은, 죄수가 감옥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이 사람들의 힘이 현대 무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뿌리에서, 그들의 죽은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갖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갖기 위해 아무 것도 갖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코뮨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한 사람의 목소리로 나올지라도 곧 집합적인 울림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곧 타자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말. 하나이면서도 많은, 집합적 목소리가 권력에 맞서는 혁명의 네트워크로 변하는 메아리. 꿈이 사파티스타에서 편히 쉴 수 있게, 꿈이 진흙탕 속을 뒹굴게! 진흙탕 속을 뒹구는 꿈들의 코뮨, 말처럼 쉽지 않다. 꿈과 이상은 세상 무엇보다 넓고 높되, 몸은 매순간 진흙탕을 굴러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가난조차 무기로 삼음으로써, 가난을 핑계 삼고, 부자가 되기 위한 몸부림에서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의 잠든 의식을 강타한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항복했다면, 만일 우리 자신을 팔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난을 무기로, 저항의 무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을 위해 타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싸우고 있지만 그 투쟁에는 우리ㅡ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우리는 종종 잊고 있어.” 사파티스타인들은 코뮨 내부 여성들의 명령으로 금주 명령을 내리고, 여성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함께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포한다. 원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매춘과 실업과 구걸이 사라진다.

일상과 혁명, 지금-여기와 행복의 함수관계를 사파티스타는 어떻게 이야기했던가. “투쟁해봐, 그럼 행복해질 거야.” 사파티스타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학살과 처절한 고통을 당했으면서도 자신들의 불행을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강력한 것은 우리가 허약한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대안이 없는 탓에, 저들이 악몽의 연속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슬퍼하거나 한탄하지만 말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항상 협객이 있었고, 지금도 협객이 있다. 검은 스키마스크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한 명의 목소리를 통해 수천만의 목소리로 아우성치는. 그들의 온몸이 절실한 무기이기에, 그들의 말조차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는.

정여울, 「칼과 창이 되는 언어」, 『book+ing 책과 만나다』, 해냄(200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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