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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코언 형제의 장르 변형 또는 장르 진보의 실험

by 내오랜꿈 200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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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올해 80회를 맞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예의 그 보수적이고 가벼움을 선호하던 선례를 깨고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비에르 바르뎀(영화 속 살인마 안톤 쉬거)의 수상이 100% 예상되었던 '남우조연상'은 물론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과 감독상' 그리고 '각색상'까지 거머쥔 것. 그 동안 평단과 관객 모두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자주 아카데미에 손을 내밀었지만 다소 보수적이라 평가받는 아카데미는 쉽게 코언 형제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비평가들에게 압도적 찬사를 받았으며 흥행까지 성공했던 <파고>조차도 '각본상'에 그쳤을 정도로.

이번 코언 형제의 아카데미 수상이 상당수의 언론이 평가하는 대로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장르의 변형' 또는 '장르의 진보'라고까지 평가받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아카데미 어워드 수상은 <애니깽> 같은 영화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하던 '악몽'에 비하면 기분좋은 소식임에 틀림없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리 호락호락한 영화는 아니다. 지난 주말 심야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120분 내내 온몸을 조여오던 긴장감은 다른 공포영화나 스릴러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곧 보통의 다른 영화처럼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일반적인 장르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장면 하나하나가 스토리 라인에 우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각 장면 장면을 이어붙여 극적 긴장감을 높여가는 게 일반적인 장르 영화의 전형이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런 장르 영화의 '전형'을 파괴하고 스릴러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영화 도입부, 안톤 쉬거가 주유소 주인과 대화하는 아래 장면을 생각해 보자.


관객들은 보안관 살해 장면과 고속도로에서의 아무런 이유없는 노인 살해 장면을 알고 있기에 쉬거가 얼마나 흉악한 킬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주유소 주인은 알 리가 없다. 살인자와 곧 살해될 (수도 있는) 사람이 나누는 '의미 없는' 대화. 이걸 쳐다보는 관객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스크린을 향해 소리지르고 싶을 만큼. 하지만 사실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있어 꼭 있어야만 하는 장면은 아니다. 안톤 쉬거라는 연쇄살인범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장면인지 모르겠지만 스토리 라인에 있어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면인 것.

이 뿐만 아니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공포영화나 스릴러 영화에서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음악이나 여타의 음향 효과 또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과 바람소리, 빛과 그림자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물론 BGM 또한 거의 쓰이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심리마저 카메라에 담을려고 시도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을 클로즈업 시킨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 숨소리가 음악을 대신해 스크린에 투영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이런 것들이 기존 장르 영화의 전형을 따르지 않고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극적 긴장감을 연출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들 등장 인물들의 연기가 튄다든지 과장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운 좋게 돈가방을 손에 넣은 모스나 그를 쫓는 살인청부업자 쉬거, 그리고 이들을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각자의 역할대로 성실하게 도망치고, 근면하게 추격하고, 냉철하게 사건의 의미를 해석한다. 심지어 스토리 전개의 중심축이던 모스의 죽음조차 직접적으로 보여 주지 않고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현대 예술사조의 하나이자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니멀리즘'이 영화에서 실현된 예의 극치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아마도 이 지점이 모든 영화평론가들이 코언 형제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라는 예술을 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대가'라는 지위를 부여하면서...

마지막으로 영화의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 자체가 원작인 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한 것이기에 소설처럼 영화의 주인공 역시 퇴임을 앞둔 늙은 보안관 벨이다.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1980년대 미국의 텍사스라고 하는데, 25살에 보안관이 된 이 늙은 주인공이 감당하기에 세상은 이미 너무 급격하게 변화해버렸다. 이것을 설명하는 세 개의 장면이 영화의 제목이 내포하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보인다. 보안관 벨이 같은 보안관이었던 친척(?) 노인을 찾아가 대화하는 장면, 엘파소에서 벨이 어떤 노인(아마도 그 역시 보안관이었을지도)과 나누는 대화 장면, 그리고 다소 '어이없는 듯한' 엔딩처럼 느껴지는 벨과 부인의 대화 장면.


이 세 장면의 대화 내용을 종합하면 결국 '세상이 왜 이 따위로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30년 전만해도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라는 한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되먹지 못한 세상에서 늙은 보안관은 범죄를 따라가기가 벅차기만 한 것. 이런 거창한 의미를 떠나서도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보안관과 부인이 나누는 대화장면은 씁쓸하기 그지 없다.

"퇴직하고 나서 집안에서 당신 일이나 도와줄까?" 
"고맙지만 사양합니다."

허허, 그럼 정년퇴직한 노인은 무엇을 하란 말인가?

어쨌거나 다소 난해한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비로소 조용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숨죽여 스크린을 지켜본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일순간 당혹스러워 하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급하게 일어서기보다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두 시간 동안 수축되었던 근육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나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2008 02 25 

(덧붙임) 영화의 주연과 조연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가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소식을 듣고서 생겨나는 의문이다. 아마도 원작소설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레이션을 이끌어가는 보안관 벨이 주인공임은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영화에서는 이 경계가 애매모호해지는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나의 이 의문에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수상한 상은 '남우주연상'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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