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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무서운 쓰레기, 두려운 새벽 거리

by 내오랜꿈 2007.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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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무서운 쓰레기, 두려운 새벽 거리 | 사람 인터뷰
출처 : <월간 인권>, 2007 9*10 (국가인권위원회:http://www.humanrights.go.kr)




총도 무섭고 차도 무섭지만 제일 무서운 건 쓰레기다. 
쓰레기로 넘쳐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지독한 악몽이다. 
그들은 썩은 냄새를 제 옷에 담고 묵묵히 쓰레기를 치운다. 
세상은 그렇게 누군가의 희생으로 오늘도 밝다.
 

오후 6시, 저녁식사를 마친 윤유복(60) 씨가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집을 나섰다. 일찍 퇴근길에 나선 인파와 뒤섞여 버스를 탄 그가 내린 곳은 팔달시장 앞. 서구 비산5동 동사무소를 향해 걷던 윤씨가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사실 난 아버지 얼굴을 몰라. 유복자로 태어났거든.” 

2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나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는 그와 동사무소에 도착해서였다. 겨우 눈비를 피할 정도인 귀퉁이 쉼터에서 옷을 갈아입는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 입고 나온 평상복을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순간 갑자기 그의 체구가 한 뼘쯤 작아져버린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밴 작업복에 야광조끼를 걸친 윤씨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담배를 피울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먼. 정년퇴임하면 끊기로 아내와 약속했거든.” 

정년퇴임을 반 년 앞둔 윤유복 씨에게 하루 한 홉의 소주와 한 갑의 담배는 피로회복제나 다름없다. 일이 꼬이거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때 술▪담배는 정다운 동무와 같다. ‘기럭지’가 길어서 한 개비를 두 번에 나눠 피운다는 장미 담배를 예찬하던 그가 마침내 리어카 손잡이를 붙들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은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8시, 리어카를 앞세운 그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리어카를 앞세워 거리로 나오자 귀가하는 사람들 사이로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벌써 사흘째 대구 기온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어제 부산에서는 폭염으로 3명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윤씨의 리어카가 분지의 폭염을 뚫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더위를 식힐 겸 골목에 나와 있던 마을노인들이 윤씨를 보고 알은 체했다. 백발이 성성한 한 노파는 객지에 나간 맏아들을 맞이하는 듯한 목소리로 오늘도 고생 많다며 윤씨를 격려하고 나섰다. 

“많이 더우시죠?” 

“말도 마. 방이고 부엌이고 찜통이야!” 


엄살이 아니었다. 생활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해 원터5길 골목으로 접어들자 숨이 턱턱 막혔다. 방금 지나온 소방도로와 달리 골목은 바람 한 점 없었다. 리어카 한 대가 간신히 들어가는 막다른 실골목으로 접어들었을 적엔 온몸이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그제야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일하기 낫다고 한 윤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름에 골목을 치우고 나면 찜질방에서 나오는 기분이야. 옷이 금방 축축해져.” 

숨막히는 찜통더위 속에서 윤씨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지그재그로 서너 골목쯤 돌았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빈 리어카가 가득 찼다. 

새벽 2시경 구청 운반차량이 수거해 간다는 장소에다 방금 골목에서 나온 쓰레기를 부릴 때였다. 가로등이 하나 서 있는 그곳에 제법 큼직한 글씨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쓰레기 불법 투기 또는 비규격봉투 사용 시에는 최고 100만원까지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는 경고문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 고구랑7길에는 불법 투기 신고포상금제를 실시한다는 안내문이, 참아름3길에는 커다란 양심의 거울이 걸려 있기도 했다. 

“종량제를 실시한 뒤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비닐봉투에 담아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 

