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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굿바이 레닌> - 통일을 즈음한 독일의 상황에 대한 수많은 은유로 모자이크된 우화

by 내오랜꿈 200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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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즈음한 독일의 상황에 대한 수많은 은유로 모자이크된 우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팜플릿에서 <굿바이 레닌>을 소개하는 짤막한 문구는 이렇게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동독에서 살았다면 1989년 10월에는 결코 혼수상태에 빠져서는 안된다." 아마도 이 문구 만큼 <굿바이 레닌>의 스토리라인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표현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동독이 (자본주의) 독일로 통일되고 있을 때,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갈 때,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특별한 공간'에서 갇혀지내야 했던 한 맑시스트의 역설! <굿바이 레닌>이 남긴 수많은 잔영은 당연하게도 8~90년대의 한복판을 지내야 했던 내 젊은 날의 기억을 되돌린다. 

말이 사회주의자니, 맑시스트니 어쩌고 거창한 듯이 보이지만, 솔직히 말해 80년대 한국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혹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치고 '운동'이라 불리는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사회주의자여서, 맑시스트여서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리라. 억압과 폭력,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 고단한 일상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지겹고 고통스런 노동의 삶, 이런 것들이 우리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 분노가 뒤집어야 한다는 열정을 품게 만들고, 그 분노가 혁명을 꿈꾸게 만들었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분노에서 출발한 '운동'이었기에 그에 수반된 모진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고,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자로, 혹은 맑스주의자로 나아가게끔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이들의 사회주의,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몰락, 맑스주의의 해체와 그 궤적을 같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현실에 대한 분노가 살아있는 한...

<굿바이 레닌>은 평범했던 한 가족의 일상을 스케치하듯 그려내면서 시대의 격변과 맞물려 사라져가는 유토피아에 대한 소묘와 겹쳐놓은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어머니로 상징되는 구체제(=사회주의)의 죽음을 그리는 과정에서 보이는 불편함, 일테면 왜 동독의 모든 것은 조롱의 대상, 희화화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따위의 불편함은 너무 예민한 나의 알레르기적 반응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말이다. 특히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 예컨대 웃음의 대상이 연민의 대상이 되고, 급기야는 숙연함으로 다가오게끔 만드는 기법은 단순히 잘 만들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이다. 

다만 독일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시각에 대해서는 영 찜찜한 기분을 어쩔 수 없다. 700만 관객을 불러모아 독일에서 역대 자국영화 흥행 랭킹 2위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한국에서는 일주일을 못 버티고 간판을 내려야 했던 초라함에 대한 것이 아니다. 혹여라도 <굿바이 레닌>이 가진 일말의 진지함 조차도, 예컨대 '사회주의의 이상은 받아들이겠지만 사회주의가 만들어놓은 현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알렉스식의 독일인의 평균적 시각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순한 웃음의 소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우리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 조차도 쓸데없는 넋두리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한편 보고 20년의 과거를 되새기는 인간의 한심한 자기 넋두리... 

written date:2004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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