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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당신 - 박중훈
<씨네21>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영화평론가가 말했었다. <라디오스타>를 두 번 보고 나니 영화가 조금 다르게 읽혀졌다고. 나름대로 재미있게 본 영화였기에 다음에 다시 한 번 봐야지 하다가 며칠 전 비디오를 빌려 다시 보게 되었다. 쌍팔년 가수왕 출신이지만 이제는 라이브 까페에서 옛추억과 자기 연민을 양식 삼아 버티는 최곤(박중훈), 아직도 그런 최곤을 떠나지 않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이야기 <라디오스타>. 이준익 감독의 두 전작 <황산벌>과 <왕의 남자>가 지나간 역사 속 ‘敗者’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라디오 스타>는 동시대 ‘아웃사이더’의 이야기다. 한물간 스타와 그를 20년 동안 할 짓 못 할 짓 해 가며 뒷바라지해 온 매니저, 이 두 주인공들 못지 않게 조역들도 변두리적인, 패배적인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것.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PD를 맡은 강석영은 아이돌 스타를 씹은 뒷담화가 방송사고로 연결돼 원주에서 영월로 쫓겨 왔고, 영월지국장은 원주와의 통폐합만을 기다리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이들 인물들의 지난하고 팍팍한 삶의 무게를 냉철하고 깊이 있게 담아낸다거나, 구질구질한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막판에 값싼 감동을 강요하거나 하는, 상투성 짙은 멜로드라마 서사구조를 따르지도 않는다. 낡은 건 이야기를 엮어가는 소재이지 이야기 자체가 아니기에. 또한 <라디오스타>는 디지털 시대에 라디오를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사라져가는 옛 매체의 향수에 대해 말하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준익의 전작 <황산벌>이나 <왕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좁은 스튜디오 DJ박스 안으로 다방 종업원, 철물점 주인, 중국집 배달원, 백수, 고스톱 치는 할머니, 꽃집 총각, 농협 직원 등 동시대 아웃사이더들을 불러들여 관객도 덩달아 함께 따라들어가 놀게 만드는, 열린 마당극을 만들어 낸다. 스튜디오 안으로 자장면과 커피를 배달시키고 배달 온 그들을 마이크 앞에 앉히기도 하는 최곤, 그런 난장판에 가까운 행동에 마치 일상의 일인 양 호흡을 맞춰주는 그들.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이 절로 스며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눈물로 변한다. 역전다방 미스김이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에 출연해서, “엄마가 미워서 집 나온 게 아니야, 엄마 보고 싶어, 왜 엄마가 해주던 파전 맛이 안 나는지 몰라” 하는 대목은 우리 모두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곤 역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비단 최곤 뿐만이 아니라 강PD, 영월지국장 등도 마찬가지다. 라디오 방송의 시작과 더불어 영월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단순히 아웃사이더들의 유배지가 아니라 따뜻한 주변인들과 진정성과 자연이 있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최곤의 멘트는 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동안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민수 형은 그때도 저렇게 월수가방을 꼭 껴안고 다녔지만 지금보단 훨씬 얼굴이 좋았더랬습니다. 어디든 저를 부르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그렇게 거드름 피울만도 했었죠. 솟아오르던 인기를 만끽하던 88년도, 마침내 저는 가수왕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인기야 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말을 아십니까? 달은 차고 나면 기운다는 말 말입니다. 제 인생이 딱 그랬습니다. 더이상 올라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내려오는 일만 남았더군요. 그동안의 성공에 취해 있던 저는 그 와중에도 기고만장했더랬습니다. 쉽게 재기할 수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넓은 체육관을 가득 메웠던 여고생들이 점점 콘서트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죠. 콘서트를 열기는커녕 TV에 나가기조차 어려워졌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세상 일이란 다 그렇더군요. 그래도 저는 믿었습니다. 마법의 사다리가 저를 저 위로 실어나를 거라구요. 하지만 모든 일이 기대대로 되지 않았고 그동안 분출되지 못했던 저의 분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주위 물건을 부숴댔지요. 나중에는 대마초에까지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만사를 모두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찰나랍니다. 마치 인기란 것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영월에 왔습니다. 영월, Young World.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곳으로 안성맞춤 아닐까요? 예전처럼 노래를 부르진 않지만 라디오 DJ 일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부턴 제 방송을 영월에서만 트는 게 아니라 전국방송으로 쏜다더군요. 그래도 가끔씩 울적한 생각이 들 때면 저는 이스터리버, 아니 동강 밴드의 공연을 슬쩍 보러 가기도 합니다. 장훈이를 비롯한 후배 가수들이 이빨 빠진 호랑이인 저를 저버렸다지만, 동강 밴드 얘네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저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거든요. 아, 그만하고 전화나 받으라구? 저 밖에서 강 PD가 전화 연결을 하겠다고, 신세한탄은 이만 접으라는군요. 하여간 능력없는 PD들이 꼭 전화 연결을 좋아한단 말야. 강 PD 말론 모두 제 팬이며 저만큼 기구한 사연을 지닌 사람이랍니다. 그럼 여기서 전화를 연결하겠습니다. 아, 여보세요?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이런 잔잔한 감동, 진실한 이야기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촌스럽다는 것이다. 매니저 박민수의 말대로, 별은 혼자 빛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빛을 비춰줘야 빛이 나게 되는데, 세상은 이런 잔잔한 감동, 진실한 이야기들을 크게 조명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멋있고 폼나는 인생에만 눈높이를 맞춘다. 영화 <라디오스타>에는 보고 싶은 엄마를 못 보게 만든 가난이 웬수인 역전다방 김양, 한 번 튀어보고 싶은 동네밴드 ‘이스트 리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 해 발을 동동 구르는 꽃집 총각, 몇백 원짜리 고스톱 판에서 아웅다웅하는 노인네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의 희로애락이 우리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고픈 모습으로. 마치 마지막 장면의 '스톱신'처럼..... 쌀쌀한 주말, 별다른 계획이 없다면 볼륨을 크게 높이고 <라디오스타>를 빌려보는 것은 어떨지. 2007년 2월 2일 여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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