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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Movie

『동사서독 Ashes of Time』, "엇갈린 시간 엇갈린 인연"

by 내오랜꿈 2008.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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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Ashes of Time』, "엇갈린 시간 엇갈린 인연"



『동사서독』에서 시간이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어느 지점-어떤 시간상의 시점이라기보다는 내러티브의 구심점을 이루는 시·공간상의 어느 지점-에선가 멈춰 있다.

4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건 모두 과거의 시간이다. 그 과거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늘상(?) 그러하듯 그들에게 남은 건 "풀잎 하나가 스쳐도 살을 버히고 돌 하나를 밟아도 맨살이 갈라질" 것 같은 극도의 상실감과 회한이다. 상실을 회복할 순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고, 영원히 만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들의 시선 또한 결코 만나는 법이 없다. 엇갈린 시간, 엇갈린 인연들. 그러나 그것이 또다른 인연을 만들어내고 그 인연들 속에 회한과 상실감은 점점 깊어만 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동사서독』이 아니라 영어제목인 '시간의 재 Ashes of Time'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동사서독』은 이렇게 엇갈리는 시선, 엇갈리는 인연들을 마치 뒤틀린 공간에다 직조하듯 쇼트와 쇼트의 시점을 교차시킨다. 그 교차된 시간 속에서 사랑의 대상은 늘 비켜가고 따라서 그들은 욕망의 원을 그리며 영원히 과거의 시간으로 회귀하게끔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렇듯 왕자웨이의 영화언어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흐름을 철저히 해체시켜 버린다. 그냥 해체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의 인과 관계에 따라 맺어진 인연들을 특정 시점의 공간 속에 몰아넣어 뒤섞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순서가 아니라 내러티브와의 거리에 따라 재구성된다.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왕자웨이는 관객을 깊은 사색의 공간으로 몰아넣는다. 물론 생각하기 싫은 사람이야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너무나 근본적인, 그러나 너무나 상투적으로 다루어지는 사랑이라는 문제를 매우 극한적인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고하게끔 자극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만큼 극한적이며, 극한적인 만큼 진지하다. 이런 점에서 『동사서독』은 파격과 충격을 예술성이나 진지함과 동일시하는 상투적인 '컬트 무비'와는 차원이 다르다.


① 엇갈림으로 운명지워진 사랑



왕자웨이의 '화두'는 언제나 사랑이다. 그러나 그의 전작들이 평행선을 달리는 단절감이었다면 『동사서독』에서는 운명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 사랑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속 인물들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서독 구양봉(장국영)과 자애인(장만옥)의 관계는 내러티브 전개의 중심을 이룬다. 젊은 시절 서독은 검을 위해 여인을 버린다. 결국 명성은 얻었으나 타인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은 채 냉소적으로 변한다. 10여 년의 강호생활을 거치고 난 뒤에야 "무림에서 여인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그게 규칙은 아냐"라고 홍칠공(장학우)에게 충고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상처의 가해자는 자신을 버리고 형에게 간 자애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던 것. 반면 자애인 역시 서독의 소식을 전해주는 동사(양가휘)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했을 뿐"이라며 그녀의 헛된 소유욕과 자존심이 문제였다고 말한다.

① 영화 속에서 자애인이라는 인물은 전형적인 오이디푸스적 '이중구속'의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서독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정작 서독의 형과 결혼한다. 결혼식날 함께 떠나자는 서독의 갈망을 외면한 채 편안한 정착의 생활을 택한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서독의 사랑을 갈구하다 생을 마감한다. 서독을 택하든 아니든 그녀의 욕망은 비어 있는 다른 한쪽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가 갖는 이러한 '이중구속'을 파헤친다. 경쟁적 남근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적대감을 밀고 나가 (상징으로서)아버지를 죽인다면, 즉 그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부정한다면 그는 정신병자가 된다(라캉이 말하는 '배제'와 정신병이 그것이다). 반면 남근을 가진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동일시로 나아간다면 욕망에 대한 억압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정신병이냐 복종이냐'라는 양자택일에서 두 항 모두가 사실은 구속인 이중구속이라는 것이다.


왕자웨이는 이 과정을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회상으로 처리함으로써 이들간의 단 한번의 재회도 허용하지 않는다. 달리는 서독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끝끝내 서독에게 접근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엇갈린 사랑이 거역할 수없는 운명임을 암시하고자 한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상호간의 짝사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독이 비록 냉소적이었을 지언정 현실로부터 회피하지 않았다면 동사는 '취생몽사'라는 기억을 잃게 해주는 술에 의지해 과거를 망각하고자 하는 몽환적 인물로 그려진다. 동사의 사랑은 한번도 정착하지 못한 채 도화삼랑(유가령)과 모룡언/모룡연(임청하) 그리고 자애인 사이를 부유한다.


② 모룡언/모룡연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임청하라는 인물은 중국철학의 음양인인 동시에 정신분석학적 토픽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그녀는 동사를 사이에 두고 적대적 이해관계 속에 있다. 그-그녀의 사고와 행동은 이 적대만큼이나 상이하며 적대적이다. 이를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몰적인'(molar) 적대가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와 같이 이해관계에 따른 적대를 몰적인 적대라고 본다. 그것은 개별적인 사고와 의식에 독립적이며, 그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의식 이전적인' 것이다. 그들은 이를 '前의식적 차원'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욕망과 의지라는 차원은 '무의식적 차원'이라고 한다.

