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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노벨상 유감

by 내오랜꿈 200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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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던가, 재작년이었던가? 노벨상 발표 시즌에 즈음하여 고은씨가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고 국내 모든 언론이 호들갑을 뜬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호들갑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뒷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고은씨와 더불어 후보로 유력하게 오르내렸던 사람이 바로 황석영씨였는데, 그들이 노벨상을 두고 경쟁적으로 대응하면서 두 개 진영으로 나뉘어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을 접했던 것이다. 

글쎄,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두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호감이 싸~악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과연 '노벨상'이 가지는 여러 가지 논란과 이데올로기적 효용을 전혀 모르고있는 것일까? 아마도 전혀 모른다기보다는 노벨상이 가져다주는 '명예'에 혹해서 제정신들이 아니었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요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보면 정말이지 무슨무슨 상으로 넘쳐나는 것 같다. '잘한다'는 칭찬을 앞세워 애들 기를 세워줘야 한다는 열망에다, 그것이 애들 교육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신종 교육이론'도 한 몫 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칭찬? 글쎄, 난 요즘 애들 쳐다보고 있으면 칭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무라야할 때 제대로 나무라지 못해서 더 문제인 것 같은데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 조용히 시키기는커녕 그걸 나무라는 사람한테 자기 새끼 왜 나무라느냐며 큰소리치는 싸가지 없는 부모들이 주류를 이루는 게 오늘의 세태인 것 같은데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라는 책이었던가?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책들이 한 권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다음에는 직장내에서 칭찬이 끼치는 영향이 어떠니, 기업발전에 칭찬이 어떤 영향을 미치니 '생난리브루스'를 치는 책들이 양산된다. 내가 보기엔 거의 다 종이값이 아까운 쓰레기들이다. 대부분의 책이 결국은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기업이 발전하고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 있는 책들이다. 그리고 이런 책들 거의 대부분이 외국의 번역서들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유아발전단계가 어떠니, 몇 세 때는 무슨 발전단계이니 무엇을 키워줘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했나? 환경이 다르면 개인의 발달 정도는 다 다르게 마련인 것 아닌가? 무슨 놈의 외국이론 번역하고 베낀 책들이 우리나라 유아교육부터 기업문화교육까지 좌지우지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무조건 애들 칭찬하고 기 세워서 어떤 인간으로 키워낼 것인가? 결국은 공부 잘 하고, 남을 밟고서라도 1등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게 목표인가? 그래서 울산과학대학 학생들처럼 자기들 밥해주고 청소해주는 식당의 비정규직 아주머니들(밥하고 반찬만들고 설겆이하고 청소하는) 정규직화를 위한 집회를 자기 학교에서 연다고 총학생회 차원에서 애들 끌고 나와 인간방패를 만들어 비정규직 아주머니를 몰아내기나 하는 인간들 만드는 게 목표인가? 이명박 찍으면 취직 잘 될 거 같으니까 대선에서 이명박 찍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대학생 만들어내는 게 목표인가? 

칭찬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칭찬 이전에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다른 사람부터 돌아보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 약자를 위한 타인을 위한 배려를 가르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지맘대로 하는 애새끼들 야단부터 쳐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기에 무슨 넘의 유아발전단계가 어떠니, 무슨 교육을 시켜야 하느니 하는 헛소리가 필요한가? 

해마다 되풀이되는 노벨상 논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괜히 욱~ 하는 성질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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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점에는 그녀의 책이 없었다
 출처:인터넷한겨레 2007 10 21


