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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 탈주를 위한 반시대적 사유 -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현실적 운동 / 조원광

by 내오랜꿈 2007.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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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 탈주를 위한 반시대적 사유, 코뮨주의
코뮨주의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현실적 운동

조원광 / 연구공간 수유+너머
출처 : <경희대대학원보> 2007년 09월 10일 


코뮨(commune)은 능동적인 구성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동체이다. 삶의 양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코뮨의 목적이다. 나는 맑스의 communism이 코뮨을 지향하는 실천적 태도이자 기획, 즉 코뮨주의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맑스의 communism은 ‘공산주의’로 번역되었다. 일견 모호해 보이는 코뮨주의를 파악하기 위해 소위 ‘전통적’ 공산주의와의 비교가 효과적이리라.

코뮨주의와 공산주의

첫째, 코뮨주의와 공산주의는 맑스가 사회 변혁의 핵심 요인으로 지적한 ‘생산력’을 다르게 이해한다. 전통적 공산주의에서 생산력이란 생산성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얼마나 많은 가치를 생산하느냐가 생산력 발전의 척도이다. 공산주의가 생산성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풍요로운 재화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물질적 재화의 풍요로움을 통해서 가능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현실은 재화의 양이나 생산성이 맑스의 communism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풍요로운 재화와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미국의 의료 보장은 쿠바보다 못하다. 반면 생산성의 측면에서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던 봉건제 하에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여가를 누렸다.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느냐는 결코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고 영위하느냐를 결정하지 못한다.

코뮨주의는 생산력을 [어떤 대상을 이용 가능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능력]이자, [여러 가지 형태의 이용 가능성, 즉 다양한 생산을 수행할 능력]으로 정의한다. 맑스는『독일이데올로기』에서 생산을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생존과 생식을 위해 자연을 영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하는 집합적 활동으로 규정한다. 즉 여러 잠재성을 가진 자연을 특정한 형태로 변형해 이용하는 것이 생산이다. 이때 생산력은 특정한 변형을 얼마나 잘 하느냐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변형을 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예컨대 나무를 얼마나 많이 해올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나무로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도 생산력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즉 코뮨주의적 생산력은 생산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전에 없던 가치 생산에 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주어진 가치의 효율적 생산만을 추구하는 생산성과 달리, 코뮨주의적 생산력은 가치 자체를 새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하며 다양한 생산의 장에 열려있다. 코뮨주의적 생산력은 화폐적 가치에 종속된 노동의 효율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이 아닌 형태의 생산, 전과 다른 형태의 삶을 생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공산주의와 코뮨주의는 모두 생산력 발전을 추구한다. 하지만 둘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둘째, 공산주의와 코뮨주의는 다른 시간성을 갖는다. 공산주의는 역사주의적 시간, 선형적이고 발전적인 시간에 기초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 중 최종 단계로 상정된다. 각각의 단계를 거쳤을 때 역사의 종착점으로서, 더 이상 발전이 의미 없는 완성단계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시간성은 적지 않은 문제를 낳았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당시 멘셰비키는 러시아가 아직 공산주의를 이룰 수 없다고 봤다. 자본주의의 단계를 충실히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 멘셰비키는 적극적 행동을 포기한 채 2월 혁명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조심스럽게 감시하는 파수꾼을 자처했다. 반면 대중들은 각지에서 소비에트를 구성하여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 나갔다.

맑스 역시 이런 시간성을 비판한다. 1881년 자수리치가 자본주의가 성숙하지 않은 러시아에서도 communism이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맑스는 역사에 여러 계열들이 존재하고, 러시아 농촌코뮨에 내재하는 사유요소가 공동체요소를 제압하느냐, 공동체요소가 사유요소를 제압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발전 경로를 취할 수 있다고 답했다. 러시아가 반드시 자본주의를 통해야만 communism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코뮨주의는 선형적/발전적 시간 대신, 시간을 만드는 시간, 구성적 시간성을 갖는다. 코뮨주의의 시간은 기다리면 알아서 오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반시대적으로 구성할 때만 출현한다. 그러므로 코뮨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구성될 수 있다. 하나의 선형적 계열이 없기 때문에, 지금-여기의 조건과 문제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코뮨을 구성할 수 있다. 또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코뮨주의의 완성된 형태는 없다. 매번 일어나는 현재적 삶의 구성 자체가 코뮨주의이다. 공산주의에서 이행 운동은 아직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기에, 운동은 미완의 표지이다. 반면 코뮨주의에서 이행 운동은 미완의 표지가 아니라 완성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구성의 표지이다. 맑스가 communism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현실적 운동이라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코뮨주의와 현실성

