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사랑'이라는 말이 갖는 복잡미묘함을 문학 작품 속에서 끄집어내 정리하고자 했던 시절이 있었다. 천리안 시절로 기억하고 있으니 꽤나 오래된 셈이다. 우리 시대는 소설에서든, 영화에서든, 시에서든 어떤 형태로든지 사랑이라는 감정의 아우라는 넘쳐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아우라'는 결국 시간과 세월과 기억과 함께 가는 생명체라는 사실이다.
굳이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세월은 망각과의 싸움이자 기억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잊고싶을수록 오래 남는 나쁜 기억은 정신을 야위게 만들고, 간직하고 싶은 순간은 덧없이 망각에 잠겨 버린다. 안진우 감독의 데뷔작 『오버 더 레인보우』는 기억과 망각을 날실과 씨실 삼아 짜들어간 미스터리(?) 멜로 드라마다.
방송국 기상 캐스터인 진수(이정재)는 비 뿌리는 저녁 누군가에게 선사할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들고 차를 몰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한쪽 다리만 깁스를 한 정도라 별 무리없이 업무에 복귀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인해 자신의 대학 시절 기억 중 일부분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자신이 졸업한 뒤에도 남몰래 혼자 연모했던 이가 누구였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잃어버린 기억의 복원을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하게 된다. 전화 속에 남겨진 음성 메시지가 시발점이 되어 대학시절 같은 사진동아리에 있었던 연희(장진영)에게 도움을 구한다.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서 근무하는 연희는 처음엔 진수의 단짝 상인(정찬)과 연인이었다 헤어진 연유로 진수의 부탁을 거절하지만, 이내 과거를 재생하려는 진수를 돕게 되고, 그런 연희에게서 진수는 호감 이상의 끌림을 경험한다. 그러던 중 진수와 사귀었다는 후배 혜영이 등장하고, 진수를 향한 혜영의 적극적인 표현에 진수와 연희의 관계는 어색해진다. 하지만 진수는 혜영이 프리지어를 좋아했던 기억속 여인이 아님을 직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따라가면서도 『오버 더 레인보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찾아간다. 두 주인공 진수와 연희는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다. 남자의 사랑을 찾아주기 위해, 그와 그녀는 만난다. 두 주인공은 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사랑의 끝에서 시작으로 향하는 특별한 길, 켜켜이 쌓여진 사랑의 과정들을 관객 모두가 목격하는 설레임 속에 두 남녀의 사랑들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낸다.
멜로드라마이면서도 그 흔한 키스나 포옹장면 하나 안 나오는,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피해 새로운 이야기로 사랑의 '원형'을 확인시켜주는 영화인 셈. 어쩌면 『8월의 크리스마스』 나 『미술관 옆 동물원』 류와 일맥상통하는, 우리나라 멜로 영화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특별한 울림의 사랑이 그려지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멜로드라마와 짝을 이루어 진행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 축은 추억 혹은 '기억의 재구성'에 관한 문제다.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으로 환원된다 할 수 있을 게다. 정체성이란 삶의 궤적이고 그 흔적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의 내면에 저장되는 것이니까. 관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래 묵을수록 좋은 게 술과 친구라는데, 오래된 친구는 지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추억은 사람을 미소짓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추억이 그럴 수 있는 건 아닐 게다. 추억 혹은 기억으로부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으려면 인생의 전환기, 그러니까 관계의 추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할 수 있는 정도의 연륜(?)을 경험한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이런 인생의 전환기를 통과해본 사람들에게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볼 수 있는,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영화다.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배우 장진영이라는 캐릭터다. 『소름』에서의 그 강하고 어두운 캐릭터에 이어, 한눈에 쏙 들어오지는 않지만 '어떤' 순수와 여백을 가지고 서서히 사람을 사로잡아가는, 못다 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정도로 상큼한 이미지다. 심은하가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자신의 연기와 이미지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했다면 장진영은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어떤 하나의 캐릭터만이 아니라 모든 주어지는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장진영의 이런 모습은 『국화꽃 향기』에서 다시 확인해볼 수 있으리라.
일직선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기관차처럼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광분하는 이때 자신만의 소중한 추억을 되찾고 싶은 사람들은 조용히 극장 문을 두드려 보시기 바란다. 어쩌면 잃어버린 옛사랑이, 추억이 그대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수의 무지개를 찾는 여정과 함께 하는 음악 「Over the Rainbow」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Judy Garland가 불렀던 바로 그 곡이다.
written date:2002.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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