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독서 이력 - 읽었던 것들의 지혜가 끝나는 순간의 새로운 깨달음
<채널예스> 정혜윤 PD의 그들은?
출처 : <채널예스> 2007년 10월 10일
은희경은 자신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수록된 「고독의 발견」에 doors의 노래 ‘people are strange’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편을 끼워 넣었다. 그 문장들은 이렇다.
네가 혼자일 때 타인의 얼굴을 모두 추악해 보인다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을 때 여자들은 모두 사악하다
네가 힘들 때는 걷는 거리조차 울퉁불퉁하다
아무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네가 낯선 존재일 때, 네가 낯선 존재일 때
- doors의 <people are strange>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엔 문이 있다.
-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는 동안 건축학자 짐멜의 말이 공감각적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로마 대성당 혹은 고딕식 성당에서 벽면을 차지하던 입구가 차차 줄어들어 고유한 의미로서의 문으로만 남게 됐을 때 그리고 반기둥들과 조형물들의 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그 사이에 문이 자리 잡게 되었을 때 이러한 문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히 사람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이 같은 구조는 마치 자명하지만 부드러운 제약처럼 방문자를 바른길로 확실하게 이끈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 중에서)
그래서 짐멜에게 인간은 “경계 없는 경계적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문의 역할은 이제 변했다. 문은 더 이상 타인에게 넘어오라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드럽게 손짓하는 세계가 아니라 구획 짓고 밀어내는 세계로 변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독의 발견이 아니라 고독의 발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독의 발명 시대에도 고독의 발견은 최초의 단서란 점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즉, “네가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모두 낯선 존재가 된다”는 단서를 찾아서. 한때 스스로 만들어낸 비밀과 고독 속에 있던 소녀가 (즉, 고독을 발명하던 소녀가) 「고독의 발견」이란 글을 쓰기까지 은희경은 어떻게 살았을까? 도어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또 다른 시에서 자신들의 팀 이름을 발견한다. 그 시구는 이렇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나리.” 은희경은 그걸 알았을까?
은희경은 전북 고창에서 건설업을 하는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다. 경제 규모에 비해서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았던 그 마을의 이미지는 그녀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의 서두에 매혹적으로 드러난다.
K읍은 예로부터 인물의 고장이라고 불리어왔다. 그래서 K읍 출신이라고 하면 예사로 보지 않으며 인물로 보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 같은 것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K읍 사람들의 교육열은 유난한 데가 있어 웬만한 집의 장남들은 으레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마치는 대로 도시로 보내졌다. 여행자들이 길이라도 묻기 위해 어느 집 마루에 걸터앉으면 높다랗게 내어 걸린 사진틀 속에서 도시에 나가있는 그 집 장남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채송화 봉숭아 따위가 심어진 보잘것없는 마당과 어둑식한 대청마루,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뒤란 할 것 없이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는 늘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갈망과 불만 속 체념의 기운을 포찰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 교육열 높은 소읍에서 여섯 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덜떨어진 한편 도도한 꼬마 숙녀 은희경은 어느 날 엄마 아빠와 함께 택시를 타고 전주로 나가 전주에서 가장 큰 서점(홍지서점 정도로 우리는 기억을 맞췄다. 전주에서 자란 사람들은 아마 그 서점을 다 기억할 것이다. 그 서점 근처에 소문난 욕쟁이 할머니 콩나물국밥집이 있었으니까. 그 서점은 훗날 전주 출신 소설가 양귀자 씨의 남편이 인수했단 소문이 있다)에서 《새소년》 같은 잡지와 동화책 한 권을 선물 받았고, 그리고 양품점에 가서 에나멜 구두 한 켤레를 받았다. 반짝반짝 에나멜 구두와 함께 받았던 책의 제목은 ‘반지의 왕자’인지 ‘장미의 왕자’인지 명확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도 그 첫 책의 기억은 스무 살 무렵까지 나이에 따라 각색되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나중에 물어봐도 그 책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뒤로 많은 공주 왕자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책만큼 강렬하진 않았어요. 그 책은 제가 처음으로 엿본 환상의 세계 같은 것이었는데 그 환상은 시골 읍내에서 살고 있는 여덟 살짜리 시골 아이의 일상과 묘하게 연결되는 어떤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책 속의 왕자는 한결같이 멋진 왕자가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그 왕자는 장미꽃을 갖고 있으면 정말 멋진데, 장미꽃을 떨어뜨리면 그 순간 너무나 형편없어지는 것으로 인생이 설정되어 있었어요. 세 가지 정도가 왕자의 삶의 제약 조건이었는데 장미꽃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 반지를 빠트리면 안 된다, 자기 영지를 벗어나면 안 된다, 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장미꽃이 떨어지면 얼간이가 되고 자기 영지를 벗어나면 픽픽 쓰러지는 왕자. 이 이야기가 나한텐 어떻게 읽혔느냐 하면, 완전히 거꾸로 읽히는 거죠. 지금 나는 이렇게 평범하지만 뭔가를 발견하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나만의 장미, 나만의 반지, 나만의 영지를 찾으면 진짜 멋져진다. 그걸 몰라서 이 모양 이 꼴이다.”
