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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사람사진

정태춘

by 내오랜꿈 2007.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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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날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태춘은 사진에서 본 예의 순박한 웃음을 띠고 우리를 맞았다. 이제 막 입주한 듯 여기 저기 미처 풀리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집기들은 오히려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었다.


출처:<퍼슨웹>(http://www.personweb.com/articles), 2000. 11. 01

김석봉




1. 유년, 흐르는 기억들

 

퍼슨웹)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연초에 신문에서 봤는데 따님이 올해 대학에 입학하셨다구요.

정태춘) 예, 그런데 휴학했어요. 첫 학기, 한 달인가 다니고 나더니 뭐가 마땅찮은지 그만 두겠다고 해서 . . .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녹음 시설이 채 갖추어지기 전이라 물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음반 사전 검열 철폐와 관련된 활동의 후일담이었다.

 

정) 한동안 저작권 협회에서 이사로 일을 했는데 문제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이사직을 사퇴하고 나와서 여러 작가들과 [한국 대중음악 작가연대]라는 것을 만든 지 한 일 년쯤 됐어요. 중견에서부터 요즘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까지 한 300명쯤 되는데, 변호사들도 여럿 붙고 우리도 열심히 해서 이제 협회 개혁과 피해 배상 일이 좀 정리가 되었고, 이제 내가 손을 떼도 될 것 같고, 음악 작업도 좀 하고 싶고.

 

퍼) 너무 오래 쉬셨지요?

정) 나야 뭐 그렇죠. 하는 둥 마는 둥.

 

퍼) 그래도 <정동진>을 발표한 직후에는 TV에도 출연하셨지요?

정) 예. 그것도... 우리 지금 2년 됐나? 근데 우리한테, 평균적으로, 2년은 큰 인터발은 아니에요.

 

퍼)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긴 시간이죠.

정) 근데, 그 사람들 또 판 내놓으면 안 사요. (웃음)


퍼) <정동진>은 얼마나 팔렸지요?

정) 많이 안 나갔어요. 한 5, 6만 나갔나?


퍼) 그 판도 5년만에 나온 판이죠?

정) <정동진> 이후로 곡을 거의 못 썼어요. 그리고 좀 써놓은 것들도 기존 것과 조금씩 달라서. 좀 방향을 바꿔서 음반을 내야되는 거라서. 그래서 주춤거리고 있고. 내년에는 좀 어떻게 해 볼려고하는데.........


퍼) 1954년 생이면 곧 50이 되시네요. 요 근래에는 거의 투사의 이미지로 비춰지시던데....

정) 30대 후반, 40대 초반에는 열정적으로 활동을 했죠. 다들 그렇겠지만 자기 일생 중에서 오래 그런 좋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내 인생에도 그런 좋은 시간이 있었지요. 어찌 보면 행운이죠.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이냐, 시대적 열정과 생각, 실천의 분위기가 지나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한데. 내 나이로 보면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할 때가 오기도 했구요.

 

퍼) 90년, <아, 대한민국> 이후에는 음악 활동보다는 심의 철폐 문제에 더 매달리셨고, 일정하게 성과도 거두었지요?

정) 법률상으로 검열은 없어졌습니다. 다만 사후 심의가 있는데 강제 조항은 아니고...

 

퍼) 음, 제 개인적으로는 <정동진>의 수록곡들에서 어떤 변화의 흐름이 느껴졌구요. 또, TV에 출연했을 때 "이제는 <촛불>을 다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무진 새 노래>가 당신의 음악 세계에서 획기적인 음반이었다고 한다면 <정동진> 역시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저는 음악적 변화의 징표로 보지는 않구요. 어떤 면에서는 뭐가 하나 마무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가지는데, 그게 지금 말씀하시는 속에 포함된, 메시지나 음악을 하는 목적 의식 같은 것들, 이런 면에서의 매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음악적인 방식, 나는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다, 스타일을 바꿔보고 싶다는 것으로서의 한 마무리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내용이나 이런 부분에서는 <무진 새노래>에서 <건너간다>까지 거의 순차적이었다고 생각을 하구요. 중간에 <아,대한민국. . .>에서 튀어 오른 부분은 있지만. 내용 또는 메시지 같은 부분에서 이후로도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前生의 풍경, 고향

 

가장 최근에 발표된 음반을 나는 <정동진>이라고 불렀고 그는 계속해서 <건너간다>라고 부르고 있었다. 음반의 공식 명칭은 <정동진. 건너간다>인데 두 사람은 하나를 놓고 다르게 이름 부르고 있다. 왜 다른 것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꺼내 놓은 이야기에 휘둘려 얼떨결에 <정동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준비한 레파토리를 억지로 꺼내야 했다. 그에게는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퍼) 얘기를 좀 거슬러 올라가 보지요. 8남매 중 막내라고 들었습니다.

정) 아, 막내가 아니라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죠. 그래서 일곱쨉니다. 물론, 남자로서는 5형제 중의 막내, 맞습니다.

 

퍼) 고향 지명이 '도두리'고 그곳에 대한 기억, 추억이 초기 작품에 진하게 배어있는 것 같은데요, 그 도두리라는 곳에 대해서 얘기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정) 경기도 평택에서 충남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죠. 들어갔다 나오는 그런 데지요. 갯벌이 있고, 어렸을 때에는 황포 돛을 단 새우젓배가 포구에 꽉 들어오는 걸 본 기억도 있구요.그 갯벌에서 산 셈이죠.

갯벌하고 동네하고는 또 좀 떨어져 있었어요. 그 사이에는 전부 간척지 논들이었지요. 반듯반듯하게 경지 정리가 된 것은 내가 중학교 들어간 이후의 일이고 그 전에는 꼬불꼬불한 논둑에다 그랬는데... 동네는 개흙바닥 위에 터를 잡아서 지금 가보면 가라앉고 있어요. 뭐 아주 동네 모양이 형편없이 가라앉았죠. 옛날엔 갯벌이 동네를 휘감고 돌아가는 곳이었죠.


