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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 "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

by 내오랜꿈 2007.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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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 "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
<채널예스> 정혜윤 PD의 그들은?

출처 : <채널예스> 2007년 11월 07일 


뮌헨에 첫눈이 온 날, 서울의 가을바람은 커다란 손을 가진 선량한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같아서 늦가을로도 초겨울로도 좋았다. 그날 우리들은 인사동의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서 베토벤이 마지막 순간 그의 전 재산을 남긴 불멸의 여인을 찾아나서는 영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의 한 구절 ‘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과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은 누구였던가? ‘그래야만 한다.’라는 말은 누구에게 바쳐진 말이었던가?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고 어느 정도 침묵의 시간을 흘려보낸 후 ’그래야만 한다.’라고 대답하는 그 영원 같은 찰나, 찰나 같은 영원이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은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관한 것이다.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인가?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받기를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이다. 그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muss en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을 마지막 악장으로 달고 있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16번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온다. 첫 장면은 토마스가 연인(이라기보다는 바구니에 실려 강물을 따라 자기에게 흘러온 갓난아이 같은) 테레사를 따라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차를 몰아 스위스 국경을 넘어가며 자기들의 도시 프라하를 짓밟을 소련제 탱크를 보기 직전까지. 또 하나는 그보다 오래전 소도시의 하급 여점원이었던 테레사가 코냑을 주문하며 책을 읽던, 출장 온 외과의사 토마스에게 여섯 겹의 우연을 뚫고 코냑을 전해주러 걸어갈 때, 바로 이 음악이 흐르는 것이다. 소설은 테레사와 토마스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마지막으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는 장면으로 끝난다. 테레사는 그날 밤 토마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쿤데라는 그날 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변영주 감독에게 들려줄 것이다(꼭 흥행대작이 없다는 의미만은 아님). 아마 그녀는 웃음 또는 울음을 참는 방식의 바로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는가? 그래야만 했다.”

<낮은 목소리> <밀애> <발레 교습소>의 변영주 감독에게 어린 시절의 라따뚜이는 스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였다.

“부모님 둘 다 일을 하고 있었고 언니 오빠랑 나이 차이가 심해서 오후 한두 시경부터 저녁 10시까지 거의 혼자 지내야 했어요. 엄마는 매일매일 용돈을 주면서 그것으로 어떻게든 견뎌보라고 애길 했었죠. 어린 시절 즐겨먹던 음식이 미군 부대 캔이라 생각하면 좀 슬프지만 어찌 됐건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책을 뒤지는데 『춘향전』이 있더라고요. 서서 좀 읽어봤는데 어린 것들이 연애질하고 술 먹고 놀더라고요. 그래서 그 책을 사가지고 와서 읽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걸리면 혼나지 않을까 두려웠는데 뜻밖에도 너는 용돈으로 책을 사는구나, 하고 마구마구 칭찬을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책은 아! 혼나지 않는 것! 뭐 이렇게 생각이 되었죠. 『아라비안나이트』도 음험하고 잔인한데 그것도 칭찬을 받았어요. 내친 김에 《선데이서울》도 사서 봤는데 그건 야단을 무지 맞았어요. 내가 보긴 《선데이서울》이나 『춘향전』이나 그게 그것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때 깨달았죠. 《선데이서울》은 혼이 나고 책은 칭찬을 받는구나! 책은 안전하구나! 라고 말이죠. 어린 시절엔 쾌락, 욕망, 탐식, 이런 것들을 죄악이라고 배우는데 그런 것들을 굉장히 칭송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배반의 기쁨 같은 것을 느꼈고요”

