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두 개의 화두로 시작하자.
"당신처럼 곱게 자란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은 있는 법."
한 인간의 실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쭈욱 지켜보지 않는 한. 설사 이런 경우조차 그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의식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독심술이라도 있지 않는 한 말이다. 하물며 그것을 '드라마화한' 영화에서는 일러 무슨 말을 하랴.
콜린 윌슨의 <잔혹>이란 책에 보면 수많은 연쇄살인범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른바 '폭력인간', '확신인간'이라는 윌슨 특유의 개념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공격성'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잔혹>에서 인용되는 여러 자료 가운데 로버트 아드레이(Rovert Ardrey)의 <아프리카의 기원>과 콘래드 로렌츠(Konrad Lorenz)의 <공격>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류가 현재와 같이 진화한 것은 그 공격성 덕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 범죄, 폭력행위 등에 경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콜린 윌슨, <잔혹>, 하서, p.35)
글쎄, 윌슨이 인용한 책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언급하기 그렇지만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인류학적 기록들을 찾아내며 그것을 문명의 발전과 연관시켜 서술한 정도가 아니겠는가 짐작할 뿐이다. 설마 폭력성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해서 그것을 용인하거나 적극 권장해도 좋다고 주장하기야 했겠는가.
머리가 몽롱한 상태에서 쇼파에 기대어 본 영화 한 편이 나를 상당히 곤혹스럽게 만든다. <몬스터>. 영화를 보고 나서 제목을 곰곰히 들여다 보면 상당히 정치색이 깃든 의도적 작명이란 생각도 들고 단순히 기계적 중립성을 취하기 위한 감독 나름의 방편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실재의 삶과 같을 순 없는 아일린 워노스의 생애를 영화화하는 데 있어 논란이 되는 핵심 지점을 비켜가기 위한 의도된 제목 뽑기.
이런 '혐의'는 영화 속 리의 마지막 살인에서도 감지된다. 리의 매춘을 위한 '뻔한' 레퍼토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선한' 남자조차 살해한 '괴물' 아일린 워노스라는 식으로. 리가 영화 내내 강조하는 '상황'이라는 여지는 남겨두지만. 물론 이 같은 판단은 실존인물 아일린 워노스와 영화속 리와의 비교 속에서 얻어지는 결론이다. 아일린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들에 보여지는 것과 다른 설정을 굳이 집어넣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냐는 데 천착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까지 미칠 수밖에 없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13살 때부터 거리의 여인으로 살아온 리에게 '단 한번 찾아온 진실된(?)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은 연쇄살인범이라는 '괴물'로의 변화조차 '상황'이라는 정당방위로 인식될 수 있는가. 아마도 영화가 우리에게 사고하게 만드는 하나의 주제만 뽑으라면 이런 질문이 될 것이다. 감독은 아마도 아니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한 인간이 '괴물'로 변해가는 조건, 그것이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하든 개개인에게 찾아온 공포나 충격 때문이든 기본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에 내재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감독의 의도인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성찰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 혹은 규범이라 불리워지는 가치체계를 학습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욕망과 금지라는 기표를 만나고 절제와 인내라는 미덕과 조우한다. 이것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체계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리의 행위와 그것을 자기합리화하는 외침, "당신처럼 곱게 자란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는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체계의 단단함을 의심하게 만든다. '상황', '상황', '상황'.....
사실 지난 화요일에 쓴 부분이 여기까지다. 그후 이틀을 고민했지만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 막혀버린다. 나 자신도 내 주변의 일반적인 친구들에 비해선 순탄하게 살아온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리의 삶 앞에선 저 '상황'이란 단어를 쉬이 말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더욱이 '단 한 번 찾아온 사랑'이라 믿었던 셸비조차 그녀의 자백을 받아내고 유죄를 결정짓는 '증인'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그녀가 재판정을 나서는 문 사이로 비춰지는 햇빛 속에서 중얼거리는 말조차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상황' 속에서.....
과연,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은 있는 것일까?"
written date:2005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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