|
완벽하지 않은 왕자는 우리에게 그를 비웃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다. 그를 통해 분수를 지키라거나 룰을 지키라는 교훈을 얻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다. 우린 단점과 약점으로 서로를 위로하란 걸 알려주려고 등장하는 거다. 은희경은 고학년이 될 때까진 학교 도서관의 책을 굉장히 많이 봤는데 2층 맨 구석에 있던 2학년 1반 옆 교실의 어린이도서관 자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그 뒤론 그렇게 도서실이란 걸 열심히 다닌 일이 한 번도 없어서란다.
“그때도 어른들이 생각할 때 좋다고 생각한 책에 끌렸다기보다는 어린이 책치고는 악의에 차 있는 것들, 절망적인 것들에 오히려 인상을 받았어요.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예요. 아이가 병을 하나 주웠는데 병 속에 춤추는 악마가 들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불행을 벗어나려면 그 병을 누구에겐가 줘야 하는데 그걸 주는 행위는 알고도 남을 괴롭히는 행위이므로 고민이 되는 거죠. 난 이런 상황의 느낌이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무심코 주운 빈 병이 불행의 계기였단 게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에 불운이 온다는 이상한 조숙한 깨달음 같은 것도 줬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남에게 짐을 떠맡겨야 자유로워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보다 더 끌렸는데, 사는 게 좀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돌려 말하면 부모가 말하는 대로의 세상이라면 너무나 뻔한 것 아니냐? 그게 아닌 것 아닐까? 이런 것이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같은 책에 끌렸단 것인데 언제나 조숙한 아이들은 묻는다. “이게 다야?”라고.
은희경은 자신의 현재 문학의 전 재산은 초등학교 때의 글자 중독에 가까운, 닥치는 대로의 ‘한 바퀴 도는 독서 편력’이었다고 단언한다.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초등학교 때의 그 ‘닥치는 대로의 한 바퀴 도는 독서’만큼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은 다시없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집에 배달되던 농민신문인 《새농민》도 열심히 읽고 《건설회보》도 읽었어요. 읽는 것에 대한 갈증이 심했어요, 『고금소총』 같은 금서도 초등학교 때 읽고 《고전 해학 전집》도 읽고 밤색 표지였던 여섯 권짜리 《강소천 전집》은 아주 좋아했어요. 《새농민》이 오면 연재소설을 꼭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가끔 빼놓고 못 읽으면 할 수 없이 지어내서 이야기해주고. 기억나는 소설은 월남 파병된 군인이 나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전선에서 고향집에 두고 온 여자를 생각하는 장면엔 꼭 나오는 말이 ‘인명은 재천이다.’란 말이었어요.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별빛을 보면서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인명은 재천이다.’라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을 혼자 이해하고 나중에 써먹기 시작했는데 그 말이 누가 누구를 그리워할 때 하는 말인 줄 알고 연애 감정을 표현할 때 써버린 거죠. ‘난 네가 좋아.’라고 해야 하는데 ‘인명은 재천이다!’ 이렇게 고백을…. 또 하나 에피소드는 그런 연재소설엔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엿보는 장면이 꼭 나와요. 그런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 주위엔 그렇게 엿보는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책은 많이 읽었어도 애는 애니까 삼촌에게 물어봤죠. ‘옛날에는 첫날밤에 구경할 만한 재미난 일을 하던데, 요새는 첫날밤 아무 일도 안 하느냐? 요샌 통 안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좀 섭섭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는데 그 폭소는 다른 시대를 살았어도 이불 속 독학자들의 하는 짓은 비슷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경우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하늘은 높고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마비된다.’라는 사랑의 고백으로 써먹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의 이불 속에서 이뤄진 비밀스러운 독서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흔적을 남긴다.)
