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메멘토]를 보고 나오던 어느 이른 아침의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밤세워 본 3편의 영화가 혼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메멘토]의 거친 시퀀스의 이음새를 따라가느라 집중했던 사고의 풀림에서 오는 노곤함, 그리고 신체적 한계를 넘어선 육신에서 오는 나른함까지... 하여 새벽의 텅빈 고속도로를 질주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메멘토]의 시퀀스들을 조합할 엄두조차 못하다 10여 일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쩌면 감독과 퍼즐 게임을 하느라 잔뜩 긴장했던 뇌세포들이 한순간에 농락당했다는 느낌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배신감 비슷한 것에서 오는 허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감독 혼자서 2시간 남짓 관객을 실컷 농락한 뒤 '너의 기억이라고 별 수 있겠어?', 라며 히죽거리는 듯한 감독의 묘한 웃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않는 꼴이었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나의 과거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내가 선택하고 각색하고 촬영한 여러 편의 필름들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과거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인지, 찍고 싶은 부분만 골라 찍은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전혀 새로운 창작물인지도 애매한 그런 필름들 말이다.
자, 아주 간단한, 그러나 아주 심각한 문제 하나를 제기해 보자.
만약 당신의 '기억지속시간'이 10분이라면?
10분 뒤엔 10분 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영원히 10분동안만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메멘토]에서 어차피 관객은 10분 후 모든 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레너드 셸비와 동일한 입장이다. 그의 주변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 그가 가지고 다니는 모든 소품, 심지어는 레너드 셀비 자신의 '메멘토모리'마저 불확실한 것이니까.
만약 영화에서 레너드의 시점이 아닌 흑백시퀀스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진실은 무엇일까? 테디의 말처럼 레너드의 아내는 살해당한 게 아니라 레너드의 '단기기억상실증'을 시험하다 인슐린의 과다주사로 사망한 것일까? 그런데, 테디 역시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탈리와 테디는 왜 레너드에게 서로 믿지 말라고 하는 걸까?
결국 [메멘토]는 테디의 진술을 사실로 믿느냐, 아니면 레너드의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이느냐는 선택보다는 이 대상세계의 불확실함과 그 불확실함에 몸을 내어맡긴 존재의 혼돈을 질문하고 그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영화인 것 같다.
따라서 [메멘토]를 리뷰하면서 가장 쓸데없는 짓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일 게다. 레너드 셀비가 어떠하니, 그가 기억들을 보관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니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원고지의 칸수를 메워 손쉽게 원고료를 받아챙기는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결론적으로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각 상황 상황의 맞물린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메멘토]의 시퀀스를 따라가며 '나, 머리 좋지?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 라는 감독의 주문을 고스란히 받아넘겨야하는 고역을 맡은, 출연료 없는 [메멘토]의 또다른 배우들인 셈이다.
--------------------------------------------------------------------------
(비디오를 보시다가 앞의 장면과 헷갈리신다고 되감기를 한다든가 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한번 끝까지 본 다음 "도대체 이게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하신다면, 다시 한번 첨부터 끝까지 보시길...)
written date:2000 05 09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메멘토]의 시퀀스들을 조합할 엄두조차 못하다 10여 일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쩌면 감독과 퍼즐 게임을 하느라 잔뜩 긴장했던 뇌세포들이 한순간에 농락당했다는 느낌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배신감 비슷한 것에서 오는 허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감독 혼자서 2시간 남짓 관객을 실컷 농락한 뒤 '너의 기억이라고 별 수 있겠어?', 라며 히죽거리는 듯한 감독의 묘한 웃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않는 꼴이었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나의 과거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내가 선택하고 각색하고 촬영한 여러 편의 필름들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과거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인지, 찍고 싶은 부분만 골라 찍은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전혀 새로운 창작물인지도 애매한 그런 필름들 말이다.
자, 아주 간단한, 그러나 아주 심각한 문제 하나를 제기해 보자.
만약 당신의 '기억지속시간'이 10분이라면?
10분 뒤엔 10분 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영원히 10분동안만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메멘토]에서 어차피 관객은 10분 후 모든 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레너드 셸비와 동일한 입장이다. 그의 주변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 그가 가지고 다니는 모든 소품, 심지어는 레너드 셀비 자신의 '메멘토모리'마저 불확실한 것이니까.
만약 영화에서 레너드의 시점이 아닌 흑백시퀀스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진실은 무엇일까? 테디의 말처럼 레너드의 아내는 살해당한 게 아니라 레너드의 '단기기억상실증'을 시험하다 인슐린의 과다주사로 사망한 것일까? 그런데, 테디 역시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탈리와 테디는 왜 레너드에게 서로 믿지 말라고 하는 걸까?
결국 [메멘토]는 테디의 진술을 사실로 믿느냐, 아니면 레너드의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이느냐는 선택보다는 이 대상세계의 불확실함과 그 불확실함에 몸을 내어맡긴 존재의 혼돈을 질문하고 그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영화인 것 같다.
따라서 [메멘토]를 리뷰하면서 가장 쓸데없는 짓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일 게다. 레너드 셀비가 어떠하니, 그가 기억들을 보관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니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원고지의 칸수를 메워 손쉽게 원고료를 받아챙기는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결론적으로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각 상황 상황의 맞물린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메멘토]의 시퀀스를 따라가며 '나, 머리 좋지?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 라는 감독의 주문을 고스란히 받아넘겨야하는 고역을 맡은, 출연료 없는 [메멘토]의 또다른 배우들인 셈이다.
--------------------------------------------------------------------------
(비디오를 보시다가 앞의 장면과 헷갈리신다고 되감기를 한다든가 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한번 끝까지 본 다음 "도대체 이게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하신다면, 다시 한번 첨부터 끝까지 보시길...)
written date:2000 05 09
728x90
반응형
'읽고 보고 듣는 것들 >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안의 '오아시스' - '정상'과 '병리'의 경계에서 (0) | 2008.08.12 |
---|---|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 (0) | 2008.06.11 |
『로얄 테넌바움』 -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저 멀리 안 보이는 곳에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 '가족'의 이야기 (0) | 2008.04.17 |
<스모크>-사랑이라는 혹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감싸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0) | 2008.04.15 |
[피도 눈물도 없이] (0) | 2008.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