그러면서도 그는 골목과 소방도로에 몰래 내다버린 비규격봉투를 방치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모를까 여름에 저걸 불법이라고 두었다가는 마을 전체가 악취로 뒤끓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반차량이 수거해 갈 장소를 말끔히 정리정돈한 윤씨가 다시 리어카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고만고만한 면적에 지붕이 낮은 집들, 가로등마저 없는 컴컴한 골목. 유달리 그 골목은 연탄재를 내놓은 곳이 많았다. 골목은 물론 이웃들의 살림살이까지 훤히 꿰고 있는 윤씨의 말에 따르면 이 골목은 환자가 많고, 나이 든 노인들이 절반 넘게 모여 사는 곳이라고 했다. 할 얘기가 더 남았는지 골목을 치우다 말고 윤씨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분리수거와 종량제를 하기 전에는 땡그랑땡그랑 요령을 쳤잖아. 그때는 주민들하고 싸움 많이 했구먼. 나는 통금이 풀리면 곧 일을 시작했는데 너무 일찍 쓰레기를 걷어간다며 야단들이었지.”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다. 자다 말고 일어나 청소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그러나 아는 사람의 소개로 1978년 환경미화원으로 발을 내디뎠다는 윤유복 씨는 그 무렵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가장 힘들었노라고 했다. 하루만 일을 안 나가도 봉급에서 삭감되는 일당직을 계속해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쉬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또 한창 건설경기가 좋아 청소 일을 하던 동료들이 줄줄이 이직할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명절이라고 해야 고작 하루 쉬는, 휴가비는 물론 보너스 한 푼 나오지 않는 청소부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까지 해서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보다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라톤 선수처럼 앞만 보고 달렸지 뭐. 이 봉급 가지고 한눈 팔다가는 여섯 식구 거덜나기 십상이었거든.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내 눈은 앞만 보라고 생겼다는 거야.”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오거리1길과 동아리3길 수거작업을 마친 뒤 고구랑7길로 들어섰다. 시간은 벌써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을 치우는 동안에도 윤씨는 자신보다는 고구랑7길 주민들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저 집은 마늘 까서 살아가는 집이고, 저 집은 밤 까서 살아가는 집이고, 또 저 집은 나이 든 환자가 둘이나 되고….” 

총도 무섭고 차도 무섭지만, 나는… 

6차선 도로로 나오자 그의 리어카가 위태로워 보였다. 크고 작은 차량들이 쏘아대는 불빛으로 인해 그의 야광조끼마저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드문드문 인도를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 또한 고울 리 없었다. 이십대 초반의 한 여성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윤씨와 마주치자 코부터 틀어막았고, 술을 마신 젊은이 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을 이해 못할 건 없었다. 윤씨는 분명 코를 틀어쥐게 만드는 악취 속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악취를 풍긴 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라는. 

횡단보도를 건넌 윤씨가 질주하는 차들이 짓밟아버려 옆구리가 터진 봉지의 쓰레기를 손으로 쓸어모았다. 마치 그 모습이 아스팔트 위에 한 그루 나무를 심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활쓰레기를 내놓은 곳이면 이렇듯 승합차들이 주차해서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그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차와 차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쓰러진 봉투는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고, 터진 봉투에서 쏟아져 나온 퀴퀴한 쓰레기는 한곳으로 쓸어모을 뿐이었다. 그 일을 다 마친 윤씨가 비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총도 무섭고 차도 무섭지만 나는 쓰레기가 더 무섭다고 생각해. 넉넉잡아 닷새만 저 쓰레기를 방치한다고 생각해봐. 아마 세상은 금방 악취 천지로 변할 거야.” 

듣고 보니 끔찍했다. 아니 그런 일이 머잖아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윤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밤 우리가 버린 3톤의 생활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노동의 대가에 비해, 그리고 환경미화원 30년에 견줘보면 윤씨의 월급이 많다고는 볼 수 없었다. 기본급 70여만원에 수당을 합하면 200만원이 조금 넘을 뿐이다. 

시간이 또 얼마쯤 흘렀을까. 골목에 내놓은 생활쓰레기를 다 끄집어내자 새벽 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리어카를 동사무소에 넣고 찾아간 곳은 윤씨가 단골로 드나든다는 막창집. 허기진 배도 채울 겸 라면과 막창, 맥주를 주문한 나는 그동안의 거리를 어림잡아 계산해보았다. 족히 시오 리는 걸어온 듯했다. 

“천천히 걸어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구먼.” 

막창집 벽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매일 이 시각에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골목치기 피로를 털어낸다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창집을 나와 20여 분 걸었을까. 어느 호프집 앞에 도착할 무렵 운반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씨의 두 번째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코를 틀어쥐었다. 운반차량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낯선 길은 아니었다. 어제 오후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윤유복 씨의 리어카가 들락거린 거리였다. 운반차량은 윤씨가 무려 다섯 시간 동안 골목을 치운 쓰레기를 모아둔 곳으로 족집게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느슨한 골목치기와 달리 쓰레기를 차에 싣는 일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40여 분 만에 생활쓰레기를 가득 채운 운반차량은 성서 소각장으로 향했다. 소각장 입구에는 미리 도착한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소각장 문(평일에는 5시, 주말▪주일은 4시에 열린다)이 열리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차들이었다. 다른 구에서 온 환경미화원들은 아예 인도에 돗자리를 깔고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공복 담배를 피워 문 개인용역 환경미화원들과 말을 섞어보았다. 

