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
글쎄, 도대체 무엇이 '엽기적'이란 것일까?
술 먹고 지하철 안에서 좀 토한다고? 애인에게 주먹 좀 휘두른다고???
아마도 한 10여 년이 지난 다음 문화평론가들이나 사회비평가들이 2000년대 초엽의 한국 문화를 한 마디로 평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등장할 단어 가운데 하나가 '엽기'라는 단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는 사람에 따라 그 편차가 너무나도 클 거 같다. '엽기'라는 아이콘으로 축약되는 당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영화속 엽기적인 그녀는 전혀 엽기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영화속 두 남녀의 삶의 자잘한 디테일은 내가 생각하는 동시대의 보통의 남녀들의 관계보다도 훨씬 더 '평균적'이고 '건강한' 연애담으로 보이니 말이다.
엽기적이라고 묘사된 그녀의 행동을 스토리 라인을 따라 정리해보자. 지하철 안에서 할아버지한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애들에게 큰소리치기, 술이 약하면서도 조절을 못해서 사람 머리에 구토를 하고 아무 데서나 쓰러지는 것, 원조교제하는 중년남자들이나 애들한테 훈계하는 것, 수업시간에 임신중절수술을 해야 한다고 교수에게 거짓말을 한 뒤 남자친구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 발이 아프다며 남자친구에게 신발을 바꾸어 신자고 한 뒤 '나 잡아봐라'는 것, 물이 얼마나 깊을까 궁금해서 수영도 못하는 남자친구를 빠트리는 것, 가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
이런 게 '엽기'라면, 글쎄,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라 불리는 엽기가 이런 정도의 것이라면 이 세상은 분명 엽기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너무 넘쳐나서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러니 영화는 두 시간 내내 전지현의 '튀어보이기'를 연출하느라 매맞는 차태현을 온갖 '연약함', '소심함'으로 치장하느라 바쁘다. 따라서 영화는 밑도끝도 없이 작위적 웃음을 만들어내느라 온갖 공력을 낭비할 뿐이다.
그러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순정 멜로 드라마 흉내까지 낸다. '엽기적인' 그녀도 원래는 착하고 '정상적인' 여자였는데,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애가 좀 이상하게(?) 됐다는 거다. 참나... 엽기도 아니고 멜로도 아니고...
결론적으로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기댄 건 '엽기적인'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범적(?)' 여성 일반과 비교되는 그녀의 '남성성', 또는 '희귀성'에 기댄 안일한 '성적 구분'일 뿐이다. 남자가 했다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행동들이 여자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엽기'가 되는 그런 '성적 나눔'일 뿐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대에 뒤쳐진 한편의 코미디만 남은 셈이다.
이쯤에서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로까지 부상한 '엽기문화'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TV 오락프로그램을 보거나 주변의 인간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별 것 아닌 것에도 모두다 '엽기'라는 말을 갖다붙인다. 조금만 썰렁해도 엽기, 조금만 튀어도 엽기,,, 말끝마다 엽기다.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게나 주류(문화, 도덕)에 맞서는 일탈적 행위는 있어 왔다. 그것이 주류에 맞서는 '반문화'로까지 발전했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지만...
우리 사회의 화두이자 문화적 코드였던 초기의 '엽기(문화)'는 분명 주류의 규범적, 모범적, 도덕적 행위에 맞서는 문화적 일탈이자 반역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변부의 건강한 일탈적 행동과 문화, 다시 말해서 '엽기적인 코드'들은 스스로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면서 주류의 문화적 코드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주변부에서 주류로 올라서는 순간 '자유'와 '저항'이라는 애초의 문화적 코드들은 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제는 어떻게든 엽기라는 '주류문화'에 끼어들려고 발버둥치는 '튀는' 행위들의 반복만 남아 진부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튀어 보일려는' 행위들만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회적, 일탈적 건강성은 잃어버린 채...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이런 '엽기문화'의 주류화에 발맞춰 별다른 창의력과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오직 우리 사회의 남성/여성이라는 '한심한' 대립각을 건드려 억지 웃음을 유발하는 유치한 코미디로 다가왔을 뿐이다.
영화가 이렇게 '엽기적'이지 못하다보니 영화 음악 역시 엽기 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가장 평범하고 평균적인, 모범적인 선택을 넘어서는 일이 없다. 정말이지 잘 선곡된 멜로드라마의 O.S.T.음반을 보는 것 같다.
이래서 한여름밤의 밤샘 영화보기([엽기적인 그녀], [파이널 환타지], [쥬라기 공원3])는 나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채 피로함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게 만든다.
written date:2004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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