배반의 기쁨이란 그녀의 표현을 듣자하니 이상하게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빅토리아의 발레』가 생각이 났다(그녀의 영화가 <발레 교습소>란 점에서 그럴지도 모른다). 『빅토리아의 발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빅토리아(그녀는 앙헬을 처음 만난 날 자신을 ‘라 빅토리아’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그녀는 독재에 저항하다 목이 잘려 죽은 채 발견된 아빠가 일하던 바로 그 학교에 다닌다.)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남자 친구 앙헬(그 둘은 <음란 천국의 엠마뉴엘>이란 일본 영화를 상영하는 삼류극장 앞에서 처음 만난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잘생긴 앙헬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난 딱히 기억할 만한 친구나 과거가 없어. 그래도 나는 내가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믿어. 난 맛있는 초특급 핫도그를 담그고 있는 위 같은 사람이야.”)이 공부를 도와주는 장면이다.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지?”
 “베이징에서 군대와 탱크가 많은 사람을 학살했어.”
 앙헬은 머리를 빅토리아의 가슴으로 가져간 뒤 젖가슴에 대고 원을 그렸다.
 “우리가 갑자기 대기권을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지?”
 “터져버리겠지”
 “신체에 축적되면 땀을 분비하고 신경통을 일으키는 합성물질은?”
 “요산.”
 “끝내주는데 빅토리아, 한 문제도 안 틀렸어.”
 “너랑 공부하니까 훨씬 쉽다. 전 과목이 다 외워지는걸.”
 “단일생식이란 뭐지?”
 “수컷 없이도 번식하는 거야. 그건 그렇고 너 콘돔 썼어?”

어쨌든 이 장면은 사력을 다해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장면이지만 어른들을 기절초풍시킬 만한 배반의 명장면이다. 나이 어린 변영주의 배반은 음험한 배반이 아니라 마치 산티아고의 앙헬과 빅토리아처럼 어떻게든 혼자 겪어내야 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서글프고 제 딴에는 엄숙한 배반일지 모른다. 배반함으로써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단 점에서 인생에는 배반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알려주는 그런 종류의 배반. (하지만 배반이 기쁜 것은 아직 진짜로 배반하지는 않았을 때란 점에서 배반은 슬픈 운명을 갖는다. 아이들의 배반은 언제나 슬프다.)

그런 그녀가 책에 진짜로 본격적으로 빠진 첫 번째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겨울 중학교 진학을 앞둔 긴 방학 때였다. 친구들 대부분 영어를 배우러 다니거나 과외를 받을 무렵 그녀는 우연히 그녀의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10년 전에 산 《이광수 전집》을 발견한다.

“언어가 아동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묘사도 리얼하고요. (‘소설이 야동이야?’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했다 하는데 나는 고상하게 ‘좀 성적으로 느껴졌군요.’라고 고쳐 말해 줬다.) 아동문학가들의 글보다 훨씬 세련되었고 무엇보다도 상처받은 사람의 글이란 걸 처음 봤어요. 『유정』『무정』이 특히 좋았어요. 나중에 생각하면 ‘세기말을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식민지의 청년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 같아요.”

그녀가 리어카에서 산 《이광수 전집》을 읽던 시기는 정말로 라디오 시대였고 대마초로 인한 오랜 칩거 생활을 마무리한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로 심금을 울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창밖의 여자>랑 이광수 소설이 어찌나 잘 맞는지, 그 쓸데없는 비정함이 두고두고 기억이 나요. 그때 아버지가 언니 오빠가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베란다를 막아서 공부방을 만들었었어요. 굉장히 좁은 방 한쪽에 LP턴테이블이 있고 그 앞엔 LP들이 있었는데 LP와 턴테이블 사이의 밀폐된 곳에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책을 보면 온몸이 붕붕 뜬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숀 캐시디 음악과 《새소년》. 조용필와 이광수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이광수를 오래 좋아하진 않았어요. 나중에 나스메 소세키를 읽고는 이광수 글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어요. 말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절망감을 표현하는 데 목숨을 건 사람처럼 여겨졌어요.”

절망감을 표현하는 나쓰메 소세키라면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그 후』의 아름다운 장면. 다이스케가 동백꽃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깨 오른손을 심장에 얹고 늑골 끝 맥박을 확인하며 다시 잠을 청하는 첫 장면과 친구의 아내가 된, 예전부터 흠모했던 여인 미치요가 가난과 피곤에 지쳐 돈이라도 꿀 요량으로 다이스케를 찾아와서는 목이 마르다 말하고 채 마실 물이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 방에 있던 은방울꽃이 꽂혀 있는 수반의 물을 마셔버리는 장면 같은 것. 이런 장면들에서 촉감과 향기가 표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절망이다. 그의 서간집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소가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세. 우리는 어떡하든 말이 되고 싶어 하지만, 소는 웬만해선 될 수 없네. … 서둘러서는 안 되네. 머리를 너무 써서는 안 되네.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세상은 참을성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알고 있나? 불꽃은 순간의 기억밖에 주지 않네. 힘차게, 죽을 때까지 밀고 가는 걸세. 그것뿐일세. 결코 상대를 만들어 밀면 안 되네. 상대는 계속해서 나타나게 마련일세. 그리고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네. 소는 초연하게 밀고 가네. 무엇을 미느냐고 묻는다면 말해 주지. 인간을 미는 것일세. 문사를 미는 것이 아닐세.”

