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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에밀 쿠스트리차, 『집시의 시간』

by 내오랜꿈 200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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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민중'의 시간
에밀 쿠스트리차, 『집시의 시간』



1. 소수자의 언어, 소수자의 몸짓, 소수자의 영화

영화의 힘은 아마도, 손으로도 만질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으며, 눈으로도 볼 수 없지만 지극히 강렬한 하나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데, 그리고 아마도 그 현실을 넘어서는 미세한 흐름들(다른 공간, 다른 시간선, 다른 정서들)을 감지하게 해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영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이다. 마치, 불타오르는 듯한 반 고흐의 하늘과 만물을 숨쉬게 하는 코로의 대기에서 우주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 '하늘'과 '나무'의 형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한 화가의 색채와 붓터치 때문이듯이.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는 우선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그리고 흔한 평가대로, 동화적이고도 초현실주의적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문제는 이런 시끄러움과 어수선함과 초현실성 등등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들뢰즈가 카프카의 문학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소수집단의 문학은 필연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띤다. 때문에 소수집단에 속하는 '개인 작가'의 발화는 결코 '개별적'이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교도, 회교도, 카톨릭과 크리스찬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아시아의 가장자리인 동시에 유럽의 경계선으로서의 사라예보, 그리고 "미디어가 시작하고 연장하고 끝낸 전쟁"(에밀 쿠스트리차)의 기원지인 발칸반도에서 살아온 에밀 쿠스트리차의 『언더드라운드』를 둘러싼 그 무수한 정치적 논쟁들을 떠올려 보라! 『언더그라운드』가 보스니아의 학살행위를 정당화하는 지능적인 프로파간다라고 공격했던 프랑스의 우파들을 향해 그는 외친다. : "과연 그들은 내 영화를 보고 비판하는 것인가? 당신들은 다른 지역에 대해서 늘 그런 식이었다. 스탈린 시대, 모택동 시대, 혹은 지구상의 모든 분쟁에 대해 그런 식으로 개입해왔다. 나는 아프가니스탄과 보스니아가 같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지적 테러리스트들을 경계한다. 논쟁은 올바른 지역에 갖다 놓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그 지역은 논쟁 이후에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지배 집단에게는 미디어를 통해 구경할 수 있는 단순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사건(그것이 전쟁일지라도!)이 소수집단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소수 집단의 작가로 하여금 '아직 오지 않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사유, 그리고 다른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 어떻게 소수자의 언어로, 지배문화와는 다른 소수자의 문화를 이야기할 것인가? 에밀 쿠스트리차가 죽음이 삶을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뜻밖의 에너지로 고통에 대응해가는" 집시들에 주목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중에서 집시의 삶을 다룬 것은 『집시의 시간』과 최근작인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두 편이다. 이 모두에는 집시들의 음악이 있고, 그들의 불가사의한 마법이 있으며, 결혼식과 장례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는 『집시의 시간』의 또 다른 변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영화에서 집시의 삶을 그려내는 방식은 상이하다. 『집시의 시간』이 복종 아니면 죽음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앞에 벌겨벗겨진 집시들의 절망적인 삶을 그려내는 데 반해,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는 보다 수선스럽고 어지러운 익살을 통해 집시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그려낸다. 그렇다면 에밀 쿠스트리차는 그만 정치적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비관주의로부터 쉽게 낙관주의로 돌아서 버린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잔인한 현실'에는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둘 다일 수도, 그러나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그의 영화가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냐를 판결짓는 데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문제는 그가 그려낸 '집시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여전히 '논쟁 이후의' 발칸반도에서 삶을 지속해야 하는 '집합적' 민중들의 삶을 끌어내는 것에도 있지 않다.

클레는, 민중은 본질적이지만 또한 가장 결여된 것이라고 하면서, '도래할 민중과 함께 도래할 예술'을 이야기한다. 소수자의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이런 관점으로부터이다. 즉, '소수자'란 단순히 지배받는 상태로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결여된', '생성 중인' 민중인 것이다. 우리가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에서 정말로 감지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결코 특정한 영토를 이루면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집합적 민중'이 아니라 영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통해, 몸짓을 통해 다른 삶과 다른 존재양식을 보여주는 우주적 민중, 도래할 민중으로서의 집시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의 방언으로서의 이미지와 사운드.