아주 유년기 시절의 그 동네에서의 체험은 지금하고 연결이 잘 안돼요. 이생이 아닌 <전생> 같은 느낌이 들어요.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그 풍경, 그리고, 우리 가족들의 그림,생활하던 모습.


이것과 지금 시대와는 전혀 연결이 안될 정도로 전생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고. 내가 그 동네 이야기를 할 때는 가사에 나오는 풍경 그대로지요. 그러면서 그 풍경들을 떠나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게 또 가득했었고. 그러면서 고향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자주 떠났고. 떠나고, 떠나고, 떠나고...


아, 고향마을 옆에 K-6 비행장이라 불렸던 미군부대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기지촌이 우리 동네와는 반대쪽이어서 어렸을 적 우린 미군 부대 철조망과 한국인 경비원들, 그 안의 작은 골프장, 이국적인 막사, 꿈처럼 고공에서 내려오는 오색 낙하산 등등만 기억나지요.내 노래에 고향 마을 옆의 미군기지가 등장하는 건 그곳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였지요.

 

퍼) 왜 그렇게 고향을, 그 풍경을 떠나고 싶어했을까요?

정) 글쎄요. 모르겠어요 나도. 뭔지 잘 모르겠는데, 불편하다는 건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부모님도 그러셨고 형님들도 거의 나한테 신경을 쓰실 분위기가 아니었고,그래서 거의 고립되다시피, 물론 가족들에 의한 고의적인 고립은 전혀 아니지만 어쨌든 고립되다시피 살았었는데 남자 형제 중에서 막내였으니까 조금 뭐 이로운 점도 있었고,가족으로부터 크게 구애 받지도 않고 그랬는데 그런데, 가족 속에 내가 잘 어울려서 그렇게 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가하면...... 모르겠어요 그 이상은 내가 왜 자꾸 떠나려고 했는지.


퍼) 가출했다가 셋째 형님한테 잡혀 오신 적도 있다지요?

정) 그랬지요. 아니 뭐 형이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집으로 돌아왔겠지요.또 얼마간씩 집을 나갔다간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구요.


그럴 때면 아버지는 아주 마땅찮아 하셨지요. 아버지 보시기에 제가 뭐 능력도 없는 것 같고, 똑똑하지도 않은 것 같고. 음악을 한다니까, '야, 너 바이올린 가져와서 해 봐' 그래 아버지 앞에서 하면 쑥스러우니까, 그러면 또 아버지는 '짜식, 뭐 가 그래. 음악을 하려면 신이 나야지'. 아버지 그 말씀이 그냥 하신 말씀이지만 그게 누군가 감흥을 줘야하는데 왜 감흥을 못주느냐 그런 말씀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죠. 목적의식이 일단 없었어요, 염세적이었고. 젊은 시절엔 말이죠. 사춘기를 빨리 끝내지 못하고 굉장히 오래 가지고 간 셈이죠. 도피처만 찾고 있었고 내 속에만 파묻혀 있고 싶었고..... 고향에서 농사 지을 때 겨울이면 내내 사랑방 구석에 처박혀 있었지요.

 

퍼) 60년대 말에 바이얼린을 만질 수 있었다면 집안이 빈한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는 얘기로군요.

정) 바이올린은 학교에서 빌려 줬어요. 집도 그렇게 가난한 편은 아니었구요. 그래도 시골에서는 아버지께서 능력이 있는 분이라서 형편은 그런대로 괜찮았지요. 그래서 음대를 지망을 하면서도 71년 당시에 30만원 짜리 이태리제 바이올린을 형님들과 돈을 모아 사주시기도 했어요. 결국, 어려서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던 셈이죠.



2. 청춘, 격정 그리고 박은옥

 

그는 유년기를 前生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대에 접어든다. 그의 20대는 탈출과 귀환으로 점철되고 있다. 하긴, 그 20대에 누군들 한번 일탈을 꿈꾸어보지 않은 자가 있으랴. 그러나 그의 탈출은 막무가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그 탈출의 결과물로 그의 첫 음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으니 말이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음악을 접했다고만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정) 한 동네에 살고 계시던 큰 매형께서 미군 부대에 다니셨는데, 그 분이 그 시골 동네에서도 이런 저런 재미 잇는 것들을 많이 하셨는데 전축, 기타 뭐 이런 것들이 있었어요. 내 위에 셋째 형님이 그 기타를 만지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나한테 스케일을 가르쳐 줬어요.

 

그 스케일 배운 걸로 국민학교 때, 지금 기억 나는데 '올 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자...'뭐 이런 노래를 기타로 두들겨가면서 계명을 적었던 기억이 나요. 음... 그리고 중학교 때, 그 동네에 미군 부대 기타리스트가 한 분 있었어요. 동네에 몇 몇 있는, 왜 그런 사람 말이죠. 그런 사람들하고 모여서 한 두 달 배워 본 적도 있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바이올린을 하면서 기타를 거의 놨지요. 근데 고등학교 때 바이올린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는 바람에 밴드부에 편입되기도 했죠. 거기서 레슨이 제대로 안되니까 다시 기타를 잡고, 포크의 영향을 받으면서 노래를 흉내내고, 그리고는 대학 갈려고 했는데 뭐... 보니까 대학은 갈 상황이 못됐고 공부도 안 했고 레슨도 못했고... 어쨌든 고등학교 졸업할 때 모 대학인가 쳤어요. 지정곡이 나왔는데 악보도 있어야 하고 피아노 반주자도 있어야 하고 근데 아무 것도 없고..... 촌놈이 서울 올라와서 뭐 아는 것도 없고.어찌 어찌해서 시험은 쳤죠.

