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뉴딜의 망상
김성구/한신대 교수
출처:www.politizen.org (2004년11월17일)
정부와 우리당 주변에서 언급되던 이른바 한국판 뉴딜의 구체적 모습이 제시되었다. 11월 7일 당•정•청 경제워크숍에서 재경부 장관이 보고한 ‘2005년 종합투자계획’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상반기에 재정을 조기 집행하고 하반기부터 정부예산과 연기금, 공기업, 사모펀드 그리고 외국자본까지 가능한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학교시설, 의료 및 복지시설, 공공주택 그리고 공공청사 건설 등 대대적인 투자확대를 통해 경기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2006년 이후에는 지역균형발전 사업과 기업도시건설 사업으로 경기활성화 정책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 전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 하 지속되는 성장둔화와 고용위기 그리고 민생파탄 때문에 강제된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거시경제지표들도 양호하고 OECD국가들 중에서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는 등 한국경제가 위기가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심지어 위기론은 현 정부의 개혁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보수언론의 음모라고까지 몰아세웠는데, 이제 그것이 잘못된 평가였음을 정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한국경제는 순환적인 위기는 아니지만 특별한 불황에 처해 있다고 실토하였다.
불황 하에서 확장적 재정정책이란 전형적으로 케인즈주의적 정책을 의미하지만, 현 정부의 확장정책의 시도가 케인즈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경기활성화 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조 위에서 추진하고자 하는데, 불황의 심화를 가져온 게 다름아닌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모순적인 정책이다. 그것은 위기에 빠진 신자유주의 정책을 어떻게든 보충해야 하는 일종의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정책이 한국경제의 구조불황을 극복하는데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경기활성화 정책은 단순하게 신자유주의를 케인즈주의적 확장정책으로 보완하는 것도 아니다. 활성화 정책은 공공수요를 창출하겠다면서도 그 자금은 전체 10조원 중 재정자금은 3조원에 머물고 나머지는 연기금과 사모펀드 등 민간자금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확장정책 자체가 반은 신자유주의적 색채로 물들어있다. 그러나 민간자본을 동원해서 불황에 빠진 경제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실경제의 불황은 투자를 통해 적절한 이윤을 얻을 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에 투자가 위축되어 발생한 것이어서, 불황 극복을 위해서는 이윤에 관계없이 투자될 수 있는 자금, 즉 재정자금의 투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 민간자본을 동원하고자 한다면, 정부의 계획처럼 민간자본에 대한 충분한 이윤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민간자본의 동원과 이윤보장은 그 자체로 소득과 수요의 창출, 따라서 활성화 효과를 제한할 수밖에 없고, 또 높은 서비스가격과 사업부진을 초래해서 재정자금에 의한 민간자본의 이윤 보전을 실로 현실화하기 마련이다. 만약 정부가 보전을 해주지 않는다면, 민간자본은 동원되지도 않을 것이다. 또는 정부가 강제할 수 있는 연금기금 같은 자본만 겨우 동원되어서 그 기금들의 부실화를 가져올 것이다. 연금기금이 노동자들의 노후와 관련된 중요한 자금이라는 점에서, 이것 또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재정자금은 설령 국채 발행을 통해 동원한다 하더라도 채권이자율은 민간자본에 보장해주어야 하는 이윤율보다 낮은 수준이고, 또 그것조차도 조세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진적이고 진보적인 조세개혁을 이룬다면, 재정자금의 동원은 투자하지 않는 자산계급의 자본을 무상으로 징수해서 공공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소득과 소비 및 투자를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렇게 케인즈주의적 확장정책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진보적인 세제개혁과 재정운용을 전제하는 것인데, 정부의 활성화 정책은 이 핵심적 요소를 제거하고 신자유주의적 요소로 대체한 것이어서 케인즈주의적 확장정책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 활성화 정책을 ‘한국판 뉴딜’이라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정부와 우리당 그리고 언론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무지와 왜곡이 뉴딜도 죽이고 한국경제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판 뉴딜이라고 요란을 떠는 와중에 나온 대통령의 횡설수설, 즉 ‘경제위기론은 재벌들로부터 나온 것이고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영양제나 환각제 투입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식의 발언도 따지고 보면 이런 혼란의 표현이다. 앞에서는 대통령도 지금 특별한 불황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1930년대 대공황을 배경으로 루스벨트 정부에 의해 도입된 ‘뉴딜’은 주지하다시피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무절제한 운동이 대공황이라는 파국을 가져왔다는 인식위에 입각하였다. 따라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개입을 통해 시장경제를 조절하고, (독점)자본의 무절제한 이윤추구를 제한하고 통제할 것이 요구되었다. 농산물의 생산과 가격을 조절하고 통제할 목적의 농업조정법, 산업의 이윤과 임금을 조정하는 산업부흥법, 금융자본의 운동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글래스-스티걸 은행법, 미국 최초의 사회보장법과 노동관계법(와그너법), 그리고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등이 바로 뉴딜을 구성하는 정책적, 법적 요소들이었다. 이렇게 뉴딜과 그 이론적 기초로서 케인즈주의는 미국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진보적 전환을 이룩한 정책과 사상이었다.
이에 반해 한국판 뉴딜은 자유무역협정과 경제자유구역 그리고 기업도시 건설 등 자유시장경제를 획기적으로 추진하고 탈규제를 통해 재벌과 기업의 이윤원리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반면, 노동자들에 대한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착취의 길을 열어놓는 반동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한국판 뉴딜은 개념이나 용어사용법에서 결코 뉴딜을 차용할 수 없는 상반된 정책인 셈인데,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을 뉴딜이라고 부르는 도착적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이필상 교수 같은 시민운동의 논자(경향신문 인터넷판, 2004. 11. 3)는 한국판 뉴딜을 비판하여 신자유주의적 뉴딜의 완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에 따르면, 공공시설이나 복지시설 같은 비생산적인 부문에의 지출은 신용카드 정책에서와 같은 거품과 부실 그리고 재정악화를 가져올 우려가 크기 때문에, 성장의 잠재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예컨대 정보통신이나 신소재, 생명공학 등 첨단지식산업과 고부가가치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정부규제나 조세부담, 노사문제로부터 기업을 해방시키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뉴딜이라고 주장하는 이런 논자들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심화되는 현 구조불황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즉 한국자본주의 역사상 어느 때보다 탈규제와 유연화 등 우호적인 기업환경 하에서 첨단산업의 주도하에 재벌들의 막대한 이윤이 쌓여가고 수백 조원의 투기자금이 몰려다니는 데도 왜 대중들의 소비제한과 신용불량, 투자위축, 성장둔화 그리고 고용위기가 해소되지 않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양자의 이 극명한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한국판 뉴딜에 대한 비판의 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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