‘무엇을 미느냐고 묻는다면 말해주지, 인간을 미는 것일세.’ 이런 문장을 절망을 겪어본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어본 일이 있다. 진짜로 못 견디게 따뜻하다. 무엇을 미느냐? 인간을 민다. 다시 되새겨 봐도 이건 정말 절망적으로 따뜻한 말이다.

그녀가 책에 빠진 또 한 번의 순간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우리 집이 엄청난 천주교 집안이에요. 이를테면, 성적이 떨어져도 맞은 적이 없는데 성당 안 가고 갔다고 하면 정말 맞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 천주교 잡지들이 많이 배달되었는데 한 잡지에 김지하의 시가 매주 한 편씩 나오는 거예요. 그땐 전국이 하도 어수선해서 나도 대학에 가면 학생 운동을 하게 될까? 뭘 좀 알고 싶은 게 더 있긴 있는 게 뭘까? 그런 생각도 하고 있는데 김지하의 시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죠.. 85년경이었는데 <빈 산>이란 시였어요. (빈 산 / 아무도 더는 / 오르지 않는 빈 산 / 해와 바람이 / 부딪혀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 빈 산) 읽는 데 정말 슬펐어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슬프지? 궁금했어요. 사실 나도 슬픈데 난 내가 왜 슬픈지 잘 몰랐었거든요. 학력고사 보고 딱 나올 때 내가 제일 먼저 나왔거든요. 해가 지고 있었고 너무 지쳐 있었고 엄마들이 학교 문 앞에 쭉 서 있는데 우리 엄마 얼굴도 보였어요, 그때 기분이 굉장히 나빴어요. (사실은 ‘더럽다’고 말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몇 시간 시험으로 결정 나고 내 인생도 달라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내 삶이 그렇게 후진 것 아니고 나름대로 열심히 산 건데 잘못했으니까 봐 주세요 이렇게 빌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거죠. 나는 내가 왜 슬픈지 잘 모르는데 <빈 산>을 읽어보니까 김지하는 자기가 슬픈 이유를 아는 듯했어요.”

그녀가 김지하의 시집을 다시 보게 된 건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학교 앞에 (졸업 때까지 그녀의 아지트가 된) 다락방이란 서점에 들락거릴 때였다. 그녀는 다락방 서점을 발견하고 ‘숨겨진 도서관’(몇 년 뒤에 그 서점을 들른 나는 ‘숨어 있기 좋은 방’이란 표현을 썼다.)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고 표현했는데 그때부터 죽어라 책을 읽는 대학생이 되었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란 책이 있는데 아마 그 책이 내 청춘을 장식한 책일 거예요. 레지스탕스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비슷한 충격과 감동을 준 건 영화로는 장 피에르 멜빌 <그림자 군단> 정도일 것 같아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손잡고 다정하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죠 .내가 지금 큰 변화를 원하고 있는데 내 삶은 행복하고 안전하고 인간적이라면 그건 이상하단 걸 알게 된 거죠. 우선 내가 행복하지 못하니까 세상과 싸우는 거지 나는 행복한데 남을 위해 뭔가 한다는 것은 틀린 거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에요. <그림자 군단>에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는 사람을 처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와 비슷하게 비정함, 비인간적인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덕목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세상은 즐겁고 행복하게 바꿔지는 것은 아니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진짜 무서운 일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택, 그건 비참한 선택이고 그런 줄 알면서도 하는 선택이라 생각했어요. 한마디로 삶이 우아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 책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의 첫 문장은 ‘하나의 세계가 우리들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이다. 책의 초반에서 주인공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그 유명한 문장을 베껴 적는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인류 전체를 사랑하면 할수록 특정한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사랑하는 일은 적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특정한 사람을 혐오하면 할수록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이 뜨겁게 타오른다.’ 그러나 이 책의 끝 문장에선 삶의 이유를 정확히 짚어준다. “사람들이 노래하며 죽음과 고문에 맞서며 기관총과 전차 앞에 자신들의 몸을 내던지는 것은 사랑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동질성을 실현하고 그 충만함 속에서 기쁨을 맛본 사람들에게 죽음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들의 동질성의 실현.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한바탕 꿈이다.