»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노벨문학상 발표가 나고 일주일 후에 아이오와에서 문학도서가 가장 많다는 서점에 갔다. 이맘때 한국의 경우를 떠올리며 으레 도리스 레싱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코너가 없을 뿐 아니라 그녀의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대답에 놀랐다. 서점 직원은 보유하고 있던 다섯 권 정도의 책은 이미 팔리고 새로 주문을 넣긴 했지만 책이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서점 컴퓨터를 통해서 보니 미국 전체에서 <황금 노트북>을 주문한 총 부수는 2000부 정도였다. 본격문학 시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미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적은 수요는 아니지만 해마다 노벨상 특수를 누리는 한국 출판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엔 미국이 노벨문학상 결과에 냉담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영국 문학에 대한 묘한 열등감의 표현이거나 유력 후보였던 필립 로스가 수상하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그런데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스태프나 세계 각국의 작가들도 대체로 노벨문학상에 별 관심이 없거나 비판적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아랍계 작가들은 가오싱젠, 존 쿳시, 오르한 파묵 등 기존 수상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서구 중심적인 시각을 지닌 그들보다 뛰어난 작가들이 자국에는 적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이 절대적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노벨문학상 열풍은 다소 기이하기까지 하다. 물론 노벨상을 빌미로라도 문학이 얼마간 사회적 흥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문학의 위기다 어쩌다 해도 실제로 한국만큼 국내 문학시장이 남아 있는 나라도 드물다. 소설이 아닌 시집이 소수이긴 하지만 일이만 부, 때로는 수십만 부씩 팔리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생산력, 작품의 다양성에 있어서도 정체기에 들어선 서구 작가들보다 오히려 현재적 활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부의 관심과 활력을 어떻게 국제화하느냐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는 요행을 바라기보다 한국문학을 국제화하기 위한 기반을 지금이라도 차분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선 한국문학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뛰어난 번역자를 양성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할 때에도 베스트셀러 위주의 번역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 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양방향적인 교류가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몇 명의 국제적 스타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과 독자성이 무엇인가를 국제사회에 이해시키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이 40주년을 맞는 해라서 세계문학을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다. 아프리카 문학, 아랍 문학, 중국 문학, 일본 문학, 러시아 문학 등의 섹션이 마련되었지만, 한국 문학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세계화로 나아가려는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국적이 다른 시인들이 모여 일본의 중세 시가양식인 ‘렌가’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응용해 영어로 공동창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문학에서 과연 세계와 공유할 만한 보편적인 양식이 무엇일까 반문해 보았다. 이제는 노벨문학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런 질문과 성찰을 해나가야 할 때다. 미국 서점에 노벨상 수상자의 책이 없었던 것보다 내가 이곳에 와서 더 뼈아프게 확인한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현실이었다.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변질된 명예’의 과잉!
자부심을 잃어버린 ‘상’… 빗나간 과시욕망에 목을 매는 한국사회의 풍경 

출처:<한겨레21> 제354호 


살아오는 동안 당신이 이곳저곳으로부터 탄 상장은 몇개나 되는가. 집안에 걸린 친목단체에서 받은 상장이며 책장에 놓여진 상패들, 혹은 장롱 깊숙이 넣어둔 어릴 적 빛바랜 우등상과 개근상들까지 다 꺼내 세봐야 할 정도인가. 아니면 나에게 상은 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고 잘라말할 것인가. 물론 보란 듯이 걸어둔 상패가 없다고, 변변한 상 하나 받은 게 없다고 해서 크게 낙담할 일은 아니다. 수상경력이 꼭 훌륭한 삶을 말해주는 건 아니므로. 