초등학교 때의 그녀는 자신을 비밀이 많았던 애로 규정짓는다. 비밀이 많아서 이미지 관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는데, 그녀의 비밀이란 ‘내가 별로 착하지 않은데 남들은 날 착하다 한다. 내가 별로 똑똑하지 않은데 남들은 똑똑하다 한다.’는 것. 이어서 칭찬을 받으면 그녀의 두뇌는 ‘날 또 칭찬하는구나 - 큰일 났다 - 비밀이 또 하나 생겼구나 - 이미지 관리 들어가자’ 이렇게 작동되었다 한다. 부모에게조차 이미지 관리하기에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맘을 터놓았던 기억이 없었단 점에서 고독했고 실제로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회상할 때 참 호감 가지 않는 꼬마였다고 말했는데 이를테면 “우리 놀지 않을래?”란 말을 들으면 “애들아, 우리 뭔가 유익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응수하여 결국 혼자 놀게 되는 식으로.) 고독했던 그녀는 나중을 위한 준비를 부모나 학교의 도덕 교육이나 사회 수업에 따랐다기보단 참으로 색다르게 해나갔다. 물론 책을 통해서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김삿갓이 어떤 여인을 좋아해서 정을 통하게 된 글을 읽었어요. 김삿갓은 여인이랑 밤을 보낸 뒤에 좀 실망스러웠나 봐요. 그래서 침소에 들었다 일어나서 시를 썼는데 여자에게 실망했단 내용의 글을 쓴 거죠. 그런데 그 여자의 답시가 잊혀지질 않는 거예요. ‘밤은 때가 되면 껍질이 벌어진다. 나도 저절로 밤이 벌어지듯 벌어졌다.’ 그게 무지 성애적인 표현이었을 텐데 난 너무 공감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하면 나도 남자 앞에서 난처한 상황이 되면 이런 식으로 재치 있게 행동을 하자.”
김삿갓의 그 일이 일어난 밤은 눈 내려 녹은 다음 날 정취가 고요한 동양화적 날이었는데 그런 지붕 밑에서 그런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로서도 한 가지 배울 수 있겠다. 인생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고요함 속의 들끓음.
어린 시절의 조숙한 독서란 게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중학교 때의 은희경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중학교 때 그녀의 아버지 건축업은 세게 부도를 맞게 된다. 아버지 입장에선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은희경 자신은 사실은 잘 느낌이 오지 않았다 한다. 이미 소설 속에서 사업가의 부도와 가족들의 방황에 대해서 꾸준히 읽어왔고 또 그런 스토리가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이미 머릿속으로 자기만의 숱한 타락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적어도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때도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즐겼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선 뭔가 방황해 줘야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지 않았는데 불행한 척 했어요. 너무 많은 드라마가 머릿속에 있어서 그 드라마의 패턴대로 소위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학교도 좀 빠졌는데 순전히 진심으로 그랬다기보다는 책에 나온 일이 나에게도 벌어지니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해 본 거죠.”
