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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by 내오랜꿈 2007.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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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도 없는데, 늘 바쁘게 산다. 그러다 어디 야외라도 나가 탁 트인 정경을 보기라도 하면, '이렇게 여유있게 살아야 되는데 말이야', 라며 읊조리기 일쑤다. 언젠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펼쳐 들었다가 얼마 못가 접고 만 기억이 있는데, 오늘 <대학신문>을 뒤지다 이동진씨의 에세이를 보게 되었다. 나도 마음 한구석엔 늘 <스모크>의 오기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같은, 느림의 여유를 실천하고 싶은데, 언제나 망상으로 그치고 만다. 

아래는 시간에 대한 이동진의 글과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정선태의 글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느림'을 주제로 한 책은 정말 많이도 나온 것 같다. 쿤데라의 <느림>이 유행한 지가 아주 오래 전 같이 아득하다. (그런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읽기 힘들었나 보다. 4권까지 나와 있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1권과 4권의 판매지수 차이가 200: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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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게으름뱅이의 성전(聖典)

시간』 , 칼하인츠 A.가이슬러 지음┃박계수 옮김┃석필┃1만 2천원SPAN>


독서 에세이 - 이동진 / 대학신문 2007년 09월 15일 (토)

 


예전에 독자가 직접 우편으로 보내온 긴 편지 속 한 구절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 좋은데, 당신의 글은 왜 그렇게 슬프고 비관적이냐”는 말이었다. 글쎄. 물론 그것은 나의 타고난 본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시간에 대한 태도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과거밖에 없다. 시간이란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될 때는 항상 과거라는 형식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각하기에 너무 짧은 현재는 찰나로 경험되는 순간 과거의 영겁 속으로 사라져버리며, 미래는 파편 같은 현재를 거쳐 과거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을 맺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그 현재라는 시간의 파편이 지니는 현기증 나는 스피드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현재를) 사는 법’이라니. 칼하인츠 가이슬러의 『시간』은, 이를테면 시간이 우리 곁을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간 속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책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저자의 시간관에 온전히 동의하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의외로 깊이와 재미가 대단해 점차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이 책의 내용은 시간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기보다는 어떻게 시간 속을 통과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경시론(經時論)에 가깝다. 일종의 문명 비판서이기도 하다. ‘리듬’과 ‘느림’으로부터 ‘기다림’ ‘휴가’ ‘걷는 시간’까지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에 대한 동서고금의 갖가지 레퍼런스를 붙여가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서술해나간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인용사례들과 지은이 자신의 시간관이 마치 대화를 나누듯 자연스럽게 리듬을 이루며 한데 엮였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차용되는 인용구들을 읽는 재미도 상당한데, 토마스 만의 『마의 산』부터 괴테의 여행기와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헝가리의 우화와 오스트리아의 격언,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가사에까지 이르는 구절들은 그 인용의 적절함과 내용의 풍부한 함의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이슬러는 심지어 하나의 장을 시(詩)로 맺는 서정성도 보여준다. 다음 문장은 이 책이 어떤 스타일의 책인지를 그대로 요약한다. “시간이라는 기차에서,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앉아서 성급한 진보에 몸을 내맡긴 많은 사람들은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바람이 얼굴에 심하게 부딪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창문을 연 채 갈 수가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고교 시절 접했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란 책 내용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러시아의 한 과학자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는 최대한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분 단위로 시간표를 짜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책은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시간을 절약하며 자신을 채찍질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과학자가 그토록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는데, 순진하게도, 당시의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박약한 의지를 한탄하며 열등감만 한껏 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가이슬러의 ‘시간’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돈이다”처럼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자책하게 만드는 ‘나쁜 금언’들의 위력을 저주하면서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독제 역할을 한다. 이 책은 피터 드러커의 “시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같은 발언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게으름뱅이의 성전(聖典)’같은 책이니까. 시간은 다뤄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대형서점에 가보면,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선 시(時)테크를 제대로 해야 뒤쳐지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수많은 허접스런 처세서적들 중에서, 의외로 ‘느림의 철학’을 말하는 책들이 종종 눈에 띈다. 한때 국내에서도 인기를 누렸던 베스트셀러 『느리게 산다는 것』이란 책부터, 『느림의 지혜』, 『현명한 부모는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같은 책, 독일 작가 나돌니의 80년대 히트작 『느림』까지 정말 많은 서적들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런 책들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우리가 아찔한 속도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책인 『느리게 산다는 것』이 정말 슬렁슬렁 프랑스적으로 진행되는(저자도 필시 게으름뱅이임에 틀림없는, 동어반복적이라서 심하게 말하면 한 챕터만 읽어도 되는) 전형적 에세이 형식인 데 비해, 독일 책인 『시간』은 독일인이 지은 책답게 무척 조직적이고 체계적인(그래서 적어두고 싶은 구절도 많고, 다 읽고 나서도 괜히 뭔가 많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저작이라는 점이다. 난 『느리게 산다는 것』은 중간쯤까지 보다가 책을 던져버렸지만, 『시간』은 단시간에 완독했다. 그렇다면 사실 나는 ‘느림의 철학’에 동조하는 척하면서도, 독서에 있어서, 나아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여전히 조바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강희안, 「高士觀水圖」


