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성스러운 테러> - 국가폭력과 테러, 무엇이 다를까

by 내오랜꿈 2007. 9. 16.
728x90
반응형



솔직히 9월만 되면 발간되는 이런 류의 책들이나 그 소개글들은 나에게 참 불편함을 준다. 모두 촛점을 9.11테러 그 자체에 맞추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디에선가 9..11테러에 대한 짧은 글을 썼던 적이 있긴 하지만, '성스러운 테러'니 '거룩한 테러'니 하는 것 자체가 좀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최강국가 미국이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서 연유되는 이 지겨운 반복! 

솔직히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새겨야 할 것은 9.11테러 그 자체가 아니라 1922년 9월 11일 영국이 마음대로 강행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이 가져온 세계사의 비극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있었던 쿠데타와 그 이후 벌어졌던 어마어마한 국가폭력의 실상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 Roy)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의 어떤 강연에서 긴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아래는 그 글 가운데 일부분이다.
 

"지금 우리는 9월 11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짜는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날짜는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9월 11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반추는 비난이나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를 조금 걷어보자는 거지요. 이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예의바르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로 나오시기를" 부탁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중략) 9월 11일은 중동에서도 비극적인 기억이 있는 날입니다. 1922년 9월 11일,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1917년에 발표했던 '발포어 선언'의 후속조처였습니다. '발포어 선언'은 유럽의 유태 민족주의자들 ― 시오니스트 ― 에게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제국주의 권력은 세계의 오래된 문명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카시미르는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현대세계에 가져다준 저주의 선물입니다. 두 지역은 모두 오늘날 들끓는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중략) 29년 전 칠레에서,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 9월 11일에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쿠데타를 통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그 국민들이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칠레가 맑스주의 국가가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쿠데타가 끝난 뒤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쿠데타에 이은 공포정치하에서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보다 훨씬더 많은 사람들은 '실종'되었습니다. 총살대가 공개처형을 행하였습니다. 집단수용소와 고문실이 나라 전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은 탄광의 갱도와 표지도 없는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17년 동안 칠레 사람들은, 한밤중의 노크소리, 일상화된 '실종', 갑작스런 체포와 고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산티아고 공연장의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음악가 빅토르 하라의 두 손이 어떻게 잘렸는지 칠레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노체트의 부하들은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기타를 던져주고는 연주를 해보라고 놀리기까지 했습니다. "
(.....중략)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녹색평론>에 실린 전문자료) 

--------------------------------------------------

국가폭력과 테러, 무엇이 다를까

출처:인터넷경향신문/입력: 2007년 09월 07일 15:44:33

▲성스러운 테러…테리 이글턴|생각의 나무


“소위 말하는 테러에 대한 전쟁에서 악이란 단어는 역사적 설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테러를 설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는 그것에 대한 사면으로 간주되며, 상황에 대한 이성적 분석은 테러에 대한 변명으로 간주되고 만다.”

사흘 후면 9·11테러가 발생한 지 꼬박 6년이 된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내에서는 아직 당시 테러를 ‘제정신 아닌 사람의 이해못할 광기’로 치부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테러리즘에 대한 근원을 탐색하는 책은 이런 근본주의적 시선 같은 테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20여년전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이후 대학 문학개론 강의마다 단골 텍스트로 채택된 ‘문학이론 입문’으로 유명하다.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저자는 신화와 소설, 철학서적 등 방대한 텍스트를 넘나들며 테러의 심층을 파헤친다. 특유의 종횡무진하는 펜은 테러를 정신분석하고 문학비평을 구사하며 때로는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

저자는 테러의 기원을 신화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최초의 테러리스트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다. 그가 펼치는 향연은 무질서를 부른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일탈과 파괴의 장본인으로 간주된다. 그리스 희곡에서 이런 디오니소스의 파괴행위를 제압하러 나서는 인물이 펜테우스인데 그는 폭력으로 무질서를 진압한다. 펜테우스는 그의 적과 흡사한 방식, 즉 테러로 테러에 맞선다. 저자는 펜테우스를 국가 폭력의 전형으로 지목한다. 펜테우스는 9·11 이후 대테러 전쟁에 나선 미국의 비유로 읽힌다.

저자는 테러를 폭력으로 대항할 것이 아니라 공정한 심판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테러를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자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펜테우스 같은 ‘과도한 이성의 오만함’에 뿌리를 둔 근본주의자 방식은 테러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칼끝은 다분히 종교적 근본주의자로 향해 있다. 그는 “탈레반 출신이건, 텍사스 출신이건 근본주의자들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영국 정치가 에드문드 버크의 말을 빌려 프랑스 혁명의 테러성을 들춰낸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무서운 위험성을 지닌 기질, 결국 스스로를 오용과 남용으로 몰아가는 자유정신”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는 혁명의 주동자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를 비판했는데 결국 그들도 ‘오만한 이성’의 포로가 돼 파국을 맞았다. 저자는 또 테러를 불러들이는 자본주의 일방통행을 경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던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역사의 종언에 대한 선언이 결국 또다른 역사의 시작을 불러왔을 뿐이다”라는 지적은 울림이 있다. 서정은 옮김. 1만2000원 

〈서영찬기자〉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