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의 산들은 그리 높진 않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진 산들이 많다. 팔영산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 오르는 천등산도 철쭉 군락지가 있어 제법 유명하다. 고흥에 온 이후 천등산은 네 번째인데, 대부분 풍남항이 있는 송정마을 쪽에서 올라가는 일반적인 코스를 택했었다. 오늘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금탑사 코스다. 사실 이 코스로 산 정상을 올라가지 않았을 뿐이지 금탑사는 자주 왔던 곳이다. 절로 올라가는 길이 좋을 뿐 아니라 수백 그루의 비자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간단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금탑사로 오르는 길. 길 양쪽에 참나무들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어 주고 오른쪽으로는 계곡이 있어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갈 수 있다. 때가 때인지라 시멘트 포장길 위에 도토리가 수없이 떨어져 있다. 항상 등산보다는 '잿밥'에 관심 많은 '아줌마'가 도토리 줍는다고 덤빈다. 내려올 때 줍자며 등 떠밀어 올라가는 길이 너무나 시원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계곡길인데 마침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니 땀이 날 새가 없다.
금탑사 입구에서 포장도로를 벗어나 본격적인 산행길로 들어선다. 햇볕이 강한 날이라 눈만 내놓을 정도로 중무장 한 채 오르던 아내가 얼굴가리개를 푼다. 고흥의 산은 대부분 능선길이나 임도를 타고 오르는 겅우가 많기에 직사광선을 피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금탑사 코스로 오르는 천등산은 처음부터 정상까지 전부 참나무로 터널이 만들어져 있다. 진즉에 알았으면 여름에 자주 오는 건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 정상에서 바라본 녹동앞 바다. 자세히 보면 거금대교가 보인다.
▲정상에서 바라본 팔영산. 저 멀리 오목볼록한 봉우리가 팔영산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고흥만 방조제 들판, 바다 건너편은 보성이다.
▲ 정상에서 본 금탑사 전경과 비자나무숲. 금탑사를 둘러싸고 있는 짙은 색 군락이 비자나무숲이다
쉬지 않고 참나무 터널길을 걸은 지 1시간 10분만에 정상에 다다른다. 날씨는 맑은데 가시거리는 그리 썩 좋은 거 같지는 않다. 멀리 거금대교와 팔영산, 고흥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올라왔던 길 아래로 눈을 돌리면 금탑사가 한눈에 들어오고 비자나무숲이 금탑사를 에워싸고 있다. 우리한테는 정상에서의 풍경이야 자주 보았던 것이기에 한여름에도 마음 놓고 오를 수 있는 코스를 발견했다는 것으로 오늘 산행의 의미를 정리한다.
여기까지 와서 막걸리 한 잔 안 하고 갈 수는 없는 일. 점심까지 먹고 가자며 삶은 고구마와 밤, 삶은 계란까지 챙겨 왔다. 그기에다 김치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잘못됐다. 내가 억지로라도 아내를 산에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살 좀 빼라고 그런 것인데, 이렇게 먹고 도대체 살이 빠질까? 그렇다고 나만 먹을 수도 없는 일이고...
▲ 금탑사 극락전
▲ 금탑사 주변에 무리지어 핀 꽃무릇
▲ 금탑사를 에워싸고 있는 비자나무
등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우면서 천천히 내려오다 들른 금탑사. 너무나 익숙한 절인데, 오늘은 색다른 풍경이 우리를 반긴다. 바로 무리 지어 피어난 꽃무릇.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전 기억 속에서 이 모습을 떠올릴 수 없으니 아마도 우리가 이 철에는 처음인 듯하다. 극락전 올라가는 길에도 비자나무 아래에도 온통 꽃무릇이다. 때를 잘 만난 덕분에 눈이 호강하는 날이다.
경내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절에서 키우는 백구 한 마리가 길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몇 가지 이름을 생각나는대로 불러보며 오라고 손짓을 해도 도무지 다가올 생각을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 삼순이와 봄을 부르는 한 마디, '밥 무까?'를 해보았다. 이럴 수가? 꿈쩍도 않던 놈이 바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역시 '밥'은 세상 만물을 부르는 공통어다.
그렇게 3시간 여의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변한 게 없다. 저 넓은 주자창에 덩그러니 주차된 우리 차. 이 정도의 볼거리를 갖춘 산이 아마도 도회지 근교에 있다면 미어터지고도 남았을 터인데 산행길에서 만난 사람은 도토리 주우러 온 동네 할아버지 두 분 뿐이었다. 이러니 등산로 옆으로 두더지와 뱀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야 뭐 하나도 아쉬울 게 없다. 산이나 들이나 사람 많이 다녀서 좋은 거는 거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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