 

떨어지고 재수를 하겠다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는데 인천에 와서 당시 서울대 다니던 김영준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한테 레슨을 받았죠. 그 때도 공부는 거의 안 했고. 그 분이 '바이올린은 됐으니까 공부 좀 해라' 10월경에 그러던데, 공부가 될 상황이 아니었어요. 사춘기가 너무 길게 가서... 염세주의가 너무 길게 간 거죠. 악기도 샀는데...

 

그해 10월. 박정희의 유신 기자 회견이 있었다. 우연일 터. 하지만 그의 서울 유학 생활도 마침표를 찍는다. 대학에 대한 꿈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퍼) 틈 나는대로 가출을 하신 셈이네요?

정) 나갔다가 대책 없으면 다시 시골로 돌아오고 그랬지요. 돌아와서도 봄날이 따끈따근해지면 경운기 쟁기질하다가 그냥 들판에 내팽개치고 나간 적도 있구요. 여러차례 그랬지요. 그런가하면 어느 날은 이발소에 가서 '삭발해 주시오' 그래서 삭발을 하기도 하고.그러고 들어오면 어머니가 무척 놀라하시고 그랬지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 심사를 잘 통제하지 못했던 거지요.

 

퍼) 이제 얼추 가출하던 무렵 아버님의 연배가 되어가는데 스스로 자신의 사춘기와 20대를 돌아볼 때 스스로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해하시겠어요?

정) 나는 결혼을 안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특히 자식은 안 낳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뻔하게 나 같은 놈이 나올 건데 나 같은 놈이 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데 딸이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딸도 만만치 않지요.

 

퍼) 그런데 20대의 그 기간 중에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시절이 인천에서 전투경찰하던 때 아니었나요?

정) 전투경찰 하던 때는 아니고... 그 때도 문제가 많았지요. 많이 맞기도 하고. 도망은 못 갔지만 화가 나서 기타를 부숴 바다에 던진 적이 있어요. 해안 초소 초병이었는데 그 기타가 어느 밤 조수에 떠밀려 오면서 부대에 작은 비상이 걸린 적도 있지요. 그래도 거기서 곡을 많이 썼어요. 어찌 어찌해서 고양 경찰서로 전출이 됐는데 거기서 1년간 분대장을 맡으면서 그 때가 군 생활 중에 제일 평온한 시기였지요. 그 때 <시인의 마을> 이런 곡들을 썼지요. 인천에 있을 때 <서해에서> 등을 썼구요.

 

<시인의 마을>은 고양 경찰서 있을 때 정문에서 내방객들 출입증 받는 보초막에 근무하면서 썼어요. 사람들 와서 주민증 주면 옆에다 적고 출입증 내주고 그러면서. 어.... 20대 때 제일 행복했던 때는 제대하고 연애하기 전까지인 것 같아요.

 

퍼) 연애할 때가 아니구요?

정) 연애하면 골치 아파지잖아요....

 

퍼) 이 말씀 써도 되는 겁니까?

정) 그럼요. (웃음)

 

 

첫 음반과 결혼, 행복과 혼란의 점이 지대

 

제대 후 그는 음반 회사와 계약을 맺고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기 평생의 반려자 박은옥을 만나고 지금까지 한 침실을 쓰고 있단다. 스포츠 신문 연예면 가쉽 기사 수준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와 박은옥의 만남이, 그리고 그들의 애정 관계가 궁금했다. 그를 직접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했다.하지만 그가 과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런 답변을 해 주었을까?

 

퍼) 연애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좀 얘기해 주시죠.

정) 그 때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내 후원자가 생겼고. 제대 직후에 레코드 회사에서 내 작품을 쭉 보고, 돈을 주면서 책도 사보게 하고 하숙비도 대 주시고 그랬어요. 여행갈래? 여행비 주고 그럴 때였으니까.


퍼) 첫 음반 나오기 직전이로군요.

정) 음... 첫 음반 준비하던 그 시기였죠. 아주 짧은 시기였지만 그 때는 아무것도, 고민도 없었고 정말 자유로웠던 때였죠. 그런데 의외로 그 때 <탁발승의 새벽노래>를 썼어요. 인사동에 있는 어느 작곡가 사무실에서 공간을 내줘서 인사동 사거리 바로 옆 건물 옥상에 양철지붕 덮인 공간을 내줬는데 <탁발승의 새벽 노래>를 그 뜨거운 양철 지붕 밑에서 웃통을 벗어부치고, 대낮에 썼던 기억이 나요. 사람들은 파계승이었느냐, 절에 가서 썼느냐 그러는데........


퍼) 어머님이 불교신자신가요?

정) 예, 어머니는 불교신자이신데... 나도 중이 될까하는 생각들을 꽤 했었지요. 어머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고. 20대 때, 심지어는 군에 있을 때에도 그런 생각들을 꽤 했어요. 군에 있을 때에도 갈등이 심했던 거지요.

 

퍼) 이 즈음에 <촛불>도 만들어지지요?

정) 음....... 고양에 있을 때 다른 레코드 회사에도 왔다갔다 했는데, 회사 사장이 가지고 간 곡들을 쭉 보더니 <시인의 마을> 이런 걸 보여 줬더니 그 사람이 '에이 미스타 정. 이런거 하지 말고, 이게 뭐야 시인의 마을. 이런 거 말고 사랑 얘기를 좀 해' 그래서 군에 있을 때 사랑 얘기를 많이 썼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촛불>이지요.

 

퍼) 그 <촛불>로 1979년 TBC 가사 대상을 받고, MBC 신인가수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찌되었건 대중적으로는 그 때 가장 성공하신 것 아닌가요?

정) 그렇죠, 판도 많이 팔렸고.

 

퍼) 풍문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촛불> 인세가 꽤 짭짤하다던데요.

