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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리처드의 〈투티 프루티〉 - '로큰롤의 문법'을 쓰다

by 내오랜꿈 2008.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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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젊음 ‘로큰롤의 문법’ 쓰다
세상을 바꾼 노래 18. 리틀 리처드의 〈투티 프루티〉(1955) 

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출처 : <한겨레> 2008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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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 리처드의 〈투티 프루티〉(1955)

리틀 리처드의 <투티 프루티>(1955) 

“어-왑-밥-어-루-밥, 어-롭-뱀-붐.” 의미 없는 음절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 구절에 대해 비평가 데이브 마시는 “록의 우주적인 의문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다고 했고, 닉 콘은 “로큰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요점정리”라며 대중음악사를 다룬 주요 저작으로 꼽히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또 혹자는 그것이 드럼 연주를 본뜬 스캣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난삽한 거리의 언어를 얼버무린 것이라고도 했다. 진의가 무엇이건 그 자체로 로큰롤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아이콘적인 일성이 된 그것은 리틀 리처드의 노래 <투티 프루티>를 여는 첫 구절이다.

1955년 리듬 앤 블루스 차트 2위, 전체 팝 차트 17위까지 오른 <투티 프루티>는 리틀 리처드(1932~)의 첫 번째 히트곡이었다. 스타덤을 향한 고속열차의 티켓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로큰롤 판테온의 입장권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리처드는 무명에 가까웠다. 이미 1951년부터 음반을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뒷날의 한 인터뷰에서 리처드는 “당시 흑인 관객들은 블루스를 더욱 선호했다”고 말했다. 만약 로큰롤의 시대가 오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영웅을 낳는 법이다. 흑인음악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져 나오던 시기, 로큰롤이 새로운 음악적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리틀 리처드는 백인 청소년들한테 발견되었다. 그의 선구적 행보가 비로소 동시대의 관심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투티 프루티>는 전례가 없는 엄청난 템포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결합된 곡이었다. 리틀 리처드는 피아노를 부술 듯이 건반을 두드렸고, 야성적인 샤우트와 교성 같은 팔세토를 번갈아 노래했다. 게다가, 이탈리아어로 “온갖 과일”을 뜻하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그 노랫말은 성적인 은유들로 위험수위를 넘실거렸다. 그 모든 양태가 욕망의 분출구이자 젊음의 언어로써 로큰롤의 문법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리틀 리처드가 가져온 문화적 충격은 비단 음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외모와 의상과 무대 액션과 성 정체성이 모두 전대미문의 종합세트였다. 덕테일로 치켜세운 머리와 짙은 메이크업이 그랬고, 번쩍거리는 수트와 갖가지 보석 장신구들이 그랬으며, 피아노 위에 뛰어오르거나 발굽으로 건반을 두들기는 연주가 그랬다. 더불어 그는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애자 뮤지션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인기의 절정에서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대중으로부터 사라진 결정에서조차 선구적이었다. 그래서 음악사학자 아놀드 쇼는 1974년 펴낸 책에서 제리 리 루이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센세이션이 리틀 리처드가 이미 선보인 것들의 재현에 불과했다고 썼다. 쇼가 생존하여 다시 평가를 내릴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 목록에 하드 록과 뮤직비디오와 힙합까지 포함시켰을 게 분명하다.

오늘날 리틀 리처드는 몇 안 남은 ‘살아 있는 전설’로 대접받고 있지만 그 위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에 불과하다. 1962년 영국에서 열린 그의 컴백공연 오프닝 밴드가 비틀스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그 이듬해의 영국공연 오프닝은 롤링 스톤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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