어린이집 우등상 수상식의 우스꽝스런 풍경 

하지만 상을 둘러싼 현재 한국사회의 몇 가지 풍경들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외친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사는 직장인 이아무개(38)씨는 지난 2월 말 아들이 다니던 ㅇ유치원의 졸업식에 갔다가 황망한 일을 당했다. 우등상을 타는 아들의 모습을 볼 때까지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는데 같이 상을 받는 다섯명의 아이들 가운데 3명만 상패를 타고 아들과 다른 한명의 아이는 상패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씨는 “왜 우리 아이에게는 상패를 주지 않느냐”며 원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곧바로 돌아온 원장의 대답은 이랬다. “상패가 있는 아이들은 유치원쪽에서 마련한 게 아니라 부모들이 미리 돈을 내고 주문한 것입니다.” 다른 아이의 상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들을 보며 이씨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본교 출신 노벨상 수상자의 동상’. 강원도 횡성에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 기숙사 앞에는 미래에 노벨상을 받게 될 주인공을 위해 15개의 얼굴 없는 동상좌대가 놓여 있다. 자신의 얼굴을 동상에 얹히겠다는 ‘위대한 비전’을 갖고 공부하라는 뜻에서다. 이 학교 박하식 교감은 “내 얼굴이 저기 동상에 올라가는 꿈을 갖고 학교에 다니도록 노벨상 동상을 세워둔 것”이라며 “적어도 15명을 금세기 안에 노벨상 수상자로 키워내는 게 목표”라고 원대한 구상을 밝혔다. 박 교감은 실제로 이 학교 졸업생 중 미국 MIT공대에 진학한 한 학생은 얼굴 없는 노벨상 좌대를 떠올리며 노벨상을 향한 꿈을 불태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상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착은 강하며, 각 분야에서 주는 상 또한 숱하게 많다. 가히 상의 홍수시대라 일컬어도 크게 잘못은 아닐 정도다. 문인 또는 문인지망생에게 공식적으로 주는 문학상만 한해 줄잡아 270여개에 이르고, 미술분야는 공모전과 기성작가에게 주는 미술상을 합쳐 얼추 140여개에 달한다. 한햇동안 전국에서 개최되는 국악·민속경연대회도 무려 85개에 이른다. 특히 국악·민속경연대회 가운데 대통령상을 주는 대회가 25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주는 대회도 82개나 된다. 그래서 국악계 안에서는 “왕중왕 경연대회를 신설해 진짜 고수를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조섞인 말도 나오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 전통지역문화과는 “왜 상이 그리 많으냐고 하는데 침체된 국악의 붐을 일으키고 신인들에게 등용 기회를 열어주려면 상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냐”고 말했다. 

작가들과 공모전의 공생관계 

사진/미래의 노벨상 주인공을 기다리는 강원도 횡성 민족사관고등학교의 ‘얼굴없는 노벨상 좌대’. 

각종 상이 확대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상이 내거는 취지가 그렇듯, 실제로 수상제도를 통해 그 분야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인가. 이에 대해 이화여대 함인희 교수(사회학)는 교육의 대중화가 상의 과잉생산을 불러오고 있다고 진단한다. 과거 소수만이 가졌던 교육기회가 늘어나면서 다른 사람보다 뭔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됐고 이런 점이 수많은 상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용인정신병원 김수동 박사도 경쟁을 그 요인으로 꼽는다. 그는 “예전에는 겸손을 미덕으로 삼았지만 경쟁이 심해지면서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가 인정받아야 살아남는 사회구조가 되었고, 자기를 알리려는 노력이 상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서보다는 타이틀을 따기 위한 과시욕망이 상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숱한 상이 제정되는 배경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수요 공급 논리가 그대로 관철된다. 상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의 ‘욕구’에 따라 상이 제정되고, 상 자체가 결국 하나의 상품처럼 거래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분야에서 새로운 상들이 잇따라 제정되어온 과정이 그대로 보여준다. 과학분야에서 가장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상은 올해 34회째인 대한민국과학기술상이다. 그러나 현재 나름대로 권위를 내세우는 상은 9개에 이른다. 5공 시절 한국과학상이 생긴 이래 공학자들은 “왜 순수과학분야만을 시상 대상으로 하느냐”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한국공학상이 제정됐다. 그러나 곧바로 젊은 과학자들은 “과학분야의 상들이 누적된 공적에 대해서만 시상한다”며 불만을 터뜨렸고 결국 젊은 과학자상과 이달의 과학자상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소기업부설연구소쪽이 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왜 대기업이나 대학연구소 등에만 상을 주느냐는 논리였다. 그래서 생긴 게 중소기업쪽을 주 상으로 하는 장영실상이다. 나아가 벤처쪽에서도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벤처기업상이 제정됐고 지난해에는 대중매체를 통해 과학기술문화 창달에 기여한 사람을 발굴, 포상하는 과학문화상까지 제정됐다. 이에 따라 한해 과학분야 대통령 표창은 4개 분야 20여명에게, 과학기술부 장관 표창은 무려 6천여명에게 주어진다. 