정) 초기 음반들이 아직 나가요. IMF 이후에 상황은 좀 안좋아졌지만 절판은 안됐어요.그 첫 음반은 지금도 생활에 도움이 되죠.

 

퍼) 그렇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20대가 마감이 되어가는군요. 이제 연애 얘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정) 연애 얘기...... 음......... 같은 음반사에 있었고, 내 곡을 집사람이 받게 됐어요. 나도 홀홀단신인것 같았는데 그 사람도 그랬고 근데 내가 그 사람 노래를 듣고 사실 좀 놀래 버렸죠. 저런 가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정도로 놀랬지요. 근데 이후 내 노래만을 부르면서 그런 것들이 죽었어요. 굉장히 제한적인 퍼스낼리티의 가수가 돼버렸고 그런게 상당히 아쉽죠. 아무튼 그 때는 내가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가수였어요.

 

그래서... 어.... 무슨 얘길 해야 하나? 그냥 뭐 그래서 연애를 했고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갔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내가 왜 사춘기를 그렇게 보냈을까, 내가 왜 결혼 생활 초기에 그렇게 헤맸을까, 지금도 완전히 안정되진 못했지만, 뭐 그런 게 남아 있죠. 그러니까 어떤 기본적인 것들을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하죠. 나 아닌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상호간의 책임감 같은 거라든지. 똑똑한 사람들은 뭐 여러 가지 것들을 계산하기도 하고 준비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우리는 전혀 그런 거 생각 안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랬지요. 그러다 보니 결혼 초에 조금은 불안정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요. 또 뭐..... 창작하는 사람의 무책임하기도 하고 재기 발랄한 상상력 뭐 그런 부분이 곁들여지기도 한 것 같구요. 기본적으로 창작자의 분방한 상상력과 결혼이라는 안정된 틀, 근데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숙제일 것 같아요. 여러 사람들한테.

 


듣기에 그는 박은옥씨에 대한 진한 미안함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지닌 박은옥씨에 대한 이러한 미안한 마음은 아래와 같이 또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퍼) 결혼을 하신 게 1980년이고, 그 뒤로 음반이 두 장인가 더 나왔지요? 근데 그 두 장은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단 말이죠. 뭐 그 때 따님도 태어나고 그러면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라고 들었습니다.

정) 그 때 노래를 그만 둬야겠다. 다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리고 그 뒤에 가요 검열제 철폐 운동하면서 희망이 안 보일 때 그 때도 노래를 그만 둬야 겠다는 생각을... 두 번 했었지요.

 

퍼) 박은옥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할까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퍼스낼러티가 좁아져 버린 가수가 되어버린 것 같고 그래서 미안하다 이런 얘기를 하셨는데.......

정) 예,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표현력 이런 것이 많이 죽어버린 것 같아요, 내 곡만을 받으면서 말이죠.

 

퍼) 그런데 막연하게 보면 말이죠, <촛불>이나 <사랑하는 이에게>에서 들려오던 박은옥씨의 목소리가 <무진 새노래>나 <아, 대한민국. . . >으로 오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1980년대 후반에 음악적으로 일정한 변화를 그릴 때 그 때는 박은옥씨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생각을 안하셨던가요?

정) 그 때는 충분히 배려할 만한 여건이 못됐죠. 아쉽긴 하지만... 한 가지 위안을 삼는다면 <봉숭아>라는 노래가 있었다는 거죠. 이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불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전체적으로는 너무 아쉽죠.

 

퍼) <정동진>에 오면서 박은옥씨가 첫 곡을 부르는데요, 그걸 보면서 이제 좀 박은옥씨에 대해서 고민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공동 음반 말고 박은옥씨만을 위한 독집 음반을 준비하실 의향은 있습니까?

정) 이제까지와는 좀 다른 노래라야 하지 않겠나 싶은데 그걸 제가 쓸 자신은 없구요. 그래서 지금 몇몇한테 부탁을 해 논 상태에요. 아예 다른 사람들의 작품만 가지고 박은옥 독집을 한 번 만들어보자 그런 생각이고. 나는 또 나대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음악을 하고 싶은데 박은옥 씨가 할 레파토리가 준비된 게 없구요.



3. '서정성' 이라는 낙인을 거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첫 음반은 서정성과 토속성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중 서정성이라는 명명은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음악 세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규정을 과감하게 거부한다.그것도 관념이 아니라 실제 행동과 음악으로 거부한다. 1980년대 말,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전국 순회 공연을 감행하고 <무진 새노래>를 발표하던 시기 그의 모습에서 <촛불> 또는, <서해에서> 등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퍼) 첫 음반 이후 상업적 성공 여부를 떠나 음반이 계속 발표 되고 있는데요, 언제부터 스스로 노래하는 '가수'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정) 운동권에 참여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죠.

 

퍼) <무진 새노래>를 말하는 건가요?

정) 그것만 해도 내 일기같은 거죠. 그래도 뭐 그대로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발표한 거고 직업인으로서 고민을 한 거는 운동 진영에 참여하면서 내 노래가 무엇을 위해 쓰여져야 하고 내가 무엇을 위한 연행자여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지요. 오히려 <촛불>, <시인의 마을>로 신인상을 받았을 때 무대 앞에 서는 것이 쑥스러웠어요.

 

근데 내 목적 의식이 좀 뚜렷해지면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여전히 나한테 노래는 일기라고 생각을 하고, 내 개인의 사변적 일기가 사람들의 일기, 그네들의 삶, 현실과 희망을 담아낼 것인가 하는 차이가 있죠. 나만의 상황이 아닌 동시대 사람들의 상황, 그 상황으로서의 일기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좀 더 든다면 다시 삶을 관조하거나 내 자신 속에서 자신과 화해하는 그런 것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사춘기 때, 내부의 자신과 끊임없이 충돌했으니. 물론, 외부 상황과 연결된 창은 계속 열어 놓지만 나 개인을 정리하는 노래를 만들고 싶죠.