“구청 미화원들이 부럽지 뭐. 봉급도 우리하고 엄청 차이가 나거든. 현재 환경미화원이 구청 반 개인용역 반으로 돌아가는데 이 일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가 돼버렸어. 어디 그뿐인 줄 알아. 청소부라도 해서 살아보려고 했다가 마누라가 도망간 바람에 인생 망친 미화원이 한둘 아니야. 이해는 돼.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골빈 여자가 쥐꼬리만한 봉급에 썩은 냄새 풍기는 남자하고 살겠나. 안 그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반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잘릴 염려만 없다면 어떤 이야기라도 다 들려주고 싶다던 쉰 초반의 미화원이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소각장으로 들어가는 차에 오르다 말고 그가 이 한마디를 툭 뱉었다. 

“미안해. 남은 마누라라도 잘 지켜내려면 한 차라도 빨리, 더 싣고 와야 하거든. 우리들의 밤과 새벽이 이래. 마누라고 자식이고 안전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나이에 버림받지 않으려면 쓰레기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침이 밝아오는 거리는 세수를 마친 듯 정갈했다 

이튿날 새벽에는 중리 사거리로 나가보았다. 간밤 돌풍이 몰아친 8차선 차도와 인도는 난장판이었다. 차도 한가운데는 팔다리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널브러져 있고, 인도에는 가로수 잎들이 망명지폐처럼 나뒹굴었다. 인적이 뜸한 거리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윤금순(58) 씨가 좌우를 살피더니 중앙선으로 뛰어들었다. 곧 날이 밝으면 흉하게 드러날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서였다.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하는 윤금순 씨는 19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간밤에 하늘이 난리를 안 쳤는교. 자다가 몇 번을 깼는지 모르니더. 은행나무는 잘 안 떨어지는데 이놈의 뽀쁠라는 매가리가 없어서 그런지….” 

그래도 오늘은 양반이라고 했다. 비를 동반한 태풍이 들이닥치는 날에는 일할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낙엽이 비에 젖으면 비질하기가 배로 힘든 까닭이다. 


○구청에 적을 둔 여성 환경미화원은 현재 3명. 그중 윤금순 씨는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 19년 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던 남편이 거리청소를 하던 중 승합차에 치인 것. 남편의 뒤를 이어 첫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막상 새벽거리로 나와 보니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차들이 무서웠다. 차도에 나뒹구는 쓰레기를 보고도 치울 엄두를 못냈다. 

“새벽에는 신호등이고 뭐고 없는기라. 빨간 불이고 파란 불이고 막 달리는데 안 무서울 사람이 어딨노.” 

윤씨가 무서워하는 건 그뿐 아니다. 도로에서 청소하고 있다가 돌진하듯 갑자기 차가 유턴을 하면 그는 사지가 떨린다고 했다. 그런 일이 벌써 한두 번 아니었던 것일까.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던 윤씨가 다시 비질을 시작했다. 

윤금순 씨가 맡은 중리 사거리에서 갑을 사거리까지의 왕복 3km. 새벽과 오후, 하루 두 차례 이곳을 쓴다는 그가 잠시 허리를 편 건 주유소 앞에서였다. 자신도 날을 꼬박 새웠다는 주유원이 윤금순 씨에게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내밀자 그제야 윤씨의 얼굴이 윤곽을 드러냈다. 간밤 몰아친 돌풍 덕에 오늘은 제법 날씨가 선선한데도 그의 이마에는 포도송이만한 땅방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새벽 3시에 집을 나선 윤씨가 청소를 다 마친 건 오전 8시 반경이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바뀐 차도와 인도는 방금 세수를 마친 듯 정갈했다. 한 뼘쯤 더 넓어진 그 길 위로 네 바퀴 달린 차와 두 발 달린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씨의 일과는 계속되었다. 잰걸음으로 귀가한 그가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달려간 곳은 인근 동사무소. 출근 도장부터 찍은 윤씨는 일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자신이 맡은 새벽거리 청소를 마치고 나면 9시 반부터 점심 때까지 진행되는 골목청소 일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청소라는 게 끝없는 되풀이였다. 누군가 버리면 쓸어 담고, 말끔히 청소한 뒤 가보면 또 어지러져 있고…. 

기쁘고 아름다운 곳보다는 아픈 곳에 먼저 손이 간다고 했던가. 자신의 손으로 팔을 주무르던 윤씨가 두 번째 일터로 향하다 말고 아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병원하고 한의원을 번갈아 다니는데 팔이 낫질 않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잠자리까지 통증이 찾아와서 애를 먹여.” 

새벽 3시에 일어나 거리와 골목을 쓸고 나면 오후 4시가 되고 그제야 집으로 돌아가는 윤금순 씨. 19년간 비질을 해서 세 아들을 대학공부시켰다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다. 쓸어도 쓸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낭만의 계절 가을이 가장 싫다는 윤씨의 한마디가 못처럼 박혀왔다. 


★ 박영희 님은 대구에 살고 있는 시인으로 얼마 전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시집 <즐거운 세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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