2. 무엇이 소수자의 삶을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는가?
  - 세 번의 결혼식, 그리고 한 번의 장례식.

이 영화에서 우선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 : "사물들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고, 익살스러운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웃의 소녀를 사랑하는 '사생아' 집시 소년 페르카니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먼저, 답을 단순화하자 : 서구적 합리성. 그리고 이 서구적 합리성을 '망원경'으로 잠시 조망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자.

서구적 합리성, 혹은 근대라는 푯말이 붙은 도시에는 어떤 건물들이 있을까? 온갖 너절한 건물들 말고, 가장 눈에 잘 띄는 몇 개의 건물만 살펴보자. 가족, 학교, 공장, 병원, 그리고 교회. 소름끼치게도, 이것이 '근대 도시'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다. 그 건물들을 들락거림으로써 우리는 이성과 노동과 도덕으로 무장된 '근대적 주체'로 탄생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성과 과학으로 '미신'과 '마법'과 '주술'을 정복해야 하고, 노동을 통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올바른 신앙과 도덕으로 온갖 '거짓들=악'을 물리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집시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들이 아플 때 찾는 것은 병원이 아니라 집시 할머니의 '신통력'이며, 페르카니 같은 건장한 청년도 아무런 직업 없이 즐겁게 '놀고 먹는다'('돈'에 의해 지배되는 아즈라의 엄마는 이런 점에서 더 이상 '소수자'로서의 집시가 아니다). 또 그들에게 '하느님'이란 노름판에서나 필요한 존재, 그나마 일이 잘 안 되면 온갖 욕을 다 얻어들어야 하는 고달픈 존재(삼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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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촌'은 이 영화 속에서 무척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그는 밉지만 교활하지 않으며, 서구적 삶을 동경하기는 하지만("난 독일로 갈 거야") 결코 서구의 근대적 욕망에 지배장하지는 않는다. 선-악, 이성-광기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쿠스트리차의 독특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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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말한다. "하느님 한번만 도와줘요. 하늘에 있어요? ... 협상해요. 오늘만 이기게 해줘요. 그러면 교회에 다닐께요.")일 뿐이다. 따라서 결국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 영화는 서구적 질서를 해체하고, 비합리적, 마술적, 이교도적인 무질서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자유로운 영혼들의 세계는 서구적 질서에 잠식당한다. 페르카니의 삶과 꿈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처절하게 짓밟혀가는 소수자의 삶,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몇 가지의 모티프와 그것들의 반복을 통해 형상화된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를 열고 닫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자, 이 영화의 리듬을 창조하는 중요한 모티프 중의 하나는 결혼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신부가 술에 취한 남편을 때리면서 내뱉는 말("내 청춘을 짓밟는 인간들")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메드의 새 신부가 페르카니를 향해 총을 쏘면서 내뱉는 말과 함께 후렴구를 이룬다. 서구에서 '결혼식'이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게 되는 신성하고 행복한 의식인 것에 비해(특히 우리나라에서 '결혼식'에 대한 알 수 없는 그 집착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번의 결혼식은 술(첫 번째 결혼식)과 의심(두 번째 결혼식. 페르카니와 아즈라)과 복수(세 번째 결혼식)로 얼룩진 '끔찍한 난장판'일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에밀 쿠스트리차가 그려내는 집시공동체는 결코 '가족적' 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가족'이란 폭력과 배신과 돈으로 엮어진 '거짓말의 친인척'에 불과하며(아즈라의 가족, 아메드의 가족), 오히려 집시는 이런 가족적 배치를 뛰어 넘는다. 사생아-삼촌, 사생아-페르카니, 사생아-페르카니(아들).... 집시의 가족은 그저 '근본 없는' 사생아들의 공동체다. 사생아-삼촌에 의해 허공에 떠버리는 집채가 보여주는 바, 가족이란 그 얼마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상자짝인가.

그러나 서구의 근대는 '가족'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되묻고 이에 답하게 함으로써 '가족'을 어떤 개인도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성곽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사생아'임을 확인당하게 된 순간("너 같이 근본도 모르는 놈한테 내 딸을 줄 수 없어"), 즉 자신의 '정체성'이 의문에 붙여지는 순간으로부터("엄마는 누구였어요?", "아빠는 누구였죠?"), 이제 페르카니의 삶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과 고통이다. <페르카니를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는 첫 번째, 정체성에 대한 강요>. 

