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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피도 눈물도 없이]

by 내오랜꿈 2008.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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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도, 온 세계가 감동할 로맨스도, 영화의 역사를 뒤흔들만한 새로운 기법도 갖고 있지 못한, 그러나 그 온갖 것들을 갖고 있는 수많은 영화들을 '벤치마킹한' 단 한편의 영화 [펄프픽션]으로 깐느의 그랑프리를 차지했던 쿠엔틴 타란티노(물론 그 전에 만든, 그래서 [펄프픽션]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수지의 개들]이 있긴 했다).

이후 수많은 '쿠엔틴 타란티노'는 각 나라마다 영화의 '젊은 피'를 수혈하는 집단으로 자리매김되고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 없으니, 바로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이다. 그는 아주 대놓고 입맛에 맞는 영화들을 벤치마킹한다.  돈가방을 차지하려는 패거리들이 얼키고 설키는 구조는 [록스탁 앤 투 스모킹 베럴즈](가이 리치)와 닮았고, 의기투합하는 두 여인, 경선과 수진의 처지는 [바운드](래리 워쇼스키)에서 따온 것 같고, 과거엔 한가닥 헀지만 지금은 택시운전수로 손님의 토사물이나 닦아야하는 여인과 그녀를 보살피는 늙은 형사의 관계는 [재키브라운](쿠엔틴 타란티노)과 닮았다.

이 재기넘치는, 넘치다 못해 영악하기까지 한 감독의 눈에 비치는 이 세상, 갖가지 인간 군상들이 서로 물고뜯는 관계들은 투견장에서 서로 으르렁대는 개와 하등 다를 게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는 워쇼스키 형제도, 가이 리치도, 쿠엔틴 타란티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재료들을 가지고 그만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왕년엔 한가닥 했지만 지금은 남편의 도박빚에 시달리며 드링크 한 병에 피곤한 몸을 내다맡기는 택시운전수 경선, 유일한 희망인 어린 딸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세상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라운드걸 출신으로 권투선수와 눈이 맞아 살지만 하루도 매거를 날이 없는 여자 수진, 눈가에 난 상처를 수술하고 가수로 데뷔해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지만 그녀의 지독한 남자 '독불이'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힘겨워 보인다.

여기에 온화한 얼굴(하필이면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 비슷하게 이미지화된 신구가 연기한다)로 돈을 위해 온갖 악행들을 지시하는 KGB(김금복).  그는 독불에게 정기적으로 상납받는 뒷골목 세계의 '거물'이다.  그러나 경기가 좋지 않아 수입이 줄어들자 뭉칫돈을 마련하기 위해 독불과 짜고 투견장에 경찰이 들이닥치는 연극을 벌여 도박꾼들의 판돈을 싹쓸이하는 작전을 세운다.  이 사실을 안 수진은 경선을 끌어들여 돈을 가로채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런 정도의 커다란 얼개에 아직도 '감'을 믿는 구식형사반장, 이제는 퇴물이 다돼가는 조폭 칠성파(그 이름치곤 너무 초라하지만), 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며 한몫 잡아서 폼나게 살아보려는 양아치 룸싸롱 웨이터까지 끼어든다.  그래서 사건이 복잡하게 전개되지만, 류승완 감독은 나름대로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를 깔끔하게 잘 풀어놓는다. 

그가 기대는 건 가이 리치의 막가파식 게임도 아니고, 타란티노식의 테크닉도 아니다.  대신 감독은 지금 이곳 사람들이 처한 궁상맞고 너절한 신세를 담아낸다.  흘러간 트로트 가사가 어울릴 듯한, 때국물 흐르는 이들의 삶에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권투하다 라운드걸이랑 눈맞아 살고 있는 깡패, 그놈한테 허구헌날 얻어터지면서도 미운정 고운정 들어서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한때 그녀처럼 살다 지금은 밤새 택시 몰며 취객의 토사물을 치우며 살지만 도박하다 집나간 남편의 빚 때문에 힘겨운 여인, 이런 그녀를 도와주고 싶지만 보스가 시키니 할 수 없이 빚독촉하러 다니는 늙은 건달, 이들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폼나게' 살아보려 잔대가리 굴리는 양아치 등등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지리 궁상이다. 

이런 그들이 서로 속고 속이며 서바이벌 게임을 벌인다. 투견장의 개처럼!  그들은 서로 싸우며 죽어간다, 돈가방을 위해, 내일의 삶을 위해, 세상과 맞서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감독의 전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도 그랬지만 류승완은 이런 밑바닥 인간군상에게서 해학과 비애를 느끼게하는 촌철살인의 대사를 만들어낸다.  경선과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늙은 건달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 먹고 있던 삼겹살을 주체못해 우물거리면서 두목의 꾸지람을 듣는 장면 등등.  어느 영화평론가의 표현처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철없이 날뛰는 10대 양아치들의 영화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는 유통기한이 지난 건달들의 영화"이다.  

그러나 재주많고 영악한 감독이 풀어놓는 볼거리들은 '너무' 풍성하다. 이 한편의 영화를 찍고 말 것도 아닌데, 왜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스토리라인인데, 볼거리마저 그 모든 영화에서 보여준 걸 다 보여줄려는 것일까?  아니면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다 20억이 넘는 '대작' 영화를 만들다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일까?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라는 말은 분명 이 영화에 돌아가야할 충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래도 [피도 눈물도 없이]는 보기 드물게 제대로 만들어진 한국영화이다, 조폭들이 설치는 같잖은 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written date:2003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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