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있는 일이지만, 언젠가 하룻밤에 4편의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대체로 만만치 않은 4편의 영화 [브랜단 앤 트루디], [프린스 앤 프린세스], [야드비가의 베개], [스털링 뷰티](웃기는 건 베르톨루치 감독의 이 작품이 전혀 엉뚱하게도 [데미지2]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어 있다. 한국 비디오 업계의 '황당한' 현실을 보는 것 같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역시 [브랜단 앤 트루디].
학생 이름 부를 땐 매번 틀려도 영화라면 흑백 영화와 제3세계 영화까지 줄줄 꿰지만 학교와 성가대만 왕복하며 사는 내성적인 남자 브랜든. 하지만 팝바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트루디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두 사람은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처럼 거리를 질주하기도하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대담하고 짜릿한 사랑의 행복을 만끽한다. 지루한 일상에 활기를 얻은 브랜단에겐 행복한 동거의 나날이 이어진다. 그러나 몬테소리 교사라고만 알고 있었던 트루디는 밤이면 자다말고 일어나 새벽까지 나다니고 집안에선 곳곳에 흉기와 복면이 나뒹군다. 때마침 TV에선 남성들이 잇달아 복면 여강도에게 거세당한 사건이 보도되고... 브랜단의 그 황당한 표정.....
하지만 그녀는 귀여운(?) 좀도둑이다. "그래 내 직업은 도둑이다. 재밌어, 너도 해볼래?" 트루디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만 브랜단은 이미 그녀의 거침없는 매력에 빠진지 오래다. 그래 이제부턴 '네 멋대로 해라'. 장 폴 벨몽도가 따로 있나? 50년대 중절모를 쓴 브랜든은 닥치는대로 훔친후 트루디의 손을 잡고 도망다닌다.
어쩌면 이 영화는 공황기 절망의 상징이었던 [내일을 향해 쏴라]가 아니라 기성체제에 대한 반항의 상징이었던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모델일 것이다.
실연을 당하면 [선셋대로]의 윌리엄 홀덴이 돼 빗속에 쓰러지고, 홀로 돌아설 땐 [수색자]의 존 웨인처럼 한 팔을 흐느적거리며 기우뚱 거린다. 브랜단과 트루디는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모험과 사랑을 한꺼번에 얻은 선장 험프리 보가트와 선교사 캐서린 헵번이 부럽지 않다. [꼬마돼지 베이브] 흉내를 내며 섹스를 하기도 하고, "데드맨 워킹!"이란 학생들의 고함을 들으며 복도를 걸어 교장실로 소환당한다. 마침내는 자기 학교의 컴퓨터를 훔치기 위해 [메트릭스]의 첫장면을 따라 옥상과 옥상을 뛰어넘다 덜미가 잡힌다.
감독은 쉴새없이 고전영화의 장면들을 차용하거나 흉내내거나 브랜단이 영화 보는 장면을 삽입해 줄거리를 이어나간다. 브랜단이 욕쟁이 노모에게 고다르 감독의 전기를 선물하고 조카가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책을 펼쳐들고 장난치는 것처럼 지나치는 소품조차 모두 영화광 작가가 거장들에게 바치는 경배의 표시다. 이 모든 영화적 현실이 브랜단의 지루한 일상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웃자고, 아니 웃기자고 하는 얘기다.
이 영화에서 압권은 돌연 교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어이 브랜단 선생, 이기 팝(iggy pop) 좋아해? 한 번 들어봐, 인생이 달라보인다구...." 가장 반항적인 음악인 이기 팝이 늙은 영국 젊은이들의 정신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브랜단이 트루디를 만나 얻은 것도 바로 정신의 풍요와 자유다. 더군다나 사랑을 통해 그것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물론 여기까지는 영화에 관한 나름대로의 몇 가지 지식을 전제로 하는 평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별다른 상식없이 보아도 눈에 확 띄는 아련한 사랑의 감정이 베어나온다. 보는 사람마다 물론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한쪽은 좀 바보스럽고 한쪽은 너무 확 튀는 분위기의, 그래서 어울릴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을 본다면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꿋꿋한 색깔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브랜단.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 성격이 바꿔져 가고 또 조금씩 맞춰져 가는...
아마도 감독은 우리들이 아름답게만 생각하고 멋있게만 생각하는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한 체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랑들이 있는데 가장 열악한 이런 류의 사랑도 다르게 보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말하려 했던 게 아닐까?
written date:2003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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