즉 코뮨주의는 주어진 가치에 종속되지 않고 지금-여기서 새로운 삶을 창안하는 끊임없는 구성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코뮨주의는 비현실적이라 지적한다. 이들의 지적은 국가나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거나, 코뮨주의에는 총체적인 변혁전략이 없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선 국가나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물론 어렵다. 하지만 국가나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훌륭한 모범생도 학교에 불만을 가지게 마련이며 아무리 훌륭한 부르주아라도 자기 삶에 대해 회의하곤 한다. 분명 국가와 자본주의는 그것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포획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히 포획했다고 생각할 때조차 비국가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인 움직임은 생겨난다. 들뢰즈/가타리라면 이를 포섭불가능한 결정불가능성의 지대라고 했을 것이다.

코뮨주의에서 총체적인 전략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탈주의 선’들이 극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각 상황에 맞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전략이다. 서로 다른 것들을 한꺼번에 묶는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전략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한 농촌 코뮨이 공립학교에 유기농 농산물을 공급하여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려다 실패했다고 하자. 이 농촌 코뮨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권력의 체계적 장악’ 같은 총체적 전략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국가라는 적을 추상화시킬 위험이 있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싸워야 할 국가기구가 동네 동장인지 학교 교장인지 파악하고, 싸움을 위해 어떤 전략을 써야 하는지 이웃들과 고민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물론 국가와의, 신자유주의와의 싸움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들이 자본주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코뮨들을 파괴하고 포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탈-국가/자본주의적 가치를 꿈꾸는 코뮨들의 성장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실질적 투쟁의 확대와 연대로 이루어져야한다. 국가와 싸울 때조차 그것은 국가를 직접적으로 벗어나기 위함이어야 한다. 반면 국가를 ‘장악’해서 혁명 세력 전반에게 총체적인 기획을 ‘부과’ 하려는 시도는 운동가보다 오히려 통치자에 가까운 태도이며, 코뮨을 구성하는 성원들의 능동적 구성능력을 오히려 저해한다. 전체적 판은 한 집단이나 개인이 그리는 게 아니라 코뮨 구성원들의 능동적이고 힘찬 활동에 따라 그려지는 것이다.

들뢰즈는 가장 객관적이며 무전제할 것 같은 사유에도 주관적이며 무비판적인 전제, ‘사유의 이미지’가 숨어있다고 말한다. 칸트식의 공통감이 대표적이다. 서로 다른 인식능력들의 ‘조화’를 통해 진리를 인식할 때,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능력들이 작동하는 양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 특정한 방식, 조화로운 방식은 당대의 통념 같은 경험적인 사실을 반영한다. 소위 객관적인 판단이란 시대적인 판단이다.

혹시 우리는 시대적인 판단을 현실적인 판단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뮨주의는 비현실적인 사유가 아니라 반시대적인 사유이다. 그것은 지금과 다른 삶을 추구하기에 반시대적이지만, 초월적 이상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조건에 집중하기에 현실적이다. 이런 반시대적 현실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유가 가진 시대성을 떨쳐내야 한다. 지금 나의 사유는 어디쯤에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대안운동 : 꼬뮨주의, 자율과 아나키