리허설 없는 이 세상에선 어느 경우엔 머릿속에서 연습된 고통도 도움이 된다. 어느 경우엔 많은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이 자기를 엉뚱하게 객관화시키기도 한다. 파푸아뉴기니의 어린아이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의 핍을 생각하며 자신을 달랠 수도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 은희경은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
눈에 띄는 족족 선생님에게도 동네 아저씨들에게도 이야기를 해달라 졸라대고 학교에 내던 장래 희망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는 아이”였던 은희경은 일찍부터 국문과로 진로를 정해 문예반과 백일장과 레몬북스(하이틴 로맨스들이다. 그땐 『쌍둥이 여대생』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인기 있었다 한다.)의 시대를 거쳐 77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의 독서는 시대가 규정하는 바가 강했으므로 논장서적 같은 곳에 드나들면서 당시 금서였던 루카치의 책들이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을 읽는 것이었다. 밑줄 그어가며 학습하며 읽었던 이 책들은 ‘이사 가도 버릴 수 없는 책의 목록’에 들어 있다. 그 시절의 책들은, 그녀가 최초로 이야기가 아니라 논리와 구조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또한 소설가로서의 데뷔가 늦어지게 된 이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즉, 자신의 가슴속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사소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
연애 감정은 있어도 자칭 ‘잡념이 너무 많고’ 새침했던 그녀는 집요하게 구혼하던 남자와 84년에 결혼했는데 훗날 남편 된 이 역시 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비틀즈와 김수영 시인에 관한 한 뭘 물어봐도 대답할 줄 아는 남자였다. 어느 날, 그녀의 하숙집에 놀러 온 남자가 두고 간 존 레논의 『모반의 카리스마』를 읽으면서 ‘이 남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를 알려 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게 결혼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 전 은희경을 위해 김수영의 ‘사랑시’에 붙여서 노래를 직접 지어 불러줬다. 아깝게 죽어버린 김수영의 흑백사진들과 너무나 애절하게 어울리는 시니까 잠깐 인용하고 넘어가겠다.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서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87년 스물여덟에 그녀는 이미 두 연년생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는데 그때는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고독했었다. 당시 그녀의 독서는 이미 술꾼으로 주위에 명성을 날리던 남편이 밤사이에 흘리고 간 책들을 주워 읽는 정도였는데, 이를테면 아이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무릎에 홍명희 『임꺽정』을 올려놓고 읽으며 ‘이런 걸 읽고 있어야 사람 사는 맛이 날 텐데.’ 한숨을 쉬며 막막하게 단절된 기분이었다 한다.
“제 데뷔가 95년이에요. 결혼 이후 10년 정도 단절이 있는 셈인데 그땐 잡념이 (그녀는 자신을 설명할 때 잡념이란 말을 숱하게 반복했다.) 사유로 바뀌는 순간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지금의 사고방식들이 그때 많이 생겨났어요. 전업주부로서 굉장히 무력했고 생각할 시간은 너무나 많았고 그동안 읽고 만들어낸 머릿속의 세계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느꼈고 그때의 그 안간힘이 나중에 정말로 소설 쓸 때 도움이 되었어요. 어느 정도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의 독서가 정말로 재산이 되는 건 그게 현실과 맞붙으면서였죠.”
한 세계와 다른 한 세계가 만나 충돌을 일으키느냐, 혼합이 되느냐? 사실은 이게 경계에 몰려본 인간이 유일하게 주목해야 할 지점일지도 모른다. 은희경의 경우,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혼합되었다!는 것은 그녀의 첫 소설 『새의 선물』이 바로 비밀 가득한 열두 살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데서 알 수 있다. 95년에 문학동네 장편상을 탄 『새의 선물』은 한국문학사상 가장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열두 살 소녀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 중절한 이모를 위해 삶은 계란 껍데기를 벗겨주며 “이모 먹어, 오늘 수술했잖아.”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줄 아는 소녀.
