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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담백' 유감

by 내오랜꿈 2019.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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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시간, 집에 돌아와 TV를 틀면 먹거리에 관한 방송을 자주 접하게 된다. 딱히 정해 놓고 보는 프로그램이 없으니 저녁 준비하고 강아지들 밥 챙기는 시간 동안 '생생정보' 같은 프로그램에 채널이 고정되어 있으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들 먹거리 프로그램들을 보면 맛을 표현하는 한 가지 공통적인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담백하다'는 표현. 육개장도 담백하고 매운탕도 담백하고 피자도 담백하고 찌개도 담백하고 매운닭발볶음도 담백하단다. 무슨 놈의 맛 표현이 담백 하나로 통일이라도 된 걸까? 카메라만 갖다 대면 우수마발이 다 담백하단다.



▲ 동치미. 그나마 '담백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담백하다는 건 사실 '맛이 없다' 또는 '맛이 심심하다' 정도라고 봐야 한다. 담백(淡白). 물 맑을 담, 흰 백. 어휘라는 게 시대에 따라 그 뜻이나 쓰임새가 변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담백'의 의미는 여전히 저 두 개의 한자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말국어대사전에 담백하다의 의미로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란 뜻도 있긴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음식이 짜지 않고 싱겁다, 깨끗하다'란 의미에 가깝다. 맵고, 짜고, 얼큰한 음식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백 번을 양보해서 '담백하다'의 화용론적 쓰임새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쓰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인터넷이나 방송매체에서 쓰이는 담백하다'의 화용론적 의미를 유추해 보자면 음식들이 다른 잡내가 없다거나, 느끼하지 않다거나, 뭔가 표현할 수 없지만 깨끗한 맛이라는 뜻에서 그렇게들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뜻이라면 '담백하다'가 아니라 그냥 맛이 '개운하다', '깔끔하다', '깨끗하다' 정도로 표현하면 될 일 아닌가? 정 그런 정도로는 부족하다 생각되면 '이른 아침, 갓 딴 이슬맺힌 오이를 깨무는 것처럼 상큼하다'라든가 '추운 겨울밤 살얼음 언 장독에서 꺼내 먹는 동치미 국물처럼 깔끔하다' 같은 좀 더 서술적인 수식어를 가미해서 표현하든가.


육개장이, 매운탕이, 찌개가 담백하다면 도대체 그걸 무슨 맛으로 먹어야 하나? 이런 음식들을 표현하는 '얼근하다', '개운하다' 같은, 그 의미와 쓰임새가 안성맞춤처럼 제격인 멋드러진 단어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담백하다' 같은 얼빠진 듯한 표현들만 난무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짜고 맵기만 한 '담백한(=맛 없는)' 김치찌개를 억지로 먹은 양 속이 영 불편하다.


오늘 점심은 얼근하고 개운한 동태찌개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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