 

내가 어마어마한 것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훌륭한 장인들의 각고를 거친 작품의 위대성은 알죠. 하지만 내 노래에 큰 무엇을 집약하고 무슨 위대한 것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요.

 

퍼) 사람들이 초기 음반의 서정성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두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변화의 내적 계기는 무엇인가와 두 번째는 그 두 모습 중에 어떤 것이 보다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죠.

정) 먼저, 그 계기는 소외자들을 만나면서죠. 80년대 초,<실천문학>을 통해서 비로소 내 바깥과의 창이 열렸어요. 나는 소외자에 불과했는데 그걸 논리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하고 주류에 대한 거부감만 있었죠. 단지 자신의 운명, 그 운명에 내맡겨진 상태로 소외된 소수로 머물러 있다가 <실천문학>을 통해 다른 소외자들의 목소리를 들은 거죠. 주류로부터 벗어난 비판적인 사람들과 만났던 거지요. 물론 세상의 소외자, 아웃사이더 중에는 철없는 낭만주의자 그룹도 있지만요. 그런 사람들과 전혀 교분이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결국은 싸우는 사람들과 만난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러면서 내가 확 변했죠.

 

그럼 내 정서는 뭐냐? 서정정? 나는 한 번도 서정성을 부정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렇게 중요하거나 의미있는 부분도 아니구요. 초기 내 노래에 그런 경향이 강했다는 건 인정해요. 근데 내 속에는 서정성 말고 분노와 절망, 악의적인 그런 감정도 적지 않게 있어요. 어떤 면에서 <서정성>은 그런 걸 감추고 있어요. 인간 내부의 또 다른 면들 말이죠. 솔직히 얘기하면 서정성 보다는 나는 오히려 과격함 쪽이라는 생각을 해요. 나 자신이나 세상을 보면서 화가 나는 일도 너무 많고, 자주 분노하고... 그걸 억누르고 최대한 절제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라는 것 아닌가요 ? 아니면 통달하거나, 무심하거나, 외면하거나... 나는 그러질 못하는 사람이에요, 아직은.

 

<아, 대한민국...>을 할 때는 그런 걸 은유로 포장하고 싶지도, 억누르고 싶지도 않았고 내 분노, 절망, 희망, 이런 걸 억누를 필요가 없었어요. 과격성, 도발성, 분노 이런 심성들이 분명히 내 속에 있었고... 물론, 노래에서의 서정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한 기본 방편임에 틀림 없지만, 나는 예술가의 직관과 분노나 슬픔, 이상향에 대한 안타까운 집착 또는, 자신과 세상에 관한 기발한 풍자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그런 게 없다면 노래 만들길 그만 해야지요.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무진 새노래>를 이야기했고 그는 <아, 대한민국. . .>을 이야기했다. 그의 음악 세계가 변한 뚜렷한 지표를 무엇으로 확인하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게다. 확실한 것은 그는 음악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일부에게는 충격으로, 일부에게는 감동으로, 또 다른 일부에게는 가수로서의 그의 생명이 끝장난 것으로 다가오기도 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그 한바탕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출발한다.

 

퍼) 이제 이야기를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옮겨 보지요. <아, 대한민국. . .>의 직설적인 화법이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오면서 말이죠 조금은 전투적 과격성이 소멸된 느낌을 받구요.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정) 당시 전반적으로는 절망적이었어요. 과연 희망은 있는가 이런 생각도 들었구요. 전투적일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변화 혁명적인 변화에 대한 희망 이런 것들에 힘입은 바 크죠. 그것이 사라지고.... (전화가 왔고 이야기가 끊어지고, 그는 자기 이야기로 돌아간다)

 

음, <아, 대한민국...> 할 때 말이죠. 나한테는 전생이라고 얘기했던 유년기의 체험 그런 것이 비극적인 서정성으로 다가와요. 그리스 음악을 들을 때 그런 느낌을 갖는데요. 또 한편으로 선동적인 분위기도 유년 시절의 체험에 있어요. <도두리의 봄>에 일부 나오는데. 어느 한 밤 중에 동네 사람들이 '둑 터졌다' 하고 횃불을 들고 십리 들판 길을 내달리는, 간척지 제방이 바닷물에 무너진 거지요. 징을 치고, 곡괭이, 쇠스랑, 가래 같은 것들을 어깨에 메고 한 밤 어둔 들판 길을 횃불 올리며 달려가는 무리들, 그런 기억이 있어요.그런 이미지의 아름다움이랄까 이게 있었어요.

 

근데 80년대에 북한 소설을 보면서 그런 맥락의 사실주의를 보면서 환기했어요. 또, 8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뭔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에 대한 희망, 그것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나한테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꽉 차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현장에 학출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나도 사회과학을 공부했었고 그러면서 그런 새로운 세상, 그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 뭔가 엎어야 되는 상황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하는 생각도 있었죠.

근데 깨졌어요. 희망도 안보이고, 그리고 겨우 낼 수 있는 목소리가 <92년, 장마 종로에서>였어요. 그냥 서서 깨진 것도 아니고, 지도부들은 단식하다가 다 들것에 실려 다 잡혀가고 말이죠.

 

퍼) 그런데 말이죠, 이건 제 개인적 경험과 맞물리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92년, 장마 종로에서> 말하고 있는 희망이 실상은 현실의 절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 당시에는 듣는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거기서 말하는 희망은 굉장히 소박한 것이죠. 비둘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그런 것과, 그리고 <저 들에 불을 놓아> 같은 것은, 그렇지만 그런 분노를 좀 담고 싶었어요. 뜨거운 낫을 논 바닥에 꽂고 마지막 담배 물고 집에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뒤로 뜨거운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그런 분노 같은 것 말이죠.

