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인문사회

『정치의 전복-1968년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 - 사랑과 삶 그리고 혁명

by 내오랜꿈 2007. 9. 14.
728x90
반응형

사랑과 삶 그리고 혁명

카치아피카스, 『정치의 전복-1968년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바리케이트, 각목, 입맞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의 한국어판 표지 그림.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의 확산 현상=에로스 효과.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을 즐긴다=1968년 5월의 구호…. 그리고 혁명의 순간들은 흔히 말하는 정치에서의 소외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치를 에로스화한 순간들이었다고 선언하는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생각을 시각화한 이 사진 한 장. 그 이미지는 여전히 생생하다. 빗속에서 진행된 우드스탁 페스티벌, 그 벌거벗은 몸과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로 울리는 절규도 다음의 말과 함께 선명하다.

“상상력이 실용성을 대체하고, 협동과 존엄성이 인간의 경쟁심과 냉담함을 대체함으로써,고된 일은 놀이로 되어간다!”

파리에서 버클리까지, 베이징에서 프라하까지, 맑스에서 마르쿠제와 사르트르까지, 체 게바라에서 지미 헨드릭스까지, 그리고 기억되지 않는 베트남 정글의 수많은 전사들에서부터 바스티유 광장과 시카고 공원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까지,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1968년 신좌파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어 사회과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평가받는 『신좌파의 상상력』의 저자가 이제는 ‘1968년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이라는 부제를 단 『정치의 전복』으로 自明性의 허위에 길들여진 우리의 의식을 다시 한 번 타격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실천하기엔 만만치 않은 인식이 ‘자율성’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정치의 전복-1968년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

기존의 거대권력과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정치의 전복을 꿈꾸는 자율적 사회운동 또는 아우토노미아의 목표는 무엇인가.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자율적 사회운동의 전개 양상을 서술한 후, 카치아피카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율적 사회운동의 목표는 정치의 전복이다. 즉, 국가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시민생활의 탈식민화이다. 직접민주주의를 창조하려는 열망과 일인칭의 정치에 기반하여 자율적 사회운동들은 거대한 정부들과 기업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부과하려는 구실로 삼는 통제중심의 허위의 보편성에 반대한다. 정치의 전복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의미할 것이다. 아테네나 플로렌스 시민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많은, 미국혁명이 전망하고 간직한 것보다 더 많은, 전에 가능했던 것보다 질적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의미할 것이다."

욕망마저 자본의 논리와 권력에 의해 균질화해버린 상황을 ‘삶의 식민화’라 부를 수 있을 터이다. 이러한 식민 상황에서 일상생활과 시민생활의 탈식민화를 지향하는 ‘정치의 전복’은 우리의 의식에 내면화되어 있는 식민성을 자각하고 이를 타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식민성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권력의 그물이 지금 여기에서의 이대로의 삶을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향한 열정과 본능(에로스)은 질서와 규율이라는 이름 아래 길들여진다.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슬로건이 우리의 몸과 의식 구석구석에 하도 깊이 각인되어 있다. 아름다운 질서란 늘 폭력을 동반한다는 사실마저 자각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자율적 사회운동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카치아피카스뿐만 아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디오니소스의 노동』)와 펠릭스 가타리(『분자혁명』)도 각각의 방식으로 획일화와 식민성을 강요하는 거대권력과 정치의 허위성을 비판하고 있으며, 활자를 띠고 있는 일련의 NGO 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NGO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은, 카치아피카스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확대하는 데 결정적일 뿐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율적 사회운동은 우리의 전망을 명료하게 해주고 이전 시기로부터 우리가 이어받은 왜곡된 이미지들을 제거하도록 돕는 렌즈이기도 하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삶이나 사고방식이 사회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도 어렵다. 사회는 얼마든지 그 구성원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수많은 혁명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어떤 성격의 권력에 의해 조작되는지를 자각하고 그 허위와 기만을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에서 혁명의 이미지가 반드시 핏빛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카치아피카스가 말하듯이 자율적 사회운동은 충분히 혁명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삶과 타자의 삶을 다 함께 인정하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물론 사랑은 항상 투쟁을 대가로 요구한다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으리라.

정선태 「사랑과 삶 그리고 혁명」,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