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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먹거리

간장 거르기

by 내오랜꿈 201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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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5일, 장을 담궜다. 온전히 간장용으로만. 80L 항아리에 잘 띄운 메주 14kg을 차곡차곡 쌓아 엄나무를 몇 겹 가로지른 뒤 무명천을 받친 체에 나트륨 농도 18% 소금물 65L를 부었다. 간장용인지라 7~8년 된 씨간장도 조금 넣어주고. 애초 계획은 6개월 정도 지난 작년 가을에 장물을 거를 생각이었다. 게으름 반, 의도된 늑장 반이 접목되어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사 장 가르기를 한다. 1년 하고도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



▲ 2018년 3월 25일, 간장용 장 담그기.


장 담그기 관련 글에서 몇 번 언급했지만 내 고향 울산은 우리 나라 재래장 문화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장은 메주를 띄운 뒤 항아리에 메주와 소금물을 넣고 일정 시간이 경과한 뒤 메주는 된장으로 장물은 간장으로 나누어 후숙 발효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울산이나 경주를 축으로 하는 경남 동부 해안지역은 처음부터 된장과 간장을 따로 담근다. 장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된장 항아리는 처음부터 메주를 가득 넣은 뒤 메주 양의 1.5배 정도의 소금물을 채우고, 간장 항아리는 메주를 30~40% 정도만 넣은 뒤 소금물을 가득 채운다(보통 메주 양의 5배 전후의 양). 이렇게 따로 담근 뒤 2~3개월 정도 후에 된장 항아리의 메주와 장물은 모두 된장을 담그는 데만 쓰인다. 메주의 전분과 콩단백질 성분이 우러난 장물을 그대로 된장에 넣어주는 셈이니 된장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간장 항아리는 보통 여름이 지나 가을에 장물과 메주를 분리한다. 6개월 이상을 장 항아리에서 묵히는 것. 메주의 전분(간장의 단맛을 결정한다)과 콩단백질(간장의 구수한 맛이 된다) 성분이 최대한 우러나도록 하는 것. 장 가르기 한 것에 비해 간장 맛도 당연히 좋을 수밖에. 이때 간장을 담그고 남은 메주는 다시 된장을 담그는 게 아니라 소여물로 쓰인다. 따로 보관하면서 겨우내 소여물을 끓일 때 조금씩 넣어주는 것. 이런 된장, 간장에 길들여진 혀는 좀처럼 간장 뺀 된장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도회지 생활을 할 때도 된장은 늘 고향집에서 담근 걸 가져다 먹었다. 더 이상 고향집 장을 가져다 먹을 수 없게 된 지금은 된장, 간장을 직접 담궈서 먹는다. 물론 요즘엔 된장, 간장을 따로 담그는 개량장이 대세인지라 마트에 가면 언제든 콩코오지로 발효시킨 맛있는 된장을 사 먹을 수 있지만 장 담그기를 쉬이 포기하지 못한다. 마트에서 파는 개량된장이 내가 담그는 재래된장보다 맛있는 장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내게 장맛은 이제 혀가 아니라 추억이 지배하는 영역 어딘가에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 장 담근 지 1년 1개월 지난 뒤 장물을 걸러 간장 숙성을 시작. 메주의 전분질이 많이 우러나온 탓인지 체에 받친 면보자기에 장물을 거르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아침부터 옆지기의 도움을 받아 장물을 거르는 데도 뒷마무리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장물에 메주의 전분질이 좀 많이 녹아난 탓인지 체에 면보자기를 받쳐 장물을 거르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 탓이다. 아무래도 4~50일 지나 장 가르기 할 때와는 달리 장물의 색이 진하고 걸쭉한 느낌이 든다. 장물 거르면서 간장 맛을 처음 본 옆지기의 입에서 "와 맛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두 달 숙성시킨 간장 맛과는 비교불가임은 당연지사. 처음 장 담글 땐 간장 뺀 메주를 다른 재료들(보릿가루나 고춧가루 등)을 잘 혼합하여 '집장'이나 '막장'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메주 상태를 보니 포기해야 할 거 같다. 맛은 몰라도 오랜 발효 탓인지 메주 색깔이 너무 검다. 무 장아찌 담금용이나 퇴비용으로 쓸 수밖에.


장 항아리에서 메주를 건져 내고 남은 장물을 면 보자기를 받쳐 깨끗하게 걸러내 따로 숙성시키는 게 전통적인 조선 간장이다. 이때 장물을 달이는 방법도 있고 그대로 두는 방법도 있다. 나의 경우 달이기도 하고 달이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보았는데 맛은 물론 후숙 과정에서의 상태도 특별한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장은 기본적으로 발효 식품이다. 발효에 유익한 균을 끓이거나 달이는 등의 방법으로 깡그리 죽인 뒤에 숙성시키는 방법이 좋을 수가 있을까? 되도록이면 달이지 않고 그대로 숙성시키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달여야 안심이 된다면 팔팔 끓이거나 하지 말고 은근한 불에서 시간을 들여 달이는 게 좋다.


▲ 장물을 거르고 난 뒤 메주의 쓰임새를 두고 고민했으나 무 장아찌 담금용으로나 써야 할 거 같다. 1년이 넘는 발효 탓에 색깔이 너무 검다.


된장과 달리 간장은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달리 무엇을 더 추가하거나 인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오롯이 시간과 햇볕이라는 자연에 맡겨 두면 된다. 그래도 볕 좋은 날 항아리 뚜껑을 열어 주거나 일주일에 한두 번 항아리를 닦아주는 일들까지 자연에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니 사람의 손길이 전혀 안 갈 수는 없다. 사실 장은 담그고 나서 오랫동안 두고 먹는 음식이니 늘 가까이서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 담그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담그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담근 뒤에 손보는 게 어렵다. 알다시피 장 담그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메주에 염도를 맞춘 소금물을 넣은 뒤 적당한 때를 잡아 된장과 간장으로 분리한 다음 항아리에 넣어 두면 끝이다. 하지만 맛있는 장을 먹기 위해선 늘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필요하면 뚜껑도 여닫아주어야 하고 항아리도 닦아주어야 한다. 장 표면에 골마지나 불순물이 생기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작물만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게 아니라 장도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익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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