 

퍼) 버릴 수 없는 과거의 기억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모색이라는 그런 두 감정을 함께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같은 경우는 또 좀 굉장히 희망적이고 가슴을 뛰게 한단 말이죠.

정) 뭐 제가 지하철을 잘 안타지만 다리를 건너가면서 자가용 안에서 전철을 바라볼 때 그런 부채감 같은 것, 미안함 같은 것이 있고, 그렇죠.

과거처럼 논리정연하게 전망을 제시하지는 못해도 그런 질문은 필요하고 그것은 계속 가지고 가야하는데... 그것에 대한 정리된 답이 안 나온다면 나도 계속 헤매는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다음 음반에서도 전망에 대한 얘기는 못할 것 같기도 하구요. 헤매는 상태의 이야기들을 할뿐이죠. 헤매는 내 이야기는 우리 전체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요. 그게 지금 우리 시대지요.

 

때론 유치해 보일 수도, 숭고해 보일 수도 있는 그 희망은 우리 속에 늘 있는 겁니다. 추악한 세상이 아니고 아름다운. 천박한 세상이 아니고, 보다 고상한. 불안하지 않고 평화로운 것들. 모든 개인들이 즐겁고 다정하고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그것이 가능한 물적인 토대와 시스템과 가치관 또... 그런 세상을 머지 않아 우리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 뜁니까?

 

퍼) <정동진> 얘기로 넘어가는군요. 방금 말씀하셨던 그런 뉘앙스를 <정동진>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느끼는 것 같습니다. 헤매는 모습, 그런 거 말이죠.

정) <정동진>에서 무지개, 무지개 하는데 그건 좀 역부족이었죠.

 

퍼) 그런데 오히려 그 노래의 목소리가 더 설득력 있는 것 아닐까요? 투사였던 정태춘이 뭔지 잘은 정리되지 않지만, 답답한 현실에서 '무지개'로 상징되는 희망을 고통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말이죠.

정) 나는 정동진에서 진짜 무지개를 봤어요. 강릉에 공연을 갔다가 정동진을 일부러 갔어요. 나는 <모래 시계>를 보지는 않았지만. 진실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기만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역이 참 아름답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기대했던 어떤 시대상황의 희미한 그림자마저도 전혀 없고, 그저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작은 해변...

 

그런데, 11월 초였는데 느닷없이 소나기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작은 역사 안으로 들어갔죠. 거친 파도와 거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보며 씁쓸해 하고 있는데, 또 그렇게 느닷없이 소나기가 그치고 하늘이 개이면서 비 오거나 아니거나 그저 열심히 파도치던 바다 위로 선명한 무지개가 떠오르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저게 뭔가, 생각도 하고.

 

그리고, 강릉 시내에 들어가서 중앙시장엘 갔어요. 오징어 한 축 사고, 생선 대가리 치는 무쇠 칼 하나 사고 어슬렁거리는데, 또 소나기가 퍼부어요. 그래 노점 천막 아래 비를 피하고 비가 그쳐 큰 길로 나왔지요. 그런데 이번엔 중앙로 철길 위로 쌍무지개가 떴어요.또 너무나 선명하게. 나는 뭔가 본거죠. 그게 정동진에 대한 오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으로 희망을 얘기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집에 와서 <정동진>과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노래, 두 곡을 만들었어요. 그 무지개는 아주 감동적이었어요.과거 우리가 가졌던 열정의 아름다움, 그 희망 아니 흔적이라도 보고 싶었을 때 어떤 것이 내 눈앞에 나타난 거죠. 정말 아름답게.

 


이야기는 어느새 막판으로 치달아가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정동진의 무지개가 진짜 무지개였다는 그 이야기는 사실 좀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뭘 원하고 있었던 것일까?

 

퍼) 그런데 음악 세계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죠. 일부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중 하나로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정) 그런가요? 나는 첨 듣는 얘긴데?

 

퍼) 국악곡 <어허, 배달 나라 광영이여> 같은.....

정) 아! 그건 내가 가사 고쳤습니다. 사실, 내가 80년대 초, <실천문학>을 접하기 전에 고대사에 푹 빠져 있었어요. 고대사 연표도 나름대로 만들고, 책들을 섭렵했었어요. 국악 공연만 했었던 곡이지만 <배달나라>도 그것의 반영이었어요.

 

가사 중 일부는 공윤에서 친북적인 표현이라고 걸리기도 했구요. '불함에 봄이 오니 붉은 꽃이 만홍이라'하는 구절이요. <한단고기> 중의 어느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어요. 그 뒤에 가사 전체의 문제 때문에 고쳐야지 하고 버려두고 있다가 공연에서 어정쩡하게 계속 불렀는데 지난 여름에 다시 공연 준비를 하다가 가사를 고쳤어요. 그런데 공연은 무산됐고 아직 새 가사로 공연은 못한 상태고..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완전히 날려버리자, 하고 고쳤지요. 제목도 <백두대간에서> 쯤으로 고칠 생각하고 있구요. 과거 고대사 등과 관련된 몽환적인 민족주의, 이제 나는 청산을 했어요.

 

퍼) <얘기 2>에서도 그런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죠. '환인의 나라와 비류의 역사' 이런 대목이 말이죠.

정) 바보 같은 얘기죠. 그게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위안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부심의 근거라면요. 고대사는 일종의 환상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순수하고 아름다운 부분도 없지 않지요. 뿌듯한 자기 만족도 있구요. 그런데, 위험한 부분도 있습니다.고대사에서 집단, 국가, 체제 이런 개념들로 넘어와 보세요. 개인은 사라져 버리죠. 한 나라가 있었느니라, 한 위대한 임금이 있었느니라, 영토는 드넓었고, 백성은 행복했었느니라, 임금은 오래 오래 살았느니라. 정말 백성들이 행복했을까요? 사내들은 평생 손에 무기를 들지 않고 아낙네들은 평생 악다구니 한번 하지 않고 모두 온순하고 풍족하게들 살았을까요?

