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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여행

남한강 폐사지에서...

by 내오랜꿈 2008.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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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경상도와 강원도의 물산이 서울로 모이는 국토의 대동맥이었던 남한강의 폐사지를 찾았다. 마음의 사치인지 모르나 지난 6월에는 시기적으로 녹음이 짙은 여름 들어 설 무렵이었으니, '폐사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예컨데 고즈넉함이라던가 스산함이 더할것 같은 이맘쯤에 다시한번 찾고 싶어했던 곳이다.

고달사지 가는길. 우리국토 어디나 비슷한 처지겠지만 예전의 여주,이천은 쌀의 고장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곳곳이 '골프장 1번지'로 변모해버려 바리깡으로 싹뚝 민듯이 단장된 모습을 볼때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 골프장이 닦아 놓은 편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올해는 유난히 짧아진 계절 탓으로 채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낙엽되어 또르르 떨어져 별로 단풍맛이 안난다는데 이곳의 가로수는 제법 울긋불긋 제빛깔을 내어 가을이 느껴진다.산하나를 넘어 빨리 비밀병기를 찾으러 가자고...동행인의 아들래미 재촉에 내림막길을 달려 주차창에 닿았고, 기온이 내려간다고 야단이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답사하기에 딱 좋을만큼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마을입구 느티나무 못 미쳐 길옆에 발굴 사무소로 쓰이는 콘테이너 몇동이 있다. 무분별한 복원 공사로 사적지가 훼손 되거나 주변 경관을 망쳤다는 목소리가 들리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한참 발굴 진행중인 지금보다 이전의 고달사지를 보지못한 탓에 무엇이 옳은지 판단이 어렵지만, 고려때 사방30리가 절땅이었다 전하고 현재 남아있는 석물들의 크기를 보더라도 그 장대함에 당시의 사세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나라의 탑이나 부도들이 대부분 산중의 한적한 곳에 위치해 일반인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데다 관리인력 부족으로 지금도 간간히 석조 문화재 도굴기사를 접한다. 이것도 예외없이 지난7월쯤인가 이곳의 국보급 부도도 도굴꾼들의 손을 타 상륜부 일부가 훼손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자세히 살폈으나, 지난 답사에서의 눈대중이 짧아 가늠할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발길을 돌려 일행들과 아침에 급히 찐 계란을 까먹으며 흥법사지로 향했다. 고려때 왕건이 진공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고 머물게 하기위해 창건했던 고려불교의 실질적인 발원지라 한다. 남한강 지류인 섬강이 내려다 보이는 너른터에 자리했지만, 사유지인 텃밭 한가운데 대사의 탑비와 작은 삼층석탑 한기만 덩그마니 남아있어 초라하기 이를데없고 예전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형편이라 세월의 무심함을 느끼게했다. 그곳이 사지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체 밭을 만들거나 묘지로 쓰고 심지어 사지에 남아있던 유물들은 주민들의 생활도구로 쓰여지는 실정이다. 강원도가 보존을 위해 사유지 매입을 추진했지만 땅주인과의 가격 마찰로 인해 탑과 탑비 사이는 밭이 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 옆 폐가에서 잎은 다 떨어지고 부러지지 않을까 버거울만큼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겨우 꺽는 욕심을 부렸지만, 돌아나오며 폐가와 폐사의 운명이 같은 무게로 스산하게 다가왔다.