김상운 / 자유연구가
출처 : <경희대대학원보> 2007년 09월 10일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운동의 흐름들과 끊임없이 마주치고 있다. 몇 년 사이에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인 IWW가 재건되는가 하면, 아나키스트와 자율주의자들의 연합 조직체들이 곳곳에서 새롭게 생성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반-권위주의 블록’이라고 칭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조직화에 있어서 특정한 ‘권위’나 ‘당파’, ‘지도자’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자유연합이나 ‘수평적’ 운동을 목표로 한다는 함의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로’라는 명령체계에 속박되어 있는 과거의 시민운동이나 NGO, 혁명운동과 자신들을 구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다. 또 이들은 고전적인 시민불복종에서부터 각종 Black Bloc의 실천까지도 포함하여 합법적 시위나 집회를 뛰어 넘어 ‘직접 행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액티비즘’은 과거의 운동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점에서 유연하고 유동적인 실천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정열과 의지와 힘에 따르는, 생활형태, 신체성, 정서, 인간관계, 즉 ‘가치’를 형성하는 총체적 변혁에 이르기까지 미규정적인 강도와 포괄성을 가진 운동이다. 그리하여 이 개념은 그 힘과 가능성을 현재에도 끊임없이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미결정성은 무엇보다도 그/녀들이 주창하는 - 목적으로서 지향하는 이상사회를 ‘지금 여기’의 운동체 속에서 실현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닌 -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라는 지향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흐름은 좌파의 오랜 역사 속에서 배태된 이론적 경험을 완전히 수용하기보다는 백지상태로 환원하면서 ‘지금 여기’의 활동을 위한 ‘직접 행동’에서 재출발하고자 하기 때문에 노쇠한 좌파 이론가나 활동가들에게는 나이브하게 보일 것이다. 60년대 세계의 신좌파 활동가들에게는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일궈내는 ‘이념’이 중요했고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념이 그들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었기에 일반 민중이 그런 이념을 알든 알지 못하든, 이런 이념에 의해 세계 경제의 구조적 원리를 파악하고 이로부터 세계 변혁의 원리를 도출하는 자, 이러한 ‘외재적 법칙’에 생생한 말을 부여하는 자가 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자신의 이념에 헌신하는 ‘병사’가 되었다. 이 경우 ‘투쟁 자체’는 해방 운동의 필요악이자 희생적 행위가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행복이나 기쁨이라는 요소는 들어설 수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 된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은 그래서 자신이 부여하거나 타인에 의해 부여된 ‘사명감’이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액티비스트들에게는 액티비즘 곧 투쟁이야말로 가장 풍요로운 지대이며, 따라서 이것을 발전시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액티비즘에 이론적 목소리를 부여하고, 나아가 미국에서 ‘액티비즘’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두 명의 이론가, 특히 우리에게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로 잘 알려진 존 홀로웨이와 조금은 낯선 데이비드 그래버(David Graeber)의 『가치에 관한 인류학적 이론을 향하여』(2001)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두 사람의 책이나 글은 오늘날 ‘액티비스트’들이 애독하고 있는 반면, ‘좌파 학자’들은 그다지 흥미로워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이론이 학문적으로 뒤떨어지기 때문도, 질적으로도 저열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또 홀로웨이가 맑스주의자이고 그래버가 아나키스트이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사회를 가능한 한 동태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며, ‘변화의 법칙성’이 아니라 ‘변혁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며, 변혁의 주체를 미지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이름붙이기를 꺼려하며, 또 이를 위해서 ‘긍정의 존재론’보다는 ‘변증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1) 존 홀로웨이와 부정의 외침

