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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밥에 대한 단상>, 김훈에 대한 단상

by 내오랜꿈 2007.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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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인터넷 한겨레신문, 2002년 3월 21일
김훈 기자hoonk@hani.


내오랜꿈********************************************************

이 글은 나이 50이 넘어, 새내기 사회부 기자들이 출입하는 경찰청 출입기자를 자원하느라, 잘 나가는 모주간지 편집국장 자리를 던져버리고 한겨레 신문에 입사했던 김훈 기자의 컬럼성 잡문이다. 기자 세계에서 편집국장이 차지하는 막강한 권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던 그는 그렇게 다시 일선 취재현장에 섰다. 한겨레 내부에서조차 찬반양론이 분분했다던데... 그러나 그의 글은 간결하고 함축적인, 기자 글쓰기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2003년, 결국 김훈은 한겨레를 떠났다. 왜 떠났는지에 대해선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떠난 뒤 어느 한겨레 기자가 한겨레 뉴스메일에 연재한 두 편의 글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차피 글쟁이이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글쓰기를 계속 하겠지만,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서 보여주었던 짧은 칼럼성의 글들은 그야말로 명문으로 인정해 주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written date:2004/05/01 

한겨레를 떠난 이후 그는 완전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발표된 글들. 중 단편들을 묶은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그리고 최근의 <남한산성>까지... 

이 와중에 <시사저널> 사태가 터졌고, 그는 그 현장에서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후배 기자들에게 모진 소리를 쏟아놓는다. 자신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사저널>에 대한 말 못 할 추억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듣기론 피투성이로 싸우고 있는 현장의 기자들에게 할 소리는 아닌 듯했다. '왜 적당히 타협해서 좋게 가지 않느냐'는 소리가 그 상황에서 그리 쉽게 나와야 하는 소리인가? 또한 문제의 발단이 된 삼성 구조본의 이학수 관련 기사를 일러 기사의 기본 구성요건도 안 되는 글이라는 막말을 서슴치 않았다. 그게 사주의 횡포, 자본의 횡포에 맞서 싸우고 있는 현장의 기자들에게 할 소린가? 자신이 보기에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선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할 소리 아닌가?

어쨌든, 그에 대한 글을 하나 써야겠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에서 드러나는 그의 본성이랄까, 지식인의 허위의식 같은 것이랄까. 예컨대, 현실역사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말 못하고 숨죽여 지냈던 비겁함이 소설이라는 세트(=가상공간) 안에서는 '너무 할말이 많아지는 역사적 허기'로 나타나는 지식인의 허위의식 같은 것에 대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written date:200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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