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늦가을 장마처럼 사흘 걸러 비 내리는 날씨가 이어지더니 지난 금요일 아침 기온은 설입은 옷차림으로는 몸을 움츠리며 종종걸음 치게 만들었다. 온도보다는 바람 탓이 더 크다 하겠으나 때마침 주말부터 한파가 몰아칠 것이란 일기예보도 접한지라 서둘러 무를 수확했다. 8월 말 씨앗을 파종한 뒤로 두 번 솎아준 게 전부일 정도로 무 파종골은 지금까지 눈길조차 잘 주지 않았다. 배추나 다른 작물은 벌레도 잡고 바닷물도 몇 번 뿌려주곤 했으니 그에 비하면 무는 우리 텃밭에서 완전 서자 취급당한 셈이다.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는 작물을 굳이 신경 쓰며 돌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 그게 어디 내 탓이랴만.
▲ 겨우내 먹을 무는 큰 아이스박스에 신문지를 두툼하게 깔아 차곡차곡 쌓은 뒤 현관 안쪽에 보관한다. 그간 땅에 묻어도 보고, 짚을 깐 두꺼운 이불 속에 넣어도 보았으나, 수백여 개가 아닌 다음에야 편리성에서나 보관성에서나 이 방법이 꽤 효과적이다.
전부 수확하고 보니 오래 두고 먹어도 좋을 튼실한 무가 80여 개 정도다. 자그마한 것들은 곧바로 손질한 다음 동치미를 담그고, 굵은 것들 50여 개는 저장을 위해 큰 아이스박스에 신문지를 두툼하게 깔아 차곡차곡 쌓은 뒤 현관 안쪽에 보관한다. 두 식구 먹기에는 이것도 너무 많은 양이다. 그간 땅에 묻어도 보고, 짚을 깐 두꺼운 이불 속에 넣어도 보았으나, 수백여 개가 아닌 다음에야 편리성에서나 보관성에서나 이 방법이 꽤 효과적인 것 같다. 물론 가끔씩 볕 좋은 날을 골라 아이스박스를 열어 습기를 제거해주어야 하는 세심함은 반드시 필요하다.
무로 담그는 김치의 대표격은 동치미일 터인데, 배추김치에 비해 이제는 점점 그 중요성이 떨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김장목록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것. 하긴 뭐, 배추김치도 잘 담그지 않는 세상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 동치미에 들어갈 재료들. 무10kg을 기본으로 배추나 갓, 쪽파가 추가되고 나머지 양념채소로는 마늘, 생강, 양파, 청양고추, 청각, 다시마, 연근, 대추 정도가 더해진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웬만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시피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나온 말이다. 배추나 무, 나물 같은 종류를 소금에 절여 오래 보관해두고 먹기 위한 방법에서 유래한 말인 것. "침채(沈菜) → 딤채 → 짐채 → 김채 → 김치"로의 음운변화 과정을 거쳤다는 게 문헌학적 정설이다. 동치미는 '동침(冬沈)'에 접미사 '이'가 붙어 연철된 표기인데, 동침(冬沈)이란 결국 겨울철에 무나 배추를 소금물에 잠기도록 해서 먹던 음식이란 뜻이리라. 아마도 가난했던 시절, 배고픈 자들이 가장 흔한 재료를 가지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숙성시켜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아니었을까? 내 어릴 적만 하더라도 간장독 크기만한 항아리 두 개 정도는 가득 차도록 담궜던 게 동치미였다. 겨우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먹었을 정도로 주식에 가까운 반찬이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먹을 게 워낙 풍부한 세상이다 보니 옛날처럼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마다 동치미 담그기는 빼놓지 않는다. 담그는 방법도 요즘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떠도는, 감미료가 덧칠된 국적불명의 레시피가 아니라 어릴 때 먹었던 동치미 맛을 최대한 유지하는 레시피를 고수하고 있다. 무를 기본으로 배추나 갓, 쪽파가 추가되고 나머지 양념채소로는 마늘, 생강, 양파, 청양고추, 청각, 다시마, 연근, 대추 정도가 더해진다. 어릴 때 어머니 세대가 담그던 것과 비교해 보면 청각이나 연근, 대추가 추가된 것 같다. 청각은 동치미 국물의 시원한 맛을 위해서고, 연근은 방부작용을 위해, 대추는 골마지 방지용으로 넣어준다. 아무래도 옛날보다 덜 짜게 담그고 날씨도 덜 춥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더해지는 것들인 셈. 맛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냉장고에 보관한다면 연근이나 대추를 굳이 넣어야 할 이유는 없다.
