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로큰롤의 전설’ 탄생하다
세상을 바꾼 노래 17. 엘비스 프레슬리의 <댓츠 올 라이트>(1954년)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출처 : <한겨레> 2008년 03월 06일
» <That's All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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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로큰롤에 관해서라면 “역사적 진보는 불복종과 반항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정의가 진리에 가깝다. 인종에 대한 우열의 잣대가 엄존하던 시절 흑인의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백인 청소년들의 태도가 그랬다. 본능이 원하는 바를 규범으로 제어하기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솔직하게 인정했던 것이다.
프로듀서 샘 필립스(1923~2003)는 그런 정황에 공감한 극소수의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50년, 뒷날 선 레코드사의 기반이 되는 ‘멤피스 레코딩 서비스’를 설립한 이래 필립스는 흑인 뮤지션의 블루스와 아르앤비를 녹음하고 제작하는 일에 전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흑인처럼 노래할 수 있는 백인을 찾아낸다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대 사회의 변화와 그 한계를 간파한 선견지명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1953년의 어느 여름 날, 엘비스 프레슬리가 선 레코드사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샘 필립스의 예견은 현실로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트럭운전사로 일하던 18살의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는 어머니에게 선물할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선 레코드사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이날 샘 필립스는 자리에 없었다. 하마터면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그 진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이날 엘비스는 두 곡을 녹음했는데, 필립스의 비서였던 마리온 케이스커가 그를 눈 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지점이었다.
당초 엘비스 프레슬리가 노래한 곡들은 평범한 발라드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발견한 필립스가 연락을 취했고 두 사람은 녹음세션에 들어갔다. 1954년 늦봄이었다.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필립스에 따르면, 이후 몇 주간 발라드에서 컨트리와 블루스까지 수많은 곡을 함께 녹음했지만 어느 것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전설로 변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과 없는 세션에 지친 휴식시간, 엘비스가 갑자기 마이크를 들고 겅중겅중 뛰더니 아서 크루덥의 ‘댓츠 올 라이트’를 부르기 시작했고 연주자들이 자연스레 거기 동참하면서 저 유명한 레코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건은, 비평가 제임스 밀러에 따르면, 7월 4일을 전후해서 일어났다고 한다. 마치 미국 현대사의 문화적 독립기념일을 선포하듯이 말이다.
전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 속에 담긴 함의마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롤링 스톤>이 공언한 바대로 이 곡이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였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대중음악의 역사가 이 노래 ‘댓츠 올 라이트’를 기점으로 분기한다는 사실이다. 유투의 보노는 엘비스가 “사람들이 세상을 느끼는 방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그것은 비단 50년대의 미국 사회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이 노래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선입견을 격발시키고는 보다 나은 무엇으로 그것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로큰롤의 진보는 그렇게 엘비스의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하여 젊음의 거대한 도약으로 이어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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