풀과 나무가 드리워진 절벽 아래, 바위 위에 엎드린 채 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한가롭다거나 여유롭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은, 차라리 눈을 뜨고 꿈을 꾸는 듯한 모습. 그는 어디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한바탕 집중호우가 지나가고 난 오후, 다리를 꼬고 누워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저토록 ‘무심하게’ 무엇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고,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또는 무엇이 그 한없는 게으름을 방해라도 했단 말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그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자본의 충직한 노예가 되기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얘기한 것은 맑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였다. 그런데 그 아픈 충고를 들을 때조차도 우리는 가슴에 품은 휴대폰이 더욱 강렬하게 구속해 주기를 초조하게 바라지는 않았던가. 지독한 매저키스트! 그런 마당에 「고사관수도」라니. 

한치의 에누리 없이 분절된 시간과 세밀하게 구획된 공간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모세혈관은 싱싱한 피로 숨쉬기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폐로 정확하게 환산되는 시간의 채찍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아왔고 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그리고 느릿느릿 사는 것이야말로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명을 다시금 약동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런데 게으름과 느림은 이 현란한 자본의 제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격언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피에를 쌍소는 힘주어 말한다. 게으름과 느림은 이 황금의 성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대담한 도발이다. 

하기야 러셀이 게으름을 드높이 찬양한 적이 있고, 밀란 쿤데라가 『느림』의 복권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이들에 비해 느림에 대한 쌍소의 견해는 훨씬 구체적이다.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기, ‘고급스러운’ 권태에 빠져보기, 꿈꾸기, 진득하니 기다리기, 낡은 시간 떠올리기, 술 한 잔의 지혜….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우리의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빈 칸을 채우면서 본다면 그다지 가벼운 것만도 아니다.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사람은 생명의 왕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폭군이자 독재자이다. 또는 삶의 또 다른 일부인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바보거나 천치다. 최고의 스피드야말로 최상의 미덕이라는 음험한 자본의 논리, 그 가증할 수사 전략을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보그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말초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 삶이 원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전략의 이면을 투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때 필요한 무기가 느림이다. 물론 느림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느림과 빠름의 역동적 교직, 그리하여 드러나는 삶의 무늬, 이를 두고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상투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느림의 미학 또는 느림의 철학을 내면화함으로써 삶의 견인력을 확보할 것, ‘빨리빨리’라는 자본의 주문을 끊어버릴 것, 그리하여 황폐해진 나의 삶을 복원할 것!”

느림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의 조건이자 우리의 삶을 노예화하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거점이다. 곧 거부를 통해 해방을 꿈꾸는 사람은 느리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쌍소의 말이다. 나른한 몽상과 한가로운 산책은 상상력을 뿜어내는 셈이다. 그 샘물을 길어올려 들이킬 때 속도에 지친 우리의 생명은 다시금 약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다시금 「고사관수도」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서 출렁이는 생명의 ‘힘’을 호흡할 일이다.


정선태, 「시간과 속도, 그 너머의 삶」,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목차

001. 머리말...9 
제1장..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19 
1.. 한가로이 거닐기...41 
2.. 듣기...53 
3.. 고급스러운 권태...65 
4.. 꿈꾸기...77 
5.. 기다리기...85 
6.. 내 마음의 시골 고향...97 
7.. 글쓰기...107 
8.. 포도주 한 잔의 지혜...117 
9.. 모데라토 칸타빌레...129 
제2장..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139 
제3장..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139 
1.. 문화적 흥분...163 
2.. 뒤늦은 도시 계획을 위해...179 
3.. 분주하지 말기...201 
4..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211 
5.. 하루의 탄생...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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