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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걸어도 걸어도> -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날카로운 생채기를 남기는 관계, 가족

by 내오랜꿈 201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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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언젠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에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

 

'가족'이라는 혈연적 관계에 대해 이처럼 서늘하고, 통찰력 있는 수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우리는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할 때마다 "가까이 있기에 소중함을 모른다"느니 "있을 때 잘 해" 같은 수사를 너무나 쉽게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희화화시키지만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족이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귀찮은 존재고 불편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은 귀찮고 불편한 존재인 '가족'의 의미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사람이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그가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따뜻한 감성을 지닌 존재로 그리고 있기도 하지만(대표적으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노력하는 얼치기 사무라이의 고군분투를 그린 작품, <하나(More Than Flower)>를 보시라),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들 속에서 그려지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러하다. 심지어 초등학교 고학년밖에 안 된 어린 아들에게 "엄마는 좀 행복해지면 안 돼?"라는 말을 하며 네 아이를 낡은 아파트에 방치한 채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떠나는 <아무도 모른다>의 비정한 엄마조차 어떤 때는 가슴 따뜻한 엄마이고, 애교 많은 여성이다. 흔히 말하는, 자기합리화일지언정 시대가 그렇고 상황이 그래서 어떤 '부족한' 선택을 하게 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모른다(2005)>로부터 시작해 <걸어도 걸어도(2009)>,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까지 그가 만든 가족영화에서 그려지는 캐릭터는 하나같이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내 형제자매 중 그 누구일 수도 있는, 그런 인물들이다.

 

 

 

 

2. 

 

나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 그 누구일 수도 있는 인물들이 나누는 조용하고 잔잔한 대사들 속에서 얼키고설킨 가족간의 감정들이 품어내는 날선 섬뜩함이 극한에 이른 형태로 표출되는 작품이 바로 <걸어도 걸어도(Still Walking)>다. 오래전에 먹은 생선 가시 하나가 소화되지 않은 채 위속 어딘가를 맴돌다 수시로 식도를 타고 오르는 듯한 되새김질의 고통을 안겨주지만, 그 되새김질 하나하나가 잘 정리되어 어디 한군데 허투로 쓰인 데 없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대사들과 화면으로 꽉 짜여진 영화인 것. 조금의 요란함이나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단 한 사람의 감정과잉 없이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족 구성원들의 내면 어딘가에서 서로를 향해 응어리진 채 굳어진, 상처난 감정이나 고통의 무게를 따뜻함을 가장한 부드러운 말들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찬사받아 마땅하다.

 

이미 사라진 사람(장남)과 남아 있는 사람(아버지, 어머니, 차남, 딸)은 끊임없이 변주되어 각자의 삶 속으로 침투한다. 그렇게 변주되어 침투한 관계는 서로의 기억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긴장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를 향해, 특히나 가족을 향해서는 "왜 사느냐?"고 질문하진 않는다. "왜 사니?"라는 질문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욕'으로 읽힐 만큼 삶은 당위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극적인 요소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어이없게 다가온 장남이란 존재의 죽음 이후 각자가 떠안은 죽음의 무게에 따라 갈라지는 삶의 풍경들. 사실관계를 왜곡해서라도 기억하려는 사람과 이제는 제발 그만 잊고 싶은 사람 모두 서로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 속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이틀 간의 일상을 응시하는 카메라. 무표정할 것만 같은 카메라가 이들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날선 감정들의 검붉은 선을 선연히 그려낸다. 텍스트보다 더 텍스트다운 카메라. 단점은 보이는 자에게만 보인다는 사실.

 

 

 

 

3.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은 보통의 관객들이 즐겨 찾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버라이어티한 볼거리의 향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지루하고 따분한 영화일 수 있는 것. 그러나 타인에겐 "왜 사느냐?"고 물은 순 없어도 자기자신에겐 한 번이라도 묻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자그마한 위안거리가 될 수도 있다. 따뜻함을 가장한 채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가족이라는 관계망의 연약함과 허술함을 폭로하면서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 내일의 삶을 향한 희망적인 메시지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음화처럼 각인된 가족사진을 똑바로 응시하게 만드는 힘을 주기도 할 테니까.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은 견뎌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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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가 조금 무거운 분위기라면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유쾌한 편이다. 극적인 사건이나 억지스러운 요소가 없는, 영화 같지 않아서 더 좋은 영화이기도 하다. 꼭 무슨 사건을 만들고 자극적인 요소를 삽입해야만 영화라고 생각하는(예컨대 송해성 감독의<고령화 가족>이 이 범주에 속한다. 굳이 영화 후반부에 피 튀기는 요소를 삽입해야만 했었는지...),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이 아닐까 싶다. <하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굳이 가족영화 범주 속에 넣기는 힘들지만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잔잔한 웃음이 담긴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이 마음에 든다면 고레에다 감독의 초기 작품인 <환상의 빛>도 추천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에 개봉되었지만 실제는 1995년에 연출한, 고레에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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