 

그건 그렇다 치고, 태극기라는 것도 그래요. 꼭 태극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그림의 깃발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지만 그건 누구의 상징물입니까? 국가, 지배자의 상징입니까? 시민들의 상징입니까?  우리가 때로 숭고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또는, 경배하도록 요구당하는 저 태극기가 과연 누구의 상징인가. 옛날 봉건 군주의 성에 꽂힌 깃발에 경배하는 농노,기사들과 지금 국민의례 때 태극기에 경배하는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근대적인 지배와 독점 구조이고, 지배 그룹만 바뀌었을 뿐, 과거 무력 집단에서 자본 집단으로... 태극기는 지금 시민들, 또는 민중들의 주인 의식이나 그에 의한 숭고한 공동체성을 담보하는 상징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의 어조가 높아가고 있었다.

 

정) 사실 내가 감청, 합법적인 도청을 받은 적이 있어요. 검찰, 법원에서 그걸 사실이다,확인해 주기도 했구요. 국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이런 일은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민의 동의에 의한 게 아니라 지배 집단에 의한 독점과 차별은 더욱 심화되고 있고, 그들은 여전히 애국심, 멸사봉공,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요하며 그 상황을 고수하고, 그 유치한 상징 조작물이 바로 태극기, 애국가 등등이고. 거기에 고조선, 만주 대륙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쪽까지 섭렵하는 고조선, 뭐 이렇게 나가면... 지금 여기의 우리 개인들과 현실은 증발하는 거죠.

 

부산 민주항쟁 기념식 공연에 가서도 말했습니다. 이 기념식 단상에 태극기가 너무나 이질적이지 않은가. 그 항쟁이 성공했는가, 그래서 저 상징물은 부산 시민 또는 이 땅의 민주 시민의 것이 되었는가? 그 항쟁을 압살한 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가? 물론, 박수도 나왔지만 불쾌한 사람들도 꽤 있었겠지요. 그래, 나는 그때의 그 숭고한 싸움을 지지했고 지금은 우리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니 태극기를 걸만하지 않은가 라면서...



4. 정태춘 vs '아버지' 정태춘

 

그의 딸은 소위 00학번이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또 하나의 궁금증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과연 딸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그의 딸에게 아버지의 음악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을까?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이 문제를 그에게 던져보기로 했다. 이 문제는 현재에 대한 그의 생각을 훔쳐보기 위한 술수이기도 했다.

 

퍼) 이제 좀 다른 얘기를 해보죠. 따님이 대학생인데요. 따님의 세계가 있고 아버지의 세계가 있는데 그런 저런 얘기 두분이 많이 하는 편인가요?

정) 심각한 얘기는 안 해요. 주절주절 얘기는 오래 가는데 심각한 얘기는 잘 안 하려고 하죠. 나 역시도 그렇구요. 뭔가 해줄 얘기가 사실은 많지도 못 하구요. 시대나 세대가 너무나 다르고, 감성도 의식도, 취향도...

 

퍼) 근래에도 대학에 공연하러 많이 가시나요?

정) 잘 안가요.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날 부르지 마라고 해요.

 

퍼) 불과 십 년 전에 세상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아버지와 그 열풍이 지나가고 난 후 세상을 살아가는 딸의 관계에 대해 다시 좀 묻고 싶습니다. 대학생들에게 이제는 부르지 마라고 말씀을 하신다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 나는 그 사람들한테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지 않아요. 우선 나는 지금의 대학생들과 연대감이 없지요. 또, 제 생각에 현재의 대학생들이 아름다운 청춘인 것 같지도 않구요. 단지 세련된 소비자일 뿐이고, 또, 나하고는 다르더라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 없는 것 같기도 하구요. 자기 시대에 대한 성찰이나 문제의식이 없어요. 게다가 당연한 거지만 문화적인 감성이나 취향이 너무 다르고... 뭐 방송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또 뭐 공연을 하려면 넓은 마당에서 공연을 하는 것보다, 이젠 좁은 공간에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밀도 있게 이런 저런 얘기도 하면서 공연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공연을 원하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사실은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을 해요. 자기 인생에 한번쯤은 자신의 시대 상황과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그걸 분석하고 그 역사에 참여하고...이후에 그런 분석이나 대응하면서 얻었던 가치관들이 자기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가는 데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열정이 들끓는 시기에 경험하는 자기 시대 상황에 대한 치열한 대응이 내 생각에는 굉장히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한번 자기 인생에서 체험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거죠. 내 생각에는 그래요. 상황과 치열하게 부딪히고 도전하고 깨지고 하는 것이 청춘 시기에 매우 필요하고 또 행복한 일이라는 거죠. 우리 애한테도 한 두 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한마디로 공감대가 없어요.

 

퍼) 이전까지 대학생들이 관객의 일정한 부분을 점유해 왔는데 스스로 대학생들과 그렇게 거리 두기를 의도하신다면 이후에 발표되는 곡들을 들려줄 주된 대상을 어떻게 상정하고 계시는 건가요?

정) 나는 다시 아웃사이더로 나왔지요. 내 자리는 다시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음반 판매 수치에 그렇게 연연하지도 않고... 지금 대학생들은 주류집단입니다. 적어도 그것만을 준비하는 집단입니다. 이후 부자가 되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물론, 현실적으로 대다수는 취직 걱정, 자립에 대한 불안감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류집단으로 들어가는 줄서기에서 비켜 서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는거죠. 일부 대학생들도 있겠지만 내 새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소수 매니아들 뿐일 겁니다. 더 이상 대학은 내 노래의 광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다른 노래를 들어야죠. 그들의 노래를.

