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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로얄 테넌바움』 -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에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 '가족'의 이야기

by 내오랜꿈 2008.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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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에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 '가족'의 이야기 『로얄 테넌바움』



"지금 죽어도 영화사에 기록될 감독"이라는 칭찬과 "유아적 자기도취"라는 폄하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

쿠엔틴 타란티노와 할 하틀리의 맥을 잇는, 이른바 90년대에 등단한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100년의 영화의 역사를 서가에 진열한 뒤 자신이 연마한 내공을 한껏 자랑하는, 쉽게 말해서 누가 더 많은 영화를 보았으며 누가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가를 겨루는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작품 대다수는 그들이 기억하는 온갖 영화들의 리스트를 교묘한 방식으로 짜집기하여 다시 그들의 영화 속으로 녹여내다 보니 영화를 마침내 심심풀이삼아 풀어보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영화적 기억으로 가득한 낡은 스크린 안에 자신들 세대의 삶을 펼쳐보이며 사려 깊게 현실을 응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로얄 테넌바움』의 감독 웨스 앤더슨 역시 몇 번의 우회로(『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거쳐 이제는 가족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따로 요약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단순하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머리를 과시하는 3명의 자녀를 둔 부부의 결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20여 년 뒤 배신과 실패의 틈바구니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한 가족. 이들은 서로의 아픈 기억을 딛고 하나로 합쳐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단순한 가족의 이야기라... 그럼 뭐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관객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아니, 아주 불친절하다. 마치 실제 존재하기라도 하는 책인 양 한 챕터(Chapter)씩 넘기듯 전개되는 『로얄 테넌바움』은 왠만한 관객이라면 30분을 못넘기고 하품이 나오게 만들 수도 있는, '괴팍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타블로(tableau)들의 퍼레이드로 일관하는, 여백 하나 없는 질리도록 꼼꼼한 미장센도 그러하거니와 오언 윌슨과 웨스 앤더슨이 함께 쓴 각본은 도무지 관객이 안심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순간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쇼트는 잘게 쪼개져 있으나 영화의 호흡은 롱테이크 화면처럼 흐느적거린다. 구성요소들을 뜯어서 설명할수록 영화의 내용(?)에서는 자꾸만 멀어지는 이상한 영화가 바로 『로얄 테넌바움』이다.

아, 그렇다고 영화가 무지 심각하다거나 난해한 건 결코 아니다. 편안하고 쉽지도 않고 심각하거나 난해하지도 않은 영화? 그럼 도대체 뭐냐고 반문해도 할 수 없다. 영화를 보라고 말할 수밖에...



진 핵크만, 기네스 팰트로, 안젤리카 휴스톤(『아담스 패밀리』의 그 엄마), 벤 스틸러(『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얼빵한 주인공), 빌 머레이(『미녀 삼총사』의 미녀들을 조종하는 그 복받은 넘), 대니 글로버(『리셀 웨폰』), 오웬 웰슨, 루크 웰슨. 여기다 알렉 볼드윈의 나레이션까지.  그야말로 초호화판 배역이다.


이 8명의 배역은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균형잡힌 비중을 보인다. 그럼에도 8명 각각의 캐릭터는 뚜렷하게 설명되고 있어 헷갈리거나 영화의 흐름을 놓치거나 할 염려는 없다. 제각기 한가닥 한다는 스타들을 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각자 맡은 연기에만 최선을 다하도록 묶어낸 것에서 다시 한번 감독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여러 명의 스타들이 참여하면서도 균형 잡히고 세련된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역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숏컷』이나 현재 개봉중인 『고스포드 파크』를 보면 영화가 감독의 예술임을 새삼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불친절한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먼저 영화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엔 신경쓸 필요가 없다. 지금 당대의, 뉴욕의 이야기이지만 회화적 색채로 가득찬 화면이나 찌그러지고 색이 바랜 택시들을 비롯한 영화의 소품들은 자주 영화의 시공간을 헷갈리게 만드니까. 

다음으로는 3자녀의 스타일(패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스, 마고, 리치의 패션스타일은 확고부동하다. 지들이 무슨 스머프도 아니면서 영화 내내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 물론 평론가적으로 해석하자면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 겪은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장녀 마고 테넌바움(기네스 펠트로)은 입양된 딸이다. 희곡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한 극작가이지만, 아버지 로얄이 입양한 사실을 대놓고 주위에 까발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런 그녀의 심적 혼란은 분열을 상징하는 듯 마고의 패션은 지극히 언밸런스하다. 

체크무늬 원피스에 심플한 로퍼 모피, 옆가르마의 단발머리에 빨간 핀을 단정하게 꽂은 소녀스러운 모습과 눈가를 까맣게 떡칠하고 담배를 피우는 퇴폐적인 모습이 공존하는, 겉으로는 바른 생활 소녀로 비춰지지만 알고 보면 매우 타락한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모습(20여년 동안 담배를 피우는 골초지만 아무도 심지어 그녀의 남편조차 모른다)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둘째 채스 테넌바움(벤 스틸러)은 어릴 때부터 사업분야에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사업자금을 횡령하자 로얄을 고소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엄청나다. 게다가 아내는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일찍 죽어버렸다. 그런 그의 성격은 빨간색 아디다스 츄리닝에 파란색 퓨마 운동화로 표현된다(그의 아들 둘도 똑같은 패션이다. 삼부자가 맞춰입은 빨간 아디다스 츄리닝, 파란색 퓨마 운동화, 앙증맞은 파마머리가 가져다주는 웃음의 향연!). 영화내내 그 빨간색이 풍기는 촌스러움과 엉뚱한 행동으로 영화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는 채스가 무언가 자기 세계에 빠져 있다는 고립감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온갖 민방위훈련(?)을 실시하는 등 품 속에서 아이들을 풀어주는 일이 없을 정도로 융통성이 없으며, 회사도 집안에 차릴 정도다.

셋째 리치 테넌바움은 세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식으로 묘사된다. 유명한 테니스 스타이지만 입양된 누나 마고를 사랑한다. 남매끼리의 사랑? 그래서 리치는 헤어밴드와 아대, 스포츠 티셔츠에 양복을 입은 상식 밖의 모습으로 설정된다. 언뜻 보면 완전히 히피 스타일이다. 양복에 스포츠 티셔스. 글쎄, 남매간의 사랑이 상식밖이긴 하지만. 그러나 리치 스타일의 압권은 아무래도 마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머리와 수염을 깎고 손목을 그을려는 순간에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영화에서 심어놓은 암시와 은유는 꽤 많지만, 감독이 인용한 영화를 따라가는 퍼즐 게임이 아니라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어떤 인터뷰에서 웨스 앤더슨은 "책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책이 되는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는데, 그의 이 바램은 거의 100% 성취된 거 같다.

어쨌거나 『로얄 테넌바움』은 그 평가가 극명하게 대비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둘도 없는 걸작품의 목록에 올려 놓든지, 따분하고 지루하고 황당한 영화였다는 식으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든지. 그리고 이건 결국 영화를 보는 각자의 안목이 좌우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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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불경스러움'을 시비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저의 생각이 아니라 『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단순한 기표적 의미보다는 그 상징성을 고려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written date:2002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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