대학 당시의 그녀의 독서 행태를 설명하자면 100권의 이론서보다 한 권의 문학에 더 영향을 받는 쪽이어서 이를테면, 1950년대부터 80년대 현대사는 박완서의 책을 읽으며 이해했다.

“친구들이 나더러 넌 지금 세미나 준비해야 하는데 소설이나 읽고 있느냐고 했지요. 하지만 이를테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읽는 것보다 박완서를 읽는 게 나에겐 더 이해가 쉬웠어요. 『휘청거리는 오후』야말로 나만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었죠. 저는 50년대와 80년대의 사랑에 대해서 『휘청거리는 오후』만큼 잘 쓴 책을 보지 못했어요. 대학 마치고도 그랬어요. 나는 우리 아버지 세대를 이해 못했는데 
 『그 남자네 집』 보면서 아버지 세대의 청춘을 너무나 슬퍼하게 되었어요. 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것도 알 것 같아요. 그때의 빨갱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청춘을 앗아간,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다 앗아가고 오로지 삶을 생존해야 할 무엇으로 만들어간 존재인 거죠. 『그 남자네 집』의 포장마차 장면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낭만이란 양키 군화 삶은 것 같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메탄올 같은 소주를 마시며 꿈을 꿔보려고 하지만 이미 받을 대로 받은 상처는 어쩌라고요? 이산가족 찾기 상황을 가장 예술가적인 태도로 보던 사람이 저는 우리나라에 둘이 있다고 생각해요. 박완서와 임권택이죠.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말이에요.”

『휘청거리는 오후』가 우리 시대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것은 참으로 절묘한 비유인 것 같다. 부잣집에 큰딸을 시집보내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우리의 주인공 허성 씨가 가발 쓴 늙은 창녀를 찾아가 쏟아내야 할 것은 욕정이 아니라 오열이라고 생각하며 한바탕 울듯이 관계를 맺은 뒤, 아내에게 고정적으로 돈을 대주는 남자 노릇을 하기 위해서 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서두르는 장면이나 큰딸 초희가 돈 많은 속물이랑 선을 본 후 혼자서 커피숍에 들어가 두꺼운 화장을 지웠다가 잠시 후 다시 화장을 하며 결혼을 결심하는 장면 같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가족과 사유재산을 구축해왔나를 참으로 남의 일 같지 않게 이야기해준다. (변영주는 『휘청거리는 오후』의 큰 딸을 가장 좋아한다.)

변영주가 말하는 『그 남자네 집』의 포장마차 뒷장면은 이렇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늙은 그녀가 전쟁 직후의 포장마차에서 나던 것 같은 카바이트와 연탄불 냄새를 다시 맡았을 때 그 냄새를 어쩔 수 없이 그리워하며 ‘왜 포장마차의 그와 헤어졌을까?’ 생각하다가 그때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 평범한 집이 필요했기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정답이 나오면 비밀은 없어진다. 나는 그렇게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인생이 살 만한 건 정답이 없기 때문에” 라고 너무나 인간적인 허세를 부리며 찻집에서 쌍쌍이 애무하는 젊은 애들에게 이렇게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인생을 낭비하라!’ 인생을 낭비한 적이 없는 세대가 뱉어내는 인생을 낭비하란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건 사실은 피 토하는 말이다. 바로 자신의 청춘에 바치는 만가 같은 것.

그 이후로 남보다 체격이 크다는 이유로 카메라를 들기 시작해 촬영이란 걸 배우게 된 변영주에게 문학과 영화는 그녀를 지탱하는 두 축이 되어준다. 그녀 식으로 표현하면 문학은 인생의 망원경이었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그녀는 책을 통해 자기 안에 기억의 도서관을 지음으로써 스스로 망원경이 되었다.