 

퍼) 음반도 음반이지만 실황 공연이 음악 세계를 형성하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여지는데, 대학 공연을 거부하신다면 이후에 공연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방식은 어떤 방식을 계획하고 계시는지요?

정) 기획 공연 같은 거지요. 일단은 자체적으로 만드는 콘서트가 있을 수 있구요. 내년에는 <얘기 노래 마당>을 다시 해볼까 하고 있어요. 좀 작은 데에서 반주패 규모, 공연단 몸집을 줄이고, 관객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데서 얘기도 좀 자연스럽게 하고. 욕심 같아서는 그것을 주 활동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초청 공연들이죠.

 


현재 속으로

 

사실 나는 이 정도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그는 준비된 답변자였고 나는 설익은 질문자였던 셈이다. 내가 무엇을 물어도 그는 막힘이 없이 답변해 왔고 그 답변 속에서는 내가 준비한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이 미리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벌써 한 시간 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동행했던 선배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고 있다. 이 사람, 내가 껄끄러워 피해갔던 그의 현재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길손) 80년대 예술 활동하던 분들과 많이 어울리셨고 활동도 많이 하셨는데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보면 <사람들> 같은 곡은, 그렇게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흩어지고 하는 그런 상황에 대한 개인적 감회를 담은 노래처럼 들리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정동진>에서는 90년대를 '환멸'이라는 단어로 규정하시더군요. 그렇다면 궁금한 점은 말입니다.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혹시 때로는 고립감 같은 것을 심하게 느끼지는 않으신지요? 지나온 시간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거나 족쇄 같다거나 하는 의미에서 말이죠.

아까 무지개 얘기를 하셨는데 무지개를 보면서 느꼈던 희열의 높이만큼 그 그림자가 또한, 그 반대만큼 절망이 깊었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요?

정) 아뇨, 나는........... 그 절망감이나 이런 것에 그렇게 시달리지는 않았어요, 나 개인적으로는. 고립감이라고 해서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 때 얘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지만. 그렇게 함께 하다가 나는 뚝 떨어져 나왔단 말이죠. 나왔는데, 그런 고립감들은 있었어요.


이를테면, 내가 만약, 대학 졸업자였다면 또는 서울대 졸업자였다면 어... 많이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운동하는 과정에서도 그랬고. 그런 생각들을 더러 했었고. 그 사람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다른 계기들을 통해 모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게 집단화 돼서 운동을 끌고 나가거나 이후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했을 때 그런 그룹들에서 나는 떨어져 있다는 것 그건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죠.

 

그러면서, 어... 내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했었죠. 아, 그런데, 내가 고립됐었나? 아닌데... 아직도 주위에 당시에 만났던 좋은 분들이 많이 있는데...

 

길손) 솔직히 적대감 같은 것은 없었나요?

정) 적대감까지는 아니구요. 음... 그래서 얼핏얼핏 얘기하는데, 노무현, 백기완, 물론 내가 그 반열에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들이 서울대 출신이었다면 그런, 생각들을 했었고. 그러면서 뭐 절망감 같은 것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었구요. 그런 고립감이 좀 덜 들 수 있었던 건, 나는 거기서 떨어져 나왔는데 아주 외진 데가 아니었고 다시 대중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랬다는 게 굉장히 다행스러웠다는 거죠.

 

98년도에 정식 콘서트를 했어요, <얘기 노래마당> 때 말고, 근데 그게 사람들이 많이 왔고, 다음해 <건너간다> 콘서트 때도 사람들이 많이 왔구요. 음..... 그래요, 나는 거기서 떨어져 나왔지만 우리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판을 사주고 하는 후원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쉬웠는지도 모르죠.

 

그렇죠. <촛불>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내 생각이 변해서가 아니라. 당시 운동 진영에서 노래를 하면 내가 꼭 해야할 말이 있었거든요. 이걸 얘기하려면 흘러간 노래나 부르고 그럴 수는 없잖아요.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길손) 예. 그런데요, 이념이나 대의를 위해 모였지만 그게 손상될 때 결국 사람을 붙잡는 것은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들이지 않나요? 같이 모여 있다 떨어져 나올 때 그런 경험을 하시지 않았나 하는 것이 궁금했거든요. 다른 얘기를 좀 드리죠. 노래를 듣다보면 가사가 상당히 길고 서사적인데도 전달이 참 쉽거든요. 특별히 그런 것들을 의식하시나요?

정) 녹음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요. 나는 곡을 쓸 때 한 쪽에 백지를 놓고 한 쪽에 오선지를 놓고 쓰는 식이에요. 가사 한 줄 나가고 멜로디 한 줄 나가고 그런 거죠. 그러니까 가사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만들어지고 녹음할 때도 가사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쓰죠.

 

길손) 솔직히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을 평론한다는 사람들이 짚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정) 내가 짚어 줬으면 하는 부분을 짚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길손) 스스로의 음악 세계 중에서 꼭 이 대목만큼은 주목해 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나요?

정) 그걸 콕 집어 얘기하기는 힘들어요. 근데 나한테든 누구한테든 서정성, 서정성 하는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서정성은, 그것만이 어떤 노래나 예술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누구나 내면에는 선과 악 두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서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악의를 감춰라 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요. 내 노래는 그런 두 부분이 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래의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이야기하는 기준은 좀 그렇죠. 무작정 선의만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길손) 음... 너무 오랜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 아니요. 이 정도는 생각을 했고. 사실 할 얘기가 없을 것이다 그랬는데. 얘기가 많이 되었네요.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면 또 좀 다른 얘기들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자리를 정리할 무렵 그는 우리를 소개해 준 사람을 붙들고, 언제 시간 나면 밤낚시를 가자고 했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밤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기회가 되면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쳐 있었지만 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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