홀로웨이에 따르면 인간이 처음 가진 것은 성 요한의 ‘말’이 아니라 거절의 ‘외침’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부정’이 관통한다. 이것은 우선 권력에 대한 부정이며, 나아가 (계급규정을 포함하여) 모든 동일화와 이름붙이기에 대한 부정이다. ‘통일’이 없는 ‘부정’ 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긍정의 존재론’을 역행하고 있고, 따라서 ‘알튀세르 이래의 스피노자적 맑스주의’에 도달한 사람들이 그를 회피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세계를 변혁하다’라는 테제는, 바꿔 말하면 특정한 ‘권력을 장악하는 투쟁’이 아니라 ‘권력 자체에 반하는 투쟁’, ‘권력을 분해하는 투쟁’이다. 문제는 누구의 권력인가가 아니라, ‘권력의 존재’ 그 자체이며, 권력 자체의 해체가 혁명운동이다. 그는 그것을 ‘반권력’이라기보다는 ‘반-권력(anti-power)’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사빠띠스따 이래의 ‘액티비즘’에서 확대되기 시작했던 것은 확실히 이 ‘반-권력의 영역’이다. 바로 이것이 이른바 ‘자율의 영역’이며, 그 투쟁에는 ‘혁명인가 개혁인가’라는 구별이 없다. 그러한 투쟁을 보증하는 것은 권력을 형성하는 ‘~에 대한 권력’(power-over)에 대항하는 ‘~을 하는 권력’(power-to)이며, 이것이 ‘액티비즘’에 무한한 가능성을 보증한다. 그에게 있어서 투쟁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따라서 ‘투쟁의 도구화와 계층서열화’를 거절한다.

이러한 홀로웨이의 기본적 존재관은 우리의 행위에서부터 사회적 협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동일화하여 인식한 대상은 모두 과정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와 유사하다. 그래서 그는 ‘정의(定義)’, ‘이름붙이기’를 ‘복종’과 동일시한다. 그가 보기에 진정으로 ‘비판적․혁명적 주체’는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한없이 풍부한 ‘부정’ = ‘반-권력의 영역’과도 조응한다. ‘불복종의 외침은 비동일성의 외침이다’로 간주된다. ‘비동일적’인 ‘반-권력의 영역’은 또한 편재하는 비가시성의 영역이며, 바로 이것이 ‘아직 없는 것’의 잠재력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상기하게 되는 것은 사빠띠스따의 마스크이자, 블랙 블록의 무명성 ― 즉 ‘얼굴 없는 투쟁’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자율주의를 한편으로는 크게 평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다른 길을 걸어간다. 특히 마리오 트론티의 ‘지배보다 투쟁이 선행한다’는 관점, 즉 이른바 ‘맑스주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높이 평가한다. 자본의 사회적 발전은 노동자의 투쟁(저항의 형태, 문화생산)에 종속되어 있다. 자본을 움직이는 동력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며, 바로 이것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노동자의 ‘계급구성’은 공장의 노동을 초월하여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산업자본에서 정보자본으로) 단계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요컨대 역사란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의 역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이 경우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은 ‘분류되는 측과 분류하는 측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트와 네그리는 ‘자본’을 계급투쟁으로서 파악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위기(경제공황)는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아니라 궁극적인 ‘부정’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계급투쟁에 있어서의 궁극적 전환점이다. 그것은 자본과 반노동(인간성)의 상호거부가 자본의 지배를 재구조화하는가, 아니면 그 통제의 종언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계기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붕괴이며, 이것은 어떠한 가능성에도 열려져 있다. 그에게 자본주의 사회란 봉건제가 붕괴한 후에 벌어진 혼란스런 상황을 가까스로 통제하는 기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은 특수한 개인이 특수한 개인을 지배하던 것에서 매개를 통한 지배로 전환한 것일 뿐이다.

나아가 자본주의에서의 주체성이란 어디까지나 ‘부정적’이다. 이것은 자본과 노동자계급의 관계는 철저히 ‘내재적 관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투쟁은 ‘부정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단히 가둬두려고 하는 세력에 대한 투쟁이며, 외재적인 적에 대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투쟁이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모순’ 따위란 없다. 우리 자신이, 우리만이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 대신 투쟁 속에는 무한한 변혁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현대의 ‘액티비즘’은 ‘지금 여기의 장에서’ ‘존재론적으로’ 그 무엇과도 관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까? 당연히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다. 이 뻔한 질문의 시나리오에 대한 거부는 ‘물으면서 걷는다’는 사빠띠스따의 실천론과 공명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투쟁하는 자’의 관점에서 사고한다는 원칙과도 관련된다. 즉 ‘예시적 정치’가 ‘지금 여기’에서 싹틀 가능성을 노래하는 것이다.