<낮은 목소리>, 즉 다큐멘터리 시대를 거쳐 그녀는 상업영화에 뛰어드는데 전경린 원작 『내 생에 하루뿐인 특별한 날』로 <밀애>를 만든 후 ‘해피엔드를 꿈꾸는 열아홉 내 청춘 건투를 빈다.’라는 카피 문구를 단 성장영화 <발레 교습소>를 만든다. 어느 날 그녀는 <발레 교습소>는 왜 실패했나? 실패 분석 여행을 가게 된다. (실패라고 말할 때의 그녀의 쩔쩔매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쩔쩔맴과 저자세야말로 그녀의 <발레 교습소>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아하는 도시인 경주로 프로듀서랑 반성의 여행을 갔어요. 한 사람은 운전을 하고 운전하지 않는 사람은 마냥 쉬는 건 절대 못 보니까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주기로 했죠. 그때 차안에서 읽은 게 가네시로 가즈키의 『레볼루션 넘버 3』였어요. 읽다가 어느 순간 눈물을 멈출 수 없었어요. 읽고 있는 우리 피디도 울먹울먹했어요. 삼류학교에 다니는 ‘더 좀비스’라는 클럽 애들이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서 여고에 무단 잠입해 옥상에 올라가 불꽃을 터트리면서 저만큼 떨어져 있는 병원에서 친구가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때 이미 그 친구는 시신경까지 마비가 와서 볼 수 없는 거죠. 그때 내가 <발레 교습소>에서 못한 게 뭔지 알았어요. 마이너리티로도 승부를 걸 수 있는데 그 생각을 못한 거죠. 나에겐 해피엔딩, 행복에 대한 강박이 있었구나!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끝까지 가지 않았구나!”

(개인적으로 『레볼루션 넘버 3』의 명장면은 아팠다던 바로 그 친구가 비 오는 날 오줌을 누면서 빗줄기를 뚫고 오줌에서 올라오는 김을 쐬면서 ‘아, 살아있다는 느낌이 좋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비정함과 절망과 매료된 그녀가 사실은 행복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니. 나는 이 시점에서 배반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슬프고 사랑스럽다.

<발레 교습소> 이후 나를 감동시켰던 몇 편의 책이 있어요. 『슬램덩크』를 양질의 하드카버로 다시 구입했어요. 그걸 보면서 인생의 교훈을 얻었어요. 중요한 건 천재 고등학생이 덩크슛을 한다는 게 아닌 거죠 .4개월 동안 눈부시게 성장했던 강백호는 결국 등을 다쳐서 다시 재활을 해야 합니다. 너무나 빛났던 4개월은 흘러간 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강백호의 경우 순식간에 성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그때 그 아이의 결심에 찬 웃음이 잊혀지질 않아요. 그다음부터 신기하게 일본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하루키 수필집,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우동 먹는 이야기나 하고 .뭐 대학 때 MT 가서 술 다 먹고 속 쓰릴 때 새벽녘에 호숫가에서 읽기 딱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변의 카프카』를 읽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경주에 있는 동안 서점에 가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다 사서 읽기 시작했어요. 일본 소설이 가볍다고 하지만 내 생각엔 일본 소설들이 무거워요. 왜냐하면 일본 소설들은 누구를 묘사해야 하는가를 찾아낸 거죠. 자기 성찰이 대중적으로 들어간 문학이 요새 몇몇 일본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변영주가 폭 빠지기 쉬운 글이다. 열다섯에 가출을 한 다무라 카프카는 고무라 도서관(숨겨진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아라비안나이트』와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다(그녀도 좋아했던). 그리고 이 말 “세계의 끝까지 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넌 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새로운 세계의 일부분이 되어 있을 거야.”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끝까지 갈 수 없어서 부끄러웠다던 그녀가 이 문장을 놓쳤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어려서 혼자 100여 개의 장기알을 의인화시켜 이야기를 하면서 놀던 아이는 책을 읽음으로써 스스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억의 도서관을 지었고 영화감독이 되었고 이제 막 새로운 영화의 시나리오를 막 끝냈다. 그 영화는 신용카드 불량사회란 사회적 이슈와 아름다운 여인의 미스터리를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원작이다. 내 생각엔 세계의 끝까지 가서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어 했던 여인이 나올 것 같다.

그 여인을 풀어내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형식은 슬픔이고 내용은 행복이 될까? 어쨌든. 변영주 안에서 비정함과 절망, 그리고 행복은 흐르고 흘러 어느 날 이런 식으로 만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녀는 그렇게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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