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박하사탕』 O.S.T. 음반을 이야기 하면서 언급했었지만, 이창동 감독은 역시 리얼리스트다. 영화판에서, 영화감독에게 리얼리스트라는 게 무조건적인 칭찬으로만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작가'라는 위치를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작가라는 위치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과 언제나 평행선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독자와 관객 앞에서 최소한 자신의 할 말을 추스르고 마음에 없는 말이나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게 적어도 작가라는 이름을 지키는 최소한의 자존심에 해당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적어도 상업성(이걸 '직업의식'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미화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작가라는 자존심을 쉬이 버리지는 않을 맨 앞줄의 감독이라는 믿음을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에서도 당당하게 드러낸다.
'경쟁력 제로'의 인간 홍종두.
"전 삼촌이 싫어요. 이런 말 하면 안되겠지만, 형님이나 어머니도 마찬가지실 거에요. 삼촌이 없었을 때는 집안이 평온했어요. 아무 걱정거리도 없는 거 같았어요.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전 정말 삼촌이 싫어요."
자기 남편의 교통사고를 대신해 2년 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종두에게 형수가 하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짐작되듯이 2년 6개월 동안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면회 한 번 가지 않았고 이사간 집도 알려주지 않을 만큼 노골적으로 경원시 한다. 물론 종두 가족의 이런 노골성은 영화속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될 수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그는 이 경쟁사회를 살기엔 너무 경쟁력 없는, 한 가족에게 짐만 되는 인간이니까. 사회성 실조, 목표의식 부재, 자존감 결여의 이 경쟁력 없는 인간에게 세상이 보내는 눈길은 한결 같을테니까.
말 한 마디 하기 위해 온 몸을 뒤트는 뇌성마비중증장애인 한공주.
"아가씨, 옆집 여자가 밥은 잘 챙겨 주죠? 밥 안 챙겨 주면 이야기 하세요. 한 달에 20만원이나 주는데... 20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에요."
공주의 가족들은, 공주의 명의로 분양 받은 장애자 아파트로 입주하면서 공주를 전에 살던 낡은 아파트에 버려 두고 간다. 옆집 여자에게 매달 20만원씩 주면서, 공주에게 밥 챙겨주라는 부탁을 남기고. 이 대목은 관객에게 참 불편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고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종두에게 종두 가족이 보이는 경원시와는 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어쨌거나 종두는 가족의 냉대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그 속에 융화되어 있지만 공주는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우리 누구나가 그럴 수 있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함부로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기에 공주 오빠 내외의 처사는 관객들에게 심한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장애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사회적 약자의 한 유형으로서 한공주의 캐릭터가 선택되었지 장애인 한공주의 캐릭터가 선택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요약한 종두와 공주의 캐릭터 설명이 '전부 다'라고 할 만큼 영화 『오아시스』는 너무나 쉽고 단순한 영화다. 연신 코를 훌쩍거리며 어딘가 모자란 듯 말하는 종두와 말 한마디 하기 위해 온몸을 뒤트는 공주, 볼품없는 이 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놓고 아무런 수식이나 치장 없이 전형적인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간다. 좀 거칠게 교훈적으로 요약하면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남녀가 편견과 냉대를 딛고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빼고 더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딱 이만큼'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에게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다. 스토리텔링을 꼬아 놓았다든가 알 수 없는 복선을 심어 놓았다든가 하는 식으로 관객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멜로 드라마 구조이면서도 철저하게 주인공과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시켜 놓는 장치들 때문이다.