▲ 동치미 담그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소금물은 물과 소금의 비율을 18:1 정도로 맞춘 다음 한 번 끓여서 식힌 다음 붓는다. 준비한 재료를 모두 넣고 소금물을 부은 뒤 무에서 떼낸 무청을 올리고 20일 정도 기다리면 그야말로 시원한 국물의 동치미 김치가 완성된다.
무 30여 개(10kg 정도)를 기본으로 해서 배추 2~3포기, 갓 1kg, 쪽파 400g이 주재료다. 마늘, 생강은 각각 200g 정도 들어가는 것 같은데 계량하고 넣지는 않으니 정확한 무게는 알 수 없다. 마늘, 생강은 편 쓸어 청각, 다시마, 양파와 함께 삼베주머니에 넣어 항아리 바닥에 깐다. 그 위에 무를 한두 첩 쌓은 뒤 배추와 갓을 넣고 그 위에 다시 무를 올린다. 맨 마지막에 쪽파와 청양고추, 남은 갓, 대추 등을 넣은 뒤 준비한 소금물을 부으면 끝이다. 단맛을 내는 감미료나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은 일체 넣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무나, 배추, 양파, 마늘에서 우러나온 단맛이 차고 넘친다. 심지어 다른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연근, 대추까지 넣었음에랴.
동치미 담그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소금물은 물과 소금의 비율을 18:1 정도로 맞춘 다음 한 번 끓여서 식힌 뒤 붓는다. 무나 배추 등 주재료의 1.2~1.3배 정도 들어가는 것 같은데, 위의 재료로 할 경우 16L 정도 들어가는 것 같다. 물과 소금 비율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터인데 15:1~25:1 사이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15에 가까우면 실외에 보관해도 괜찮을 것이고 25에 가까우면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이 많은 양을 냉장고에 넣을 수는 없으니 실외에 보관가능한 가장 약한 농도를 찾다보니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18:1이란 비율이 나온 것이다. 동치미가 익었을 경우 그냥 먹었을 때 약간 짭짤한 정도, 물을 약간 타 먹을 정도의 염도다.
준비한 재료를 모두 넣고 소금물을 부은 뒤 무에서 떼낸 무청을 올리고 15~20일 정도 기다리면 그야말로 시원한 국물의 동치미 김치가 완성된다. 어릴 적 먹던 동치미와 견주어도 맛은 손색이 없으나 먹을 게 넘치는 세상인지라 다 먹지 못하니 남 주는 게 반이고 그래도 남으면 된장에 박을 짠지용으로 전락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벌써부터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진다.^^
<덧붙임>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보면 동치미를 담글 때 무를 꼭 절여야 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김치 담그는 법을 다루는 이름난 책들이나 방송매체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의 경우 반드시 그래야만 할 필요가 없는, '맹목적 따라하기'에 불과하다. 김치를 담글 때 배추나 무, 갓, 쪽파 등을 절이는 이유는 양념을 묻히기 쉽고 잘 배게 하기 위해서가 첫 번째고, 다루기의 편리성이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도 굳이 언급하자면 절이지 않을 경우 배추나 무에서 너무 많은 수분이 빠져나와 양념이 묽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치미용 무는 이러한 이유들로 절이니 어쩌니 구속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절이지 않고 담그는 게 훨씬 더 아삭아삭한 식감의 동치미를 맛볼 수 있다. 동치미는 가장 근본적으로는 소금물과 무가 만나 서로의 농도차에 따른 삼투압 작용으로 소금물과 무가 소금이라는 용질과 물이라는 용매의 교환을 통해 서로의 농도차를 없애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무를 비롯해 함께 넣는 채소들의 여러 가지 수용성 맛성분들이 녹아나와 동치미 국물의 맛을 좌우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동치미에 묻힐 양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온다고 양념이 묽어질 일도 없다. 또 절이지 않는다고 배추나 갓처럼 다루기가 불편할 이유도 전혀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절여야 한다는 말인가? 인간의 편견과 그에 따른 맹목성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정 의심스럽다면 한 번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간단하니까! 아, 물론 절인 무의 그 물컹물컹한 식감이 좋다면 계속 절여서 담궈도 괜찮다. 취향은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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