문막에서 59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17km쯤 가면 부론면 법천리에 자리한 법천사지. 충주에서 내려온 남한강 줄기가 부론면 앞으로 흐르는데, 그 남한강 물이 섬강과 합쳐져 여주로 흘러든다. 지난걸음에도 문막에서 영동고속도로를 지나는 입구를 못 찾아 한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었는데 미련하게 이번에도 똑같이 답습했다. 다음에 또 이곳을 찾는다면 영동고속를 따라가다 굴다리 나올때까지 끝까지 가자고 스스로 각인, 또 각인하며.... 법천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문종때 왕사이자 국사인 지광국사가 머물렀던 진리가 샘솟는 절이란 뜻을 가진 절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입구에 여러대의 차가 주차해있어 여늬 답사팀이려나 했는데 우리나라 부도비 중 가장 화려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전체적으로 대단한 공력과 정성이 엿보이는 지광국사의 부도비 앞에 봉산탈춤 차림을 한 사람이 있고, 그를 향해 깨어진채 모여있는 정체모를 석재들 위에 각자 터를 잡아 카메라를 잔뜩 들이대는 한무리의 사람들은 대전에서 올라온 사진 동호회였다. 출사를 나온 모양이다. 지난번에는 더위에 엄두가 안 나 자세히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도 찍사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니보니 겨우 측면의 구슬을 사이에 두고 서로 희롱하는 쌍룡만 눈에 넣고, 또다시 비밀병기를 찾자는 꼬마의 재촉에 부도비 왼쪽의 축대와 건물터로 내려가 보았다. 지난번보다 더 발굴 된 모습이다. 그곳에서 한참을 머문 후, 사진가(?)들의 연출된 모습의 탈춤 장면이 지루하기도하여 일행들과 당간지주로 향했다. 현재 너른 밭을 중심에 두고 자리한 마을 전체가 절터로 추정될만큼 거찰 이었고, 그 규모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한다. 다만, 지광국사가 활약한 당시, 1천명의 승려가 상주했다 전하고, 지광국사의 현묘탑비와 당간지주가 서 있는 위치를 보아 그 규모를 유추해 볼 뿐이다.

거돈사터 가기전 어느새 점심때를 훌쩍넘은 시각이라 먹을만한 밥집을 찾았으나, 마땅찮아 읍내를 몇바퀴 돌다가 일행들의 합의하에 맛이 없어도 손해볼게 없겠다싶은 삼겹살 집에 자리를 잡았다. 강원도땅이 그렇듯 이곳도 찾는이가 많지않아 손님도 우리뿐 한적하다. 고기가 노릇하게 구워질 동안 그와 연관지어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설왕설래하며 시장이 반찬이라고 주문한 생고기는 고소하고 먹을만 했다.

따뜻한 커피까지 해결한후 산리 거돈사터로 향했는데 법천사지에서 만났던 그 사진팀들이 고스란히 이곳으로 옮겨와 자리하고 있었고, 솔가지 하나를 꺽은 모델이 불좌대 위에 올라가 찍사들의 요구에 여러동작을 연출 하고 있었다. 거돈사지는 지금까지의 절터와는 달리 최근 몇년간의 발굴조사후 깨끗한 석재로 보수되어 잘 다듬어진 절터다. 현재 발굴중인 법천사지나 고달사지도 이같이 말끔히 단장하려는 것일까? 이 절터의 석축가에 솟아 있는 천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는 절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 보았을 것이다. 그 그늘아래 더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김밥을 까먹던 기억이 났다. 사지 앞 폐교에 거돈사지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가 한쪽만 외로이 눕혀진 채 방치되고 있다한 귀동냥이 차가 출발한 후 갑자기 생각이나 그 안타까움이 더했다.

여주의 고달사지에서 강원도 흥법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로 이어지는 여정의 매력은, 한결같이 이나라의 대승이자 한시대를 풍미했던 고승들에 대한 높은 덕을 기린 유물들을 보면서 웅장함과 섬세함을 지닌 고려 불교 미술을 만끽할수 있는 것, 지금은 황망히 터만 남은 절의 내력과 그나마 현존하는 몇개의 석물들로 과거의 영화를 유추해보며 남한강의 유장한 흐름과 함께 아직은 덜 때 묻은 시골마을의 살가운 맛을 어느정도 느껴볼수 있음이 아닐까. 수학여행 외엔 성인이 되어 경복궁이나 국립중앙 박물관을 찾은적이 없어 보지 못했지만, 일제때 일본놈에 의해 반출되었다가 경복궁에 가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이라던가, 원공국사의 부도, 진공대사의 비신 등등.. 국보급 문화재들이 볼모처럼 타지에 있는 것을 보며 잠시 관리의 대책은 잊은채 제자리에 있을때 그 가치가 돋보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written by 느티
2002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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