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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러브레터』 - 삶의 공간이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린 곳에서..

by 내오랜꿈 2008.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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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안성 답사길에서의 가을 풍경은 나에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냥 가을이려니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눈 앞에 다가서는 정경들은 자꾸만 내 유년의 기억들을 돌이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답사기록을 쓰느라 눈 앞에 펼쳐졌던 정경을 자꾸만 되살려내니 더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삭막한 서울이라는 도회지는 내 유년의 많은 깨달음이나 기억들을 앗아가 버렸다. 등하교길, 눈에 보이는 산등성이마다 새색시 다홍치마 땟깔이 서러울 만큼 진홍빛 꽃몽우리를 터뜨리던 진달래를 보면서 봄이라는 걸 느꼈고,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 사이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코스모스를 보면서 가을이 왔음을 느끼며 자랐더랬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의 난, 남들보다 한 발이라도 먼저 한껏 멋을 내고픈 여인들의 옷차림새 같은 것들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한다. 물론 나의 이러한 변화 아닌 변화가 좋다 나쁘다 할 성질의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을 잃어가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상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성큼 다가선 가을날의 들녘은 내게 이런 상념들을 안겨주며 멀리서 조롱하는 듯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끔 만들었다. 뭐, 그래도 모처럼 기분좋게 보낸 하루였던 것 같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다 보면 그 기다림의 대상이 잘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얼굴 같았는데,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목소리 같았는데,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쩌면, 잊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너무 많은 것들을 그리움이란 미명으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 '기다림', '그리움'의 또다른 이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니면, 이것들을 간직해야 할 '추억'과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미흡한 분별력 때문인지도...
 

「A winter story」. 영화 『러브레터』의 O.S.T. 음반에 나오는 음악이다. 『러브레터』의 OST 는 '레메디오스'라는 그룹이 맡았는데, 이 그룹은 프로젝트 그룹으로 영화음악, 특히 이와이 순지의 영화이외에서는 거의 활동이 없어 일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이라고 한다.


원래 'Remedios'는 '치유의 신'을 뜻한다고 한다. 글쎄, 이 음악에서 무엇인가 가슴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런지.....

'Remedios'는 『러브레터』 외에도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언두』 등에서 음악을 맡았다.

이 「A winter story」에 대한 에피소드 한 가지.

언젠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월 이야기』가 상영되고 난 뒤 관객과의 대화시간. 많은 관객들과 기자들이 뒤엉켜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기자들과 이와이 순지 감독 사이에 통역을 두고 10여 분간의 담소가 이어지고 몇 가지 질문들이 오고 갔다.

그 인터뷰 마지막에, 웃지 못할 헤프닝이 벌어지게 된다. 어떤 기자 하나가 

"감독님은 마치 음악을 필름 위에 그려내는 섬세함이 있다는 평을 듣고 계십니다. 현재 한국에서 영화 o.s.t의 인기도는 『러브레터』 중의 「A winter story」가 수 년간 수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곡에 대한 감독님의 느낌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통역의 입에서 나오는 황당한 말 한 마디.

"감독님께서 「A winter story」가 무슨 곡이냐고 반문하시는데요." 

이런...
그 옆에 있던 30여 명의 관객들이 모두 일제히 누가 시작이라 할 것도 없이 허밍으로 "음 으음~ ~~~"라면서 합창을 했다. 그러자, 감독은 너무나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줄은 몰랐다'면서 약간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 곡은 8살짜리 어린이가 연주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첫사랑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곡 전체에 순수함이 배어나오게 하려고 그렇게 녹음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영화 『러브레터』의 그 사랑에 대해 애뜻해하며 가슴 아파하는 건, 어쩌면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느낌이 8살 아이의 두려움과 미숙함, 떨림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 건 아닐런지...


written date:200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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