공주와 섹스하다가 들킨 종두가 경찰서로 잡혀가고, 종두의 가족들조차 종두에게 한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한치의 의심없이 강간으로 단정하는 데 더해 공주의 오빠와 합의금을 계산한다든지 하는 장면들. 그러나 가족들이 악하기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물들로, 관객 자신조차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게끔 그려진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류승완 감독이 이 영화에 출연(종두의 동생 '종세'역으로 나온다)하면서 이창동 감독의 연출기법을 훔쳐본(?) 걸 기록한 바에 따르면(『씨네 21』 365호) 설경구조차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 종두 스스로가 강간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지 못 하느냐'고. 이창동 감독과 '대판' 싸우는 지경으로까지 갔었는데, 결국 이창동 감독의 의견대로 따라간 모양이다. 사실 좀 애매모호한 부분이다. 종두가 아무리 사회의식 결여에 목표의식이 부재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지도 못할 만큼의 인간은 아니기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대목은 납득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관객에게 불편함 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씨네 21』 편집장 조선희씨 와의 인터뷰에서(『씨네 21』 364호) "나는 관객이 충돌의 경계에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내가 만든 싸구려 판타지의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경계선 밖으로 멀리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사랑은 서로의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일"이라고도 말한다. 영화에서 종두와 공주가 이루는 사랑의 정점에서 종두가 공주에게 해주는 일은 공주 아파트 앞의 나뭇가지들을 잘라주는 것이다. 혼자 사는 공주에게, 매일 보는 벽걸이 카펫의 오아시스 그림을 찔러대는 나뭇가지 그림자는 가장 큰 공포였던 것이다.
이 소박한 이창동 감독의 사랑의 정의에 담긴 진심을 외면하기란 참 힘들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 대목에서 만큼은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우리 편, 저편으로 구분돼 평행선을 달리는 구성을 작위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있다 하더라도, 경찰서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나와 마지막으로 하는 일,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자르며 춤추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영화자체가 그러하기에 온통 종두와 공주 관한 이야기만 언급했지만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 또한 뛰어나게 사실적이다. 종두의 형 내외, 공주의 오빠 내외, 공주 옆집 여자내외 등 영악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한두 가지씩은 대변하고 있기에 더더욱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캐릭터들이다. 인간들이란 자신이 가진 사악한 속성들을 사실적으로 드러낼 때 그걸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나가 불편해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 초반 핸드헬드로 다소 심하게 흔들리던 프레임은 중반 이후로 갈수록 핸드헬드로 찍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크레인 쇼트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안정감 있는 화면을 연출한다. 화면의 떨림이 너무 심해 6회분의 촬영을 전면 재촬영 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프레임을 구분해볼 수 있는 나조차도 크게 눈에 거슬리는 장면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반면 눈에 띄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영화음악 사용의 배제이다.
지난 번 『박하사탕』과 마찬가지로 음악은 이재진이 맡았다. 『박하사탕』에서처럼 뚜렷하게 이야기가 구분되면서 음악 또한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에 비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와 코끼리가 나오는 장면 말고는 어디에 음악이 쓰였나 싶을 정도로 『오아시스』에서의 음악의 역할은 미미하다 할 수 있다. 다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메인 타이틀의 경우는 이전의 음악들보다 좀더 리듬이 강화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타악기와 피아노의 반주, 그리고 바이올린 선율이 목관악기의 따뜻함과 섞인다. 그러나 성기완 같은 음악평론가는 『오아시스』의 O.S.T. 음반이 "어딘지 영화 색깔보다 조금은 지나치게 세련되지 않았나 하는 점은 약간 아쉽다"면서 "이번 영화에서는 약간 더 거칠었어야 영화를 더욱 살릴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굳이 별로 부각되지도 않는 음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재진 때문이다. 그가 맡은 영화음악 리스트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박하사탕』, 『파이란』, 그리고 『오아시스』. 음악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면, 위의 영화 목록들은 그의 음악 실력을 대변해주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지하고 투철한 작가정신. 이창동 감독의 작가정신은 철저하게 '리얼리즘'적이다. 현실의 핵심요소들을 진지하고 투철하게 바라보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듯하다. 물론 이번에는 '오아시스'라는 환상지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존재방식은 환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이다. 어쩌면 진부하기조차 하다. 그런데 이 진부함은 그냥 진부함은 아니다. 진부한 것을 그리겠다는 마음의 발로로서 진부하게 된 그런 진부함이다. 하나도 어려운 게 없다. 아니, 사실은 의도된 어려움이 거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굉장히 의도된, 어떤 의미로는 매우 세련된 이미지들이다.
이창동 감독의 리얼리즘적 작가정신을 보고 있노라면 '표현(하기)'이라는 것에 대해서 더 생각할 필요가 생긴다. 현실 속에 가만히 살지를 않고 그걸 '표현'하면서 산다. 그 속에서 어떤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언급처럼 "'인간의 타락'은 허용하지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의 타락'은 인정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난 그가 앞으로도 그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결코 버리지 않을 유일한 감독이라는 데 주저없이 손을 들게 된다.
written date:200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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