2) 그래버와 액티비즘

“모든 정치․경제적 투쟁은 가치를 둘러싼 투쟁이다”고 생각하는 그래버의 이론적 기초는 ‘인류학적 가치론’이다. 인류학의 문외한인 내가 이것을 제대로 서술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대신 액티비즘의 관점에서 그의 가치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버의 가치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사물의 가치론’에 대한 ‘행위의 가치론’이다. 최종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그는 자신의 가치론을 구축하며, 이것이 그의 기획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인류학적 가치론은 가치를 개인의 욕망으로 간주하는 ‘경제학적’ 입장과 가치를 ‘의미생성적 차이’로 간주하는 ‘언어학적(소쉬르적)’ 입장 사이에서 흔들렸다. 즉 ‘가치’를 ‘욕망’과 ‘의미’를 통해 고찰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치의 사회형성성과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이것들을 ‘동일한 위조 동전의 양면’이라 부른다. 반면 “행위의 감추어진 생성적 힘에서 출발하는 것은 완전히 상이한 문제틀을 창출한다. 가치는 … 통상 이러저러하게 사회적으로 인지가능한 형식에 반영된 모습으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행동의 중요성을 표상하는 방법이다. 단, 가치의 원천은 그러한 형식 자체가 아니다.” 가치형성이라는 것은 ‘변용하는 잠재력’이다. 즉 가치란 이미 고정된 사회관계에 관한 공적인 인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관계를 구축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여’ 무엇이든 가능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그는 ‘가치’를 정치화하여 세계변혁의 가능성의 문제에 접근해 간다. 정치의 최종적 관건이 가치를 둘러싼 투쟁인 까닭에 ‘무엇이 가치인가’ 하는 기준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 투쟁은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다. 이로부터 ‘사회의 전체성’이라는 환상의 영역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자기에 대해 가진 이상형은 사회가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른바 ‘결론 없는 대화’(바흐친)에 의해 형성되는 복합적 현실이다. 따라서 그래버는 ‘상상적 전체상’에서의 투쟁이라는 계기를 중시하게 된다.

그는 맑스주의에 반대하여 아나키즘의 순수성을 신봉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맑스주의 계열의 저작을 탐독하고 그것들을 크게 참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 두 가지 비판을 가한다. 첫 번째는 그것이 실제로는 항상 투쟁이라는 공동 작업의 장에서 생산되어 온 ‘혁명적 지성’을 집요하게도 특정한 ‘지적 거장’과 동일시해 왔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경제주의적 관념과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맑스를 보충하기 위해 그는 마르셀 모스를 도입한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과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작업을 행하는데, 이것은 지성의 비판적 기능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하지만 우리가 운동의 계기가 아니라 단지 ‘비판’만 추구할 경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황량한 관점’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맑스주의 학자의 작업에 편재한다. 반면 모스는 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보편적인 도덕적 토대를 탐구하고자 하며, 그것을 대신할 사회의 열쇠를 다른 사회의 연구(ethonography)에서 찾았다. 이런 모습 역시 맑스가 가르친 ‘사회적 전체성이란 최종적으로는 권력과 지배의 형태라는 인식’을 망각한다면 무원칙한 낙관주의에 빠져들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액티비즘’에게 모스의 가르침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꼬뮨주의’가 상이한 꿈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편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변혁의 현실적 열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스에게 ‘꼬뮨주의’란 ‘개인적 소유’의 전면적 부정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고, 꼬뮨주의와 개인주의 역시 대립항이 아니었으며, 공동소유도 아니었다. 프랑스의 MAUSS 그룹(Movement Anti-Utilitariste dans les Sciences Sociales)은 ‘증여’가 ‘근대의 감추어진 얼굴’이라고 말했는데, 꼬뮨주의는 그 ‘증여’의 편재성으로서 현재 존재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 친구관계, 가족관계, 직장 등 ― 모든 장소에서 행하는 모든 ‘협력’과 ‘증여’이다. 그것은 편재하고 있으나 감추어져 있다. ‘시장의 익명성’이 ‘우리는 실제,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모스에게 ‘사회 계약의 기본형’은 꼬뮨주의였다. 그는 그것을 ‘전면적 선물’(total presentation) 또는 ‘전면적 상호부조’(total reciprocity)라고 불렀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분신’이라고도 불러야 할 ‘포틀래치’와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 증여는 되갚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의 항구적인 관계로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항구적인 것은 그것이 되갚음으로써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래버는 ‘폐쇄계의 호혜성’과 ‘개방성의 호혜성’을 구분하고, 후자에 대응하는 ‘꼬뮨주의’는 ‘항구성의 이미지’에서 구축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항구성’은 ‘시간적 영원’만이 아니라 ‘공간적 무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규정에 있어서만 이미 편재하는 ‘공산주의적 실천’을 ‘사회화’할 수 있는 비전이 성립한다.

