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코스 : 백무동 -->장터목 --> 천왕봉 --> 장터목 --> 백무동
길이 : 15KM
소요시간 : 8시간 30분
어수선한 장터목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 길 양편으로 군데군데 고사목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의 인생. 사람들의 눈에는 마냥 아름답게 보이는 이 풍경들이 사실은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재앙으로 생겨난 것이다. 1950년대에 지리산에는 벌목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이 제석봉 인근의 목재들을 도벌한 다음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놓았던 것. 못살았던 시절이고 생각 없었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어떤 행위들은 가끔씩 상상을 초월한다.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 쉴 새 없이 구름이 오르내리는 터라 수시로 천왕봉이 보였다 말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 천왕봉을 바라보며 우리가 오르는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천왕봉에서 기념촬영도 못 했다고 투덜거리면서.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다행인 건 내려오는 사람은 많은데 오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점심시간의 한가운데라는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장터목에서 주변 풍경 감상하며 걷기를 1시간. 드디어 천왕봉이다. 의외로 운무도 없고 바람도 약하다. 사람들도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동행한 이들 모두 천왕봉에서 이렇게 좋은 날씨를 구경한다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간단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표지석 주변의 바위에 걸터 앉아 말없이 주변을 둘러 본다.
쳐다보는 곳 어디나 모두가 그림 같다. 구름이 내 눈높이에서 천왕봉 주변에 둥그런 띠를 형성하고 있다. 카메라 렌즈가 제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눈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이 사진이 아니라 내 눈에 비친 천왕봉에서의 풍경을 재현해낼 수만 있다면 그걸 올리고 싶다. 그렇게 30분 정도, 사방을 둘러보고 앉아 있었다.
내 기억에 30년 전, 처음으로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여름에 추워죽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법계사에서의 하룻밤을 견디고 올라간 천왕봉은 사납게 불어대는 비바람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올랐지만 천왕봉은 나에게 이렇게 좋은 날씨와 여유 있는 감상을 허락했던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오래된 기억을 털어내게 만드는 날이다.
여유 있는 산행. 이번 산행을 주도했던 친구가 내세운 '컨셉'이었다. 매번 산에 가면 올랐다가 내려오기 무섭게 집으로 가는 길이 바빴는데 이번에는 좀 느긋하게 가을밤을 즐겨보자는 취지란다. 그래서 이번 2박 3일의 천왕봉 등반은 하루 산행에 이틀밤을 야영하면서 보내는, 그야말로 여유롭고 즐거운 산행이다. 그 여유로움의 절반은 시간이라기보다는 천왕봉이 나에게 허락해준 풍경 때문에 얻게 된 마음가짐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리산을 가슴에 품고 보내는 밤은 한없이 아름답다. 그 어떤 밤이 이를 대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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