미술계에서 신인발굴을 내걸고 열리는 공모전도 몇개나 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난무한다. 심사절차를 둘러싸고 잡음과 의혹이 끊임없이 불거지고 공모전 무용론이 제기되지만 공모전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공모전이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일정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가나아트 김달진 자료실장은 “권위있는 공모전보다 수준이 낮은 하위 공모전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이나 수상경력 한줄을 추가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을 위해 공모전은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는 문학분야에서 출판사의 상업주의적 ‘기획’과 작가의 상에 대한 ‘욕망’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숱한 문학상이 나오는 양상과 닮아 있다.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제정하는 쪽에서도 거기에 맞춰 각종 상을 공급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화여대 함인희 교수는 “한국인은 어떤 상을 받더라도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이런 한국인의 심성과 상을 줌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시장논리가 만나서 상이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은 받기도 어렵지만 주는 것도 쉽지 않다. 수상자 발표 때마다 공정성과 심의절차에 대한 잡음이 일기 일쑤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지난해 9월 ㄱ신문사는 에너지절약에 기여한 기업체를 선정해 시상하면서 장려상(산업자원부 장관상)으로 ㅊ에너지를 선정했다. 초절전 진공 온수관 난방장치 개발로 보일러 연소로 인한 환경오염과 소음공해를 없애고 에너지 낭비를 개선했다는 점이 수상 이유였다. 그러나 이 수상업체로부터 재하청을 받아 시공했던 박아무개씨 등 5명은 ㅊ에너지의 기술이 부실한 탓에 보일러 장판바닥이 까많게 타들어가곤 했다며 수상 기술을 문제삼았다. 

이들은 “당시 응모한 60여개 기업의 제출 서류를 고작 6명의 전문가가 하루 만에 다 심사하면서 기술적인 심사가 제대로 안 된 채 졸속으로 수상업체가 선정됐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실제로 당시 심사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심사위원 1명이 분야별로 서류 10편 정도를 다 봐야 했다”며 “무리하게 심사하는 상황에서 기업이 제출한 증빙서류를 100%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장관상을 준 산업자원부 전력산업과도 “ㄱ신문사에서 심사한 뒤 통보하면 우리는 그대로 따라 장관상을 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신바람나는 효과를 위하여

사진/상은 신뢰와 공정성이 전제돼야 그 권위가 빛난다. 한 상패 제작업소에 진열된 상패들.(강창광 기자) 

무릇 상은 신뢰와 공정성이 전제돼야 그 가치와 권위가 빛나게 마련이다. 넘쳐나는 상의 이면에는 상에 기대어 인정받고자하는 욕망과 그 욕망을 이용해 상을 제정하고 또 그 상을 통해 권위나 권력을 꾀하려는 ‘또다른 욕망’이 교차한다. 과시나 포장을 위한 변질된 상의 홍수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상을 타지 않고도 자신의 진정한 실력이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된다면 상에 목매다는 한국사회의 풍경은 덜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진정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에 상이라든가 타이틀을 따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상의 본질은 주고받아 더욱 독려하고 분발하는 동기부여다. 그런 만큼 상을 주는데 꼭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함인희 교수는 “한국인은 나보다는 상대적인 것들, 예컨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중시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며 “상을 통해 남이 나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해주면 더 신바람나게 노력하는 효과를 빚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의 남발은 권위와 자격을 갖춘 다른 수상자들의 품격을 한꺼번에 떨어뜨린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상의 권위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이다.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친뒤라야 ‘아름다운 수상거부’도 나올수 있고 편가르기와 줄세기우식 수상 다툼도 사라질 것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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