이 틈바구니에서 맹무살수(양조위)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친한 친구인 동사에게 부인(도화삼랑)을 빼앗긴 채 떠돌아 다니다 실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을 보고자 하는 그의 희망은 허무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③ 『동사서독』에서 사랑은 등장인물의 욕망과 삶과 행동을 코드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 곧 무엇인가를 생산하려는 힘(니체적 표현으로는 '권력의지')은 때로는 그곳에서 도피하고자 하지만, 또 때로는 그것을 반추하고 그것에 저항하며 그것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기억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취생몽사'라는 술에 의지하는 동사가 전자를 대표한다면, 실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룰 수 없는 희망(=욕망)을 꿈꾸며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는 맹무살수는 후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게다.

이렇듯 그들은 서로 스쳐가며 한번씩 만나고 관계를 가지기도 하지만 결코 사랑으로 맺어지지 못하고 평행도 이루지 못한 채 엇갈리고 얽히기만 할 뿐이다.



② 무협의 탈신화화

왕자웨이와 무협영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비정전』의 실패(?) 이후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자신의 영화를 찍겠다던 그가 무협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어떤 것일까?

왕자웨이 감독은 우선 기존 무협영화의 공식틀을 깨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한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 복수 등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검객들의 수평적 인간관계를 갖다 놓는다. 칼과 힘만이 지배하던 강호의 세계는 이제 입체적인 인간관계가 응축되어 나타나는 공간으로 상징된다. 곧 왕자웨이 감독은 신화적 영역에 갇힌 무협세계를 그 원형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초역사적으로 반복되는 보편적 인간관계를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다. 사막, 여인숙, 검객이라는 공간설정과 인물구도는 다분히 웨스턴 장르의 전형성을 반복하지만 그 내용은 '수정주의 웨스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이제 무협세계는 탈신화화된 역사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된다. 내러티브는 일반적인 기승전결의 틀을 벗어나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8명의 내면 흐름을 따라 전개된다. 카메라는 고정된 시점없이 그들의 내면만을 철저히 주시한다.

결국 동사, 서독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이제 무협소설 속의 '강호인'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 전형적인 '한 인간'이 된다. 이 점에서 왕자웨이의 야심은 김용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내공을 연마한 고수의 면모를 보인다. 칼과 피가 튀지 않는,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는 한편의 대서사시는 이렇게 해서 완성된다.



③ 하나의 중국, 하나의 아이덴터티를 위하여

왕자웨이에게 비친 홍콩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동사서독』은 중국 대륙의 역사를 받쳐주는 정신적 지주인 무협물의 신화에서 시작해 '지금 여기' 홍콩에까지 이른다. 곧 『동사서독』은 홍콩이 중국대륙으로 반환되었음을 전제로 할 때 홍콩의 역사는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담고 있다.

홍콩의 정체성이란 어떤 것인가? 구룡반도의 한 귀퉁이, 중국 대륙이라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살아 있고 그 위에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가 공생하고 있다. 아마 지구상에서 홍콩처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모호한 지역도 드물 게다.

『동사서독』의 동사와 서독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태어난, 태어난 곳도 태어난 시간도 모르는 탈역사화된 인물이다. 무사라지만 그들은 위치와 계급도 없는 중국의 전형적인 영웅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든 존재할 수 있는 무사들이다. 이들은 기억을 통해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며, 그들에게 현재는 과거와 과거를 이어주는 순환의 고리이면서 현재일 때에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동사서독』은 과거에 과거가 꼬리를 무는 연쇄를 이루지만 그것은 결코 순차적인 시간의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의 과거는 특정한 역사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체험의 연속이다. 그래서 『동사서독』은 (어떤) 상관이 있으면서 결코 연관지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면에서 평론가들은 『동사서독』을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④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동사서독』의 (강호인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군상의 모습을 『타락천사』의 인물들로 대치시켜 보면 말이다. 무사/칼의 현대적 모습은 아무래도 킬러/총일 게다. 그외 살인/고독/실연 등은 인간사의 보편적 화두일테니까 별 차이는 없을 테고. 따라서 『중경삼림』에서와 같은 세련된 인간의 모습이 아닌 『타락천사』의 거친 폭력의 모습이 훨씬 더 『동사서독』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점에서 “『동사서독』은 사막의 『중경삼림』이자 무림의 『타락천사』처럼 보인다”는 이정하(「무림, 멈춰진 시간의 이미지」,『씨네 21』31호, 12월 5일자, p62)의 말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현재라고 믿고 또 미래라고 꿈꾸는 게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 과거가 곧 오늘이라는 이야기다. 왕자웨이에게 '1997'년은 어쩌면 특별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홍콩의 과거가 곧 미래의 그 어느 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왕자웨이는 짝사랑하는 홍콩과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그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믿을 뿐.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을 통해 왕자웨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얼마나 표현된 것일까?


⑤ 그는 Berenice Reynaud 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사서독』에 관한 나의 주된 목표는 인물들의 감정적 상태에 대한 상징으로서 기능하는 어떤 정신적 고독을 발견하는 것이다. (…) 시간은 가고 사람들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내가 그토록 시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마도 내게 항상 영화인으로서 지켜야 할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정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타인과 소통하려는 욕망이다." (『시네필』15호, PP 24~25)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가 일차적 목표로 두었던 '정신적 고독의 발견'이라는 면에서는 분명 성공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욕망'은 한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마치 너무나 난해한 화면구성 때문에 관객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중경삼림』이 있으니까.

written date:1996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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