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자본론>에 보면 가치이론을 설명하면서 고전파경제이론가들을 빗대며 다음의 이솝우화를 인용하고 있다. 옛날 그리스의 어떤 허풍쟁이가 로두스 섬에서는 하늘 높이 뛰었다고 허풍을 치며 제 땅을 욕해대자, 이를 듣던 사람이"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봐라"고 되받아 쳤다고 한다.
다른 데서 얼마나 고고하게 잘 살았는지, 얼마나 우아하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 자기가 발 붙이고 있는 땅에서 함께 하라는 경종을 담고 있다.
경제학에서 공공재를 논할 때, 쉽게 말하면 공공의 이익을 위한 분배를 논할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무임승차'이다. 모두가 함께 부담해야 할 공공재를 준비하는데 있어 사회구성원 n명에서 a명이 무임승차한다면, a명 만큼분의 공공재를 위한 부담은 나머지 (n-a)명이 추가 부담해야 되는 것이다.
이제 이 '무임승차'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비용의 문제를 넘어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공적·집단적 해결에 동참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비켜 가는데 젖어 있는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사회의식 전반에 적용되는 말이다. 자신도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동참해 그 결실을 나눠 가지려 하기보다는, 사회문제로 인해 손해를 보지 않는데만 몰두하고 심지어는 그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사회문제에만 대응하는 것이다. 밭은 갈지 않고 열매만 챙기겠다는 것이다.
80년대, 군사파시즘 문화에 저항하는 이른바 '데모'라는 것에 대해선 배부른 넘들이 법(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 같은 걸레법들)을 무시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자신의 앞날만 설계했던 인간들이 그 '데모'의 수혜로 시위문화가 일반화되자 자기 지역만의 이익을 위해 혐오시설(화장장, 쓰레기 소각장) 반대 투쟁 같은 걸 할 때는 지극히 정상적인 법조차 무시하는 뻔뻔함을 보여주는 것들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군사파시즘과 결탁해서 독재자들의 주구 노릇을 했던 조선일보 같은 신문들이 대가리 깨지며, 피 흘리며 끌려간 수많은 젊음과 맞바꾼 언론의 자유에 무임승차하면서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 등도 대표적인 '무임승차'에 해당될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당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는 게 사회구성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권리는 단지 '무임승차' 해서 얻은 권리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이나마 누리고 있는 모든 '권리'는 그것을 획득해내기 위한 구성원들의 피나는 노력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링 위에서,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몸 버리고 옷 버려가며 자신들의 피와 땀과 맞바꾼 것이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링 밖에 앉아서, 진흙탕에는 발 하나 담그지 않으면서 링 위에서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고고하게, 우아하게...
그러나 이들이 알아야 할 것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흙탕물 팅기지 않고 그렇게 고고하게,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해준 건 바로 링 위에서 흙탕물 속에서 대가리 깨지고 피 흘리며 싸운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단 것 정도는 알고 있기를 바란다. 그 '고고하고 우아한 무임승차' 조차도 사실은 자신들이 혐오하는 흙탕물 속의 처절한 싸움 속에서 획득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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