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하는 비를 원망하며, 모처럼 한가한 주말을 보냈습니다.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수확해 놓은 마늘을 말리는 일인데, 우리 맘 같지 않은 하늘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마늘 손질을 잠시 미루고, 영양 보충이나 하자며 녹동으로 달렸지요.
시골에 들어온 후에는 되도록이면 외식을 하지 않는 편이라 가끔은 외식하러 가자고 운을 띄워도 '뭐 먹지?' 하며, 메뉴로 고민하다가 결국엔 집밥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은 몸보신도 할겸 장어탕을 먹자며 남편이 수소문해둔 식당으로 이끄네요. 타지인들에게 지역 맛집으로 소개되어도 정작 지역민들에게 외면받는 식당들이 더러 있지만 장어가 주메뉴인 이 식당은 가까운 거금도 이장님들의 회식 장소로도 이용된다고 하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녹동 인근의 섬들을 오가는 선착장 건너편에 위치한 "성실산장어구이집"의 장어탕은 생선 매운탕 스타일입니다. 제 혀가 조미료 맛에 유독 민감한 편인데 된장 양도 적당하고요, 국물이 느끼하거나 텁텁하지 않고 아주 깔끔합니다. 정말로 맛있어서 한 그릇 뚝딱 비운 후, 탁월한 선택이라며 남편에게 엄지를 세웠지요. 그래야 다음에도 맛나는 거 사줄테니까요. 포장이 된다니까 집에 손님 오면 무더위에 불 피우지 말고, 녹동에서 회 뜨서 먹고 장어탕으로 마무리하면 좋겠다 싶네요.
배 불리 먹었으니 이제 볼일 볼 차례입니다. 수협 공판장에서 활어회들을 눈으로 훍으니 특별한 어종이 없습니다. 건어물 코너에서 국물용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미역을 사고, 맛있는 점심을 먹여준 남편에게 맥주 안주용으로 도톰한 마른 오징어를 안겼습니다.^^
녹동항과 소록도로 가는 대교입니다. 다리가 완공된 2009년 이후 소록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의 대부분은 관광객이죠. 따지고 들자면 소록도를 테마 관광지화 한 것은 극명하게 명암이 대비되는 정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치 좋은 소록도중앙공원을 둘러보며 그냥 지나치기에는 소록도와 그 인근의 땅에 너무 아픈 우리 현대사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는 곳이니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간, 오마 간척지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에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 공원'이 있어서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오마도 간척지의 비애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소록도 맞은 편의 바다를 서울 여의도 3배 규모의 육지로 만들려는 오마도 간척사업은 국가가 한센인들을 어떻게 간주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한센병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런 병이지만 사회적 멸시와 배척이라는 더 큰 고통을 동반했지요. 한센인들의 천국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로 기획된 오마도 간척지는 완공 직전에 인근 주민들의 반대와 군사정권의 개입으로 결국 한센인들의 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후 한센인들은 다시는 소록도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로 몰리게 되었죠.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추모공원 입구
습도 높은 장마철 답게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루룩 샘 솟네요. 죽음을 무릅쓰고 개간해 놓고도 정치논리에 의해 빼앗긴 오마도 간척지입니다. 무인도였던 5개의 섬(오마도, 고발도, 오동도, 분매도, 만재도)을 연결하여 조성한 간척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잘 정비되어 일반인에게 분양되었습니다.
갯벌에선 끝물 바지락 작업이 한창일테죠.
간척 당시의 몇 가지 노동을 맛보기로 체험하는 곳도 있고,
중간 지점의 휴식공간인데, 선뜻 벤취에 앉기 쉽지 않습니다.
간척지 제방을 쌓는 모습을 조형한 위령탑입니다.
테마관에는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오마도 간척 공사때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인기척에 센서가 작동되어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애잔하게 흐르네요. 무슨 일로(?) 다급해진 남편의 부름에 스윽 훑고 지나느라 많은 사진은 남기지 못했습니다.
전망대에서 비를 피해 잠시 피신중인 분께서 급한 볼 일이 생겨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기억이 나기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길에서 만난 세상>이란 책을 펴보니 "여전히 세상의 끝에 있는 섬, 소록도"란 글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센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답니다. 볼일이 있어서 외출했다가 식당에 들어가면 밥을 주지 않는 게 현실이고, 돈을 내고도 밥을 먹을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이랍니다.
왕따와 편견은 어린 학생들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각인된, 우리 스스로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