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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 - ‘이유없는 반항’의 노래, 로큰롤 빅뱅

by 내오랜꿈 2008.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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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없는 반항’의 노래, 로큰롤 빅뱅
[세상을 바꾼 노래] ⑮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4년)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8 02 14 / 2008 02 21 





»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이 삽입된 영화 <폭력교실>(원제 <블랙보드 정글>) 포스터.

로큰롤이라는 명칭을 누가, 언제 처음 사용했는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애초 뒷골목을 떠돌던 은어가 시간의 검열을 통과하며 양성화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최초의 인물이 앨런 프리드였다는 사실이다. 클리블랜드의 라디오방송 디제이였던 그는 전향적인 태도로 흑인음악을 백인대중에게 소개한 선구적 인물이었는데, 리듬 앤 블루스에 담긴 인종적 선입견을 누그러뜨릴 대안으로 로큰롤이라는 표현을 차용했다. 1951년, ‘문독 로큰롤 파티’로 개명한 그의 프로그램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로큰롤이라는 명칭 또한 폭넓게 인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앨런 프리드는 또한 최초의 대규모 록 콘서트를 기획하고 개최한 인물이기도 했다. 1952년 3월 21일, 일만 석 규모의 ‘클리블랜드 아레나’에서 펼쳐진 <문독 코러네이션 볼>에는 흑백을 아우르는 2만5천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는데 제한된 좌석을 차지하려는 관객들의 몸싸움으로 폭동에 가까운 혼란이 야기됐다. 출입구와 유리창이 모조리 파손되는 상황에서, 경찰의 제지에 따라 공연은 단 한 곡만을 연주하고 막을 내려야 했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비평가 마크 페이트리스는 당시의 해프닝이 “사상 최초로 로큰롤을 신문 헤드라인에 올린” 사건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더욱 주목할 사실은 그런 야단법석조차도, 결과적으로, 다가올 충격에 비하면 가벼운 기시감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불과 3년 후,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반응은 전대미문인 동시에 전세계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는 1955년 로큰롤로서 사상 최초로 팝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곡이다. 본래 1954년 녹음되었으나 당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잊혀졌던 이 노래는 이듬해 3월 개봉한 영화 <폭력교실(원제는 <블랙보드 정글>)>의 시작 장면에 삽입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킨 영화와 함께 인기가 동반상승한 것이다. 그 결과 이 곡은 초여름 무렵 차트 정상을 정복했고, 궁극적으로는 로큰롤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록 어라운드…>와 <폭력교실>이 만들어낸 시너지가 괄목할 만한 것은 로큰롤과 할리우드의 결합을 통해 청소년 하위문화를 수면 위로 분출시킨 지각변동이었다는 점에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전조는 진작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제이디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사춘기 소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었고, 말론 브랜도 주연의 영화 <와일드 원>(1954)은 청소년 갱단의 폭력을 화두로 삼았다. <폭력교실>보다 7개월 뒤에 공개된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 또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다루어 거대한 성공을 거뒀는데, 그 제목은 심리학자 로버트 린드너가 이미 1944년에 발간한 해당 소재의 동명 저서에서 빌어온 것이었다.

로큰롤의 등장과 성공은 청소년의 급부상이 가져온 사회변화 과정의 산물이었다. 바야흐로 전세계의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들은 이제 ‘동세대의 송가’를 갖게 된 것이다.

»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4년)

청소년 문화의 탄생과 로큰롤의 부상 사이 상호연관성은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에서 양립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이다. 경제성장과 베이비붐이 일으킨 시너지가 버팀목이었다. 그로써 여가시간과 여윳돈을 갖게 된 50년대의 미국 청소년들은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의 본능을 완벽하게 체현한 인류 첫 세대로 등장했던 것이다.

빌 헤일리(1925~1981)는 그 같은 변화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일찍 감지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본래 컨트리 뮤지션이었다. 그러나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까지 지방 라디오방송국의 디제이로 일하며 젊은 백인대중의 음악적 취향이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3살 때부터 돈을 받고 노래 부르는 일을 시작한 베테랑이었음에도 헤일리는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다. 1951년부터 그는 트레이드 마크이자 클리셰였던 카우보이 모자를 벗어 던지고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에 천착했다. 그러므로 헤일리가 처음 녹음한 흑인음악 넘버가, 샘 필립스로부터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라 일컬어졌던 재키 브렌스튼의 <로켓 88>이었다는 사실은 필연적 상징성을 갖는다.

비평가 닉 토스키스는 이 시기의 빌 헤일리를 <록 어라운드 더 클락>으로 ‘대박’을 터뜨린 이후의 그보다 높게 평가했다. 그는 헤일리가 “로큰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2년쯤 전에 이미 로큰롤 역사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멤피스 슬림, 지미 프레스턴, 조 터너 등 흑인 뮤지션의 곡들을 자신의 음반에 담아냄으로써 빌 헤일리가 로큰롤에 대한 주류 백인관객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엘비스가 등장할 무대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빌 헤일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과 함께 과거의 인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록 어라운드…>가 청소년들을 열광시키고 있던 무렵에 이미 헤일리는 삼십대로 접어든 세 아이의 아빠였다.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어법과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성세대였다는 것이다. 비평가 닉 콘은 그것이 “잔인한 반전”이었다면서도 헤일리가 본인이 만들어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썼다. 실제로 헤일리는 1955년 발간한 악보집에서 “우리는 컨트리 음악에 사용하는 악기로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고 그 결과로 ‘팝 음악’이 나왔다”고 말했다. 맙소사! 정작 그는 자신이 본격 로큰롤의 시대를 개막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따지고 보면 <록 어라운드…>와 빌 헤일리를 둘러싼 모든 정황이 과도기적 혼재 양상이었다. 청소년 비행에 대한 염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 <폭력교실>이 정작 문제의 원천으로 지목된 로큰롤을 배경음악 삼은 것이 그랬고, 그 결과로 극장마다 청소년들이 폭동에 가까운 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로큰롤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이 그랬다. 로큰롤에 대한 청소년의 열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지속될 로큰롤에 대한 기성세대의 몰이해도 빌 헤일리와 <록 어라운드…>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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