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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어웨이 프롬 허> - 사랑의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와 사랑의 기억을 붙잡고 싶은 남편

by 내오랜꿈 201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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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 <곰이 산으로 넘어오다>를 영화화 한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단편소설작가로는 처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대부분의 노벨문학상 작품들이 당해년도 수상 발표가 난 뒤에 작가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수상작이 출판되는데 반해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은 오래 전에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있다. 우리 시대의 체홉이니 어떠니 하는 저널리즘의 호들갑은 차치하고라도 그만큼 먼로의 소설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원작소설이 1931년생 노작가의 작품인데 반해 영화는 1979년생 젊은 여배우, 사라 폴리의 장편 데뷔작이다. 결혼한 지 44년된 노부부의 이야기, 인생의 황혼기에 맞이하는 질병이나 죽음 같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20대 중반의 감독(영화는 2006년 작품이다). 이 조합은 어딘지 어색해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게 과연 26살짜리 영화배우가 연출한 작품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원작소설보다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가 소설보다 '아우라'가 더 강한 장르라는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2.


영화는 결혼한 지 44년 된 부부의 '이별 아닌 이별'로 인해 벌어지는 일을 남편의 시선을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알츠하이머병이 깊어지는 것을 안 아내 피오나(줄리 크리스티)가 자청해서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피오나는 남편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영화는 이를 아프게 지켜보는 남편 그랜트(고든 핀센트)의 시점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랜트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건 그만큼 피오나와의 '이별'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 이별이 자신이 행한 과거의 '행적'에 대한 피오나의, 또는 인생의 복수는 아닌가 하는 아픈 회한 때문이기도 하다. 이 회한의 구체적 내용이나 깊이는 영화보다는 원작소설에 훨씬 더 잘 묘사되어 있다.


반면 영화는 이 '이별'의 아픔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피오나가 입원하기 전,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랜트와 피오나 부부의 생활은 정말이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광활한 설원에 둘러싸인 전원주택에서 스키로 산책을 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책을 읽어주고 식사를 하면서 서로만 이해하는 농담을 주고받고 밤이면 여전히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다정한 손길 같은 것들. 


예를 들면 스웨터를 언제 빨았느냐는 피오나의 물음에 “전쟁 직후였는데 그게 50년대였던가 60년대였던가”라는 그랜트의 대답에 환한 웃음을 보이는 피오나의 모습. 물론 이것은 "7:00 요가, 7:30~7:45 양치질, 세수, 머리, 7:45~8:15 산책, 8:15 그랜트, 아침 식사" 같은 일정표를 적은 노란 메모지가 집 안 여기저기에 붙어가거나 부엌 서랍마다 "식기, 행주, 칼"이라고 쓴 메모를 붙여두는 등의 행동을 하는,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피오나에 대한 배려에서 나오는 농담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이런 농담들을 하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피오나의 상태는 악화되어 간다.



3. 


드디어 자신의 알츠하이머병을 자각한 피오나는 탄식한다. “정작 그렇게 잊고 싶을 땐 안 잊혀지더니...” 이건 뭐랄까?, ‘삶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인생은 쉽게 잊어먹고 쉽게 포기하고 삶의 굴곡에 대항하려 하지 않는 편이 좀더 잘 견딜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한 조각 한 조각 사라져가는' 상황에 처한 피오나는 오히려 그랜트를 설득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에 들어가겠노라고. 만류하는 그랜트를 설득하는 피오나의 단호함은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두 사람의 엇갈린 행보를 미리 암시하는 듯하다. '사랑의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와 사랑의 기억을 붙잡고 싶은 남편'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그곳에 가는 것을 고려한다 해도 장기 입원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그랜트의 바램과는 달리 요양원의 규정상 면회가 금지되는 한 달만에 피오나는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다'. 한 달 뒤 그랜트가 처음 방문했을 때 피오나는 이미 새로운 남자 곁에서 그랜트를 마치 새로 입원할 환자를 보는 것처럼 정중하게 맞이한다. 그랜트의 입장에서는 피오나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것도 억울한데, 아내와의 사랑도 잃어버릴 판이다.


4. 



이제부터 영화는 그랜트의 번뇌와 회한이 오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현재의 시점에선 그저 시간의 흐름을 덤덤히 바라보는 듯한 타인의 시선으로, 과거의 시점에선 현재의 번뇌와 회한의 내용을 곱씹어내는 그랜트의 시선으로. 아마도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피오나가 아니라 그랜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피오나의 속내야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랜트의 회한과 번뇌는 영화 내내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지켜보게 되니까. 이미 함께 한 세월을, 잃어버린 사랑을 되돌리려는 그랜트의 아픈 몸부림들과 함께.


이 과정에서 그랜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요양원 간호사인 크리스티로부터 듣게 된다. 그랜트가 "우리 부부는 40년 넘게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살았는데 지금 왜 이런 시련을 겪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크리스티는 냉정히 말한다. "그게 아니라 누군가가 견딘 거" 아니겠느냐고. 지금 당신들이 겪는 문제는 당신 말대로 40년 넘게 잘살아왔다는 점에서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남편도 없이 아이 넷을 키우는 자신의 처지에서 볼 때 당신의 불평은 한낱 어린애의 투정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랜트의 안따까움은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의 사치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이다.


5. 



꼭 이 영화를 봐서도 아니고, 미래를 앞당겨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는 게 ‘치매’라는 병리적 현상 아닐까? 우리가 삶의 전과정을 통해 애써 성숙시켜 놓은 자아가 한순간에 무너져 평생의 정신적 자산을 잃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겠는가. 우리가 삶의 전과정을 통해 애써 만들어놓은 인간관계의 망이 헝클어져 원한과 악의만 기억하는 상태가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물론 이 영화의 피오나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알츠하이머에 비하면 우아한 예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남편에게 부담이나 위험이 될까봐, “그때가 온 거야”라는 말을 하며 스스로 요양소 입원을 결정할 정도로 ‘이성적’인 모습이니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어웨이 프롬 허>는 알츠하이머를 심각하고 무겁게 다루지는 않는다. 주변인의 고통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는 측면에선 오히려 현실보다 너무 가볍다. 가볍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먼저 피오나를 연기하는 줄리 크리스티의 노년의 아름다움이랄까? 이 피오나의 모습에서 <닥터 지바고>의 ‘라라’를 연상하라고 한다면 40년의 '시간터널'을 등한시하는 무리한 요구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닥터 지바고>의 '라라'와 <어웨이 프롬 허>의 '피오나'는 4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만큼이나 '우아하고 고혹적으로' 늙은 것 같다.


6.


그외 인상적인 대사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바래요. 날마다 사랑받고 사랑하길 원해요. 무슨 의무같이."(피오나가 그랜트에게)


"그냥 이게  인생인 거죠. 삶을 우리가 이길 순 없잖아요"(매리언이 그랜트에게)


이 대사들이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이 말들의 무게를 새삼 더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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