‘사회’란 항상 행동적인 기획이 복합적으로 중첩되는 영역이며, ‘가치’란 행동이 보다 큰 사회적 전체성(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고 상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에 위치지어짐으로써 행위자들에게 있어서 의미를 낳게 된다. 여기에서 ‘변증법적 접근방법’을 취한다는 것은 시간의 바깥에서 추상적인 계기에서 사상(事象)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가에 있어서 정의되는 것이다. 그래버가 도출한 모스는 ‘실천’과 ‘제도’를 그러한 잠재력에 있어서 사고했다. 그것은 또한 불평등, 소외, 부정의 재생산에 헌신하지 않는 ‘상상의 전체성의 영역’을 상정하면서 변혁의 실천으로 향해 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자세는 우리를 자동적으로 ‘프래그머틱한 낙천주의’에 자리잡게 한다.

하지만 ‘상상적 전체’라는 투쟁의 장은 가치가 형성되는 양의적 장이다. 그것을 만일 우리가 ‘구조’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유동적이다. 거기에서는 스스로로부터의 개입의 가능성이 ‘권력’으로서 인지될 수 있는 장이다. 즉 자신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잠재력에 대해 무서워할 수 있는 장인 것이다. 이 영역은 홀로웨이의 ‘반-권력의 영역’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장이지만, 거기에서는 자신도 역시 적의 일부인 것이다.

홀로웨이의 ‘반-권력의 영역’과 그래버의 ‘가치창조(상상)의 장’은 오늘날 ‘액티비즘’이 첫 번째 원리로 삼는 ‘예시적 정치’의 상이한 이론적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 ‘예시적 정치’란 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자들이 타도해야 할 적의 제도(국가권력)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을 형성하는 집단의 집합성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이미 해방된 관계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윤리적 결의이다. 그것은 많은 해방운동이 역사적으로 반복해 왔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기만을 단절한다고 하는 젊은 세대로부터 나온 외침이다. 이 운동체에서의 유일한 무기는 자신들이 구축하는 운동체의 ‘정서’(affect)이다. 어떤 강제력도 행사하지 않는 이 ‘액티비즘’은 자신들의 창조력에 의해서, 모두가 상상하면서도 보지 못했던 풍부한 정치적․문화적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그 존재성을 ‘감염주의(contaminationism)’에 의해서 확대해 가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자유의지로 관계방식을 결정하게 만든다.

‘예시적 정치’는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시간적 발전이라는 규정을 괄호 안에 넣는 운동이다. 미래는 순간순간 찾아오지만, 미래로의 발전을 투기화하는 것은 (국가나 도시개발업자가 바라는) ‘권력의 태도’이다. 이에 반하여 ‘예시적 정치’는 현재를 풍부하게 하면서 사빠띠스따처럼 ‘걸으면서 묻는’ 것이다. 홀로웨이가 존재론에서, 그리고 그래버가 윤리철학적으로 보여주었듯이 ‘도래해야 할 이상사회는 바로 지금 여기에만 있다.’ 그리고 ‘액티비즘’이란 지금 여기에서 실천 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역사의 연속성을 분쇄하여 열어젖힐’ 가능성이 개입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권능과 의욕과 정열에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입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시간제는 또한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그림에 관해 관찰했듯이 과거를 보면서도 배후에서 미래로 향하고자 하는 ‘새로운 천사’의 형상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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