그녀는 아직도 책을 쓰는 일을 책을 사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비밀과 거짓말』을 쓸 때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샀다. 단편을 쓸 때는 파트릭 모드리아노의 책들을 샀다. (파트릭 모드리아노의 책들이야말로 읽고 난 뒤 사람의 눈동자를 깊게 해주는 책들이란 걸 꼭 밝히고 가고 싶다.) 첫 책을 쓰던 그 해,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인생이 바뀌지 않을 거’란 절박한 느낌으로 소설을 쓰러 집을 나설 때 그녀가 갖고 갔던 책은 세 권이었다. 쿤데라의 『느림』과 칭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그녀의 이 말을 들었을 때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을 뻔했는데 이 세 책들 중 특히 뒤의 두 권은 한동안 나를 휩쓸고 갔다 말해도 좋을 만큼 매료된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곳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던 우포늪에서 읽었던 『백년보다 긴 하루』의 명장면들이 와락 떠오른다. 우리는 언제 영웅이 되는가? 사랑할 때 영웅이 된다, 라고 말해주는 책. 아랄해와 스텝과 눈 내리는 부란노 부란노 역과 밤새워 치워도 치워도 사라지지 않는 눈과 낙타와 우주선까지. 그리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장면들, 한밤 긴 소파에 누워서 쌍둥이가 서로를 단련시키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뺨을 때리던 장면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움켜잡고 나는 누구를 때려야 하나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던 일, 한 쌍둥이가 아버지의 시체를 밟고 국경을 넘던 장면, 결국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살아남는다, 라고 말하는 장면. 아코디언을 들고 붉은 노을 지는 광장 쪽으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장면.)
은희경은 『느림』을 읽고 자신 안에 있던 이야기를 어떻게 소설로 묶어낼 수 있나 단서 같은걸 찾아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은희경과 쿤데라 사이엔 놀랍게도 공통되는 단어가 있다. 그건 바로 ‘농담’이다. 이때의 농담은 유머가 아니다. 이때의 농담은 삶이 의도와는, 생각과는 다를 때 할 수 없이 일어나 추는 춤 같은 것이다.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엔 문이 있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같은 것을 속으로 생각하면서 추는 춤 말이다.
나는 『느림』을 95년에 읽었다. 물론 『느림』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천천히 걸으며 소박하게 살자고 말하는 책이 절대로 아니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보자.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실존 수학에서 이 체험은 두 개의 기본 방정식 형태를 갖는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쿤데라는 책의 끝 부분에선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는 속도 때문에 망각하는 게 아니라)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도대체 뭘 그렇게 잊고 싶은 걸까? 느림은 기억하고 싶은 것에 비례하고 빠름은 잊고 싶은 것에 비례한다는 말은 얼마나 몸의 운동에 정직한가?
|
나 개인적으로 『느림』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키스를 청하는 기사의 말에 쉽게 응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론을 대며 결국은 유혹임에 분명한 앙탈을 부리는 귀부인을 두고 쿤데라가 한 말이다.
한낱 입맞춤을 저항 행위로 탈바꿈시킬 때 누구도 그 말에 속을 리 없고 그야 기사도 마찬가지이나 그런데도 그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정신의 한 행보에 속하고 그 행보에 정신의 또 다른 행보로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이게 다른 사람의 속 보이는 빤한 말에 대응하는 느림의 방식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정신의 한 행보임을 읽어내는 순간, 나는 한 발자국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경계 없는 경계적 존재가 된다.
데카르트는 독서를 대화라고 말했지만 프루스트는 독서는 대화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혼자 남은 상태에서 고독 속에서만 발휘되고 대화가 시작되면 이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적 능력을 계속해서 누리는 상태에서 다른 사유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독서는 우리를 자극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장 그르니에가 말했듯이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 독서”인 셈이다. 은희경은 그걸 보여준다. 읽었던 것들의 지혜가 끝나는 순간의 새로운 깨달음이 그녀식의 독서다.
'스크랩 > 사람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태춘 (0) | 2007.12.06 |
---|---|
신경숙 - 한 시절의 순수를 찾아서 자기 자신을 소모해버린 끝의 긍정 (0) | 2007.11.22 |
변영주 - "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 (0) | 2007.11.07 |
[길에서 만난 세상] 무서운 쓰레기, 두려운 새벽 거리 (0) | 2007.10.19 |
'민주적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 (0) | 2007.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