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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경제학을 위한 변명 - 노무현의 '천박한 개그'

by 내오랜꿈 2007.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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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분양원가 공개가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 '왕초'가 한 마디 하니까, 성은을 입은 '꼬붕'이 앵무새처럼 거든다. "아파트 가격, 특히 공공아파트 가격은 시장원리에 맞아야 하는데 시장원리를 침해하는 식으로 하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이해찬 총리 지명자, 6월 10일 MBC <뉴스투데이> 인터뷰 중) 

이놈의 나라는 가끔씩 날 헷갈리게 한다. '1+1=2'라는 자명한 수학의 공리를 '1+1=3'이라고 우기고 있는데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라고 넘어가는 상황에 마주칠 때. 이거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거릴 던져주는 이해하기 힘든 나라. 

비록 경제학을 전공만 했을 뿐 전문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반대를 두고 노무현과 이해찬이 펼치고 있는 시장논리 운운하는 발언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어디 내놓을 전문적인 글은 아니니 좀 과도하게 단순화시켜 풀어보자.

분양원가 공개가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이 사람들은 시장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 단초를 지난 9일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같이 한 만찬 석상에서 행한 노무현 어록에서 한 번 찾아 보자. 

"사업에서 남는 부분을 모두 공개하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주택공사가 사업자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한 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장사하는 것인데 10배 남는 장사도 있고 10배 밑지는 장사도 있고, 결국 벌고 못 벌고 하는 것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시장을 인정한다면 원가 공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다. 시장 메커니즘이 존재하게 해야 한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의 해당 기사에서 보면 대략 위의 3가지 말들로 간추려진다. 여기서 키워드는 아마도 '장사의 논리', '시장 메커니즘'일 것이다. 이 둘을 뭉뚱거려 언론이나 이해당사자들, 말을 옮기는 사람들은 '시장원리'라고 통칭하여 떠들고 있는 것 같다. 

노무현의 말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장사라는 건 10배 남길 수도 있고 10배 밑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 메커니즘인데, 이 시장메커니즘을 인정하면 (이를 부정하는) 원가 공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논리로 압축된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맞는 말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경제학의 기본, 시장 메커니즘의 기본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나 하는 이야기다. 

경제학에서 시장논리, 시장 메커니즘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하는 말은 바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어떤 재화의 가격을 얼마로 책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근대 경제학의 기본적인 화두였다. 재화의 내재적인 가치와도 연관되는 문제이기에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의 가격은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적정한 가격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이때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수요와 공급의 원리'이다. 

곧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 메커니즘'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남기느냐 못 남기느냐의 (실로 천박하다! 인식 수준이... 이건 천민 자본주의의 똥물이 골수에 가득찬 인간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문제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스스로 적정한 가격을 형성하게 만드는 그 어떤 메커니즘을 일컫는다. 이것이 근대경제학에서 이해하는 시장원리이다. 

물론 난 이 근대경제학(고상하게 말하면 '신고전파 경제학')을 불신한다. 이 수요공급의 논리는 이 메커니즘에 참여하는 모든 참여자들이 재화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 곧 화폐를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걸 한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선택의 기준은 '한계효용'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대며). 

그러나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가 어디 이런가? 갖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가지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신고전파 근대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분배에 역점을 두는 정치경제학이 탄생했던 것이고, 이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생산관계의 문제까지 건드리는 정치경제학 비판, 이른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 잔하며 3명의 경제학자가 논쟁을 한다고 치자. 시장논리를 최우선시 하는 근대경제학은 이 소주의 가격을 얼마로 책정해야 기업의 이윤이 극대화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정치경제학은 이 소주를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에게 얼마를 나눠줘야 적당한가를 고민하고, 정치경제학 비판의 입장에서는 이 소주를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까지 사고의 방향을 넓히는 것이다. 

쓰다 보니 장황하게 언급했지만 자본주의의 시장원리, 시장 메커니즘은 결국 잘못된 전제, 곧 이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재화의 구매에 필요한 화폐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보니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균형상황이 아니라 '어떻게 기업이윤을 극대화 할 것인가'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런 '이윤 극대화의 논리'는 시장원리, 시장 메커니즘의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지 그 자체가 시장 메커니즘, 시장논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논리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어떻게 '적정한' 가격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나라의 아파트 분양가격이 과연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적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시장원리는 온 데 간 데 없고 투기자본의 이윤확대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 아닌가? 이걸 분양원가 공개를 통해 수요에 맞는 적정한 공급가를 형성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시장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노무현 만세! 천민자본주의 만세다!! 써글...

written date:200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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