정체성이란 성장하면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강요에 의해 내면화되어버린 질문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짐으로써 점차 '당위'로 자리잡아 간다. 그러나 이 정체성이란 '엄마-아빠-아이'라는 가족 삼각형 위에 개체를 고정시키려는 근대의 핵심 전략이 아니던가. 이 영화의 두 번째 결혼식, 즉 페르카니와 아즈라의 결혼식에서 페르카니는 자신과 다른 집시들을 향해 울부짖는다 : "내 아이가 아니예요. 사생아를 키울 수는 없어요." / "사생아를 키울 수 없어. 팔아치우고 우리들만의 애를 갖자." '나'의 아들, '나'의 아버지... 사생아들의 집시공동체는 파괴되고, 그 자리에 혈통으로 무장된 근대 가족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세 개의 결혼식들은 그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내포한다.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간격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인물은 아메드이다. 아메드는 잔인하지만 애처로우며, 교활하지만 동정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그는 '티토주의자'이면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재워 주고 먹여 주는 '착한 사업가'이며, 무엇보다도 <자기>자식에 대한 사랑<만> 끔찍한 '자비로운 아버지'이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아버지-아메드! 

자신의 정체성을 강요당했던 페르카니는, 이제 아메드에 의해 자본주의의 욕망을 강요당한다. "동생 병 고치기는 틀렸군. 결혼도 못하고, 큰 집도 못 짓고... 넌 아마 구질구질한 개처럼 살거다."라는 아메드의 언표는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간접화법이다. '자본주의의 개' 아메드는 "모든 것을 화폐화하라!"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을 따라 아이들의 신체장애를 이용해 돈을 모은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하는 자에게는 자비롭게 설교한다 : "커피와 흰 빵 그리고 치즈 좀 먹어라. 부족한 게 뭐니?... 뭐든 말만 해. 휴일을 주랴? 병가가 필요해? 이게 나한테 보답하는 거냐? ...얘야. 일하지 않으면 행복도 없다." 그렇다. 자본주의야말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가? 그런데 누가 감히 자본주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페르카니를 잡아먹을 듯이 괴롭히는 두 번째, 자본주의적 욕망에 대한 강요.

집시 공동체를 떠나와 진흙탕 속의 개-되기를 경험한 페르카니는 이제 대지와 물과 불과 공기의 신화를 버리고 '큰 집'의 신화를 갖는다. 그의 익살스럽고 즐거운 '마술'은 이제 동정과 함께 화폐를 구걸하는 슬픈 '노동'이 되어 버렸으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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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폐 형태는 화폐화되는 한에서, 다시 말해 가치화되는 한에서만 상품이나 노동력의 '가치'를 객관화한다. 화폐화되지 않은, 혹은 화폐화되지 못하는 것(비-가치적인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치 없는 것(몰-가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진경, {맑스주의와 근대성}, 문화과학사, 175쪽. '마술' 역시 그것이 화폐화되지 못하는 한, 즉 어떤 식으로든 '노동'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한, 자본주의적 배치 속에서는 '몰-가치한' 재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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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면조와 소통하던 그의 풍요로운 방언은 돈을 숭배하는 황폐한 자본주의의 언어로 바뀌어 버렸다 : "(밀라노) 여긴 왕이 사는 곳 같아요. 아름답고 사치스러워요. 꼭 환상을 보는 듯 하답니다." 

페르카니는 자신을 노예로 만든 아메드에게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형제'가 된다. 그러나 이 순간은 동시에 페르카니가 자신이 태어난 소수자적 문화로부터 확실하게 결별하는 순간이자, 자본주의에 의해 완전히 포획된 신체가 되는 순간이다. 즉 그것은 페르카니가 두 가지의 강요를 모두 내면화시킴으로써 근대적 주체로 확립된 순간인 동시에 어른이 된 순간이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아즈라와 페르카니의 결혼식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 아이를 갖으려는 욕망(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려는 욕망)과 '큰 집'을 갖으려는 욕망이다. 두 번째 결혼식이 가장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절망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페르카니를 배신한다. 정체성에 대한 강요는 끝내 아즈라의 죽음을 부르며, 자본주의적 욕망에 대한 강요는 허무와 삶에 대한 경멸을 낳는다. : "인생이란 건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답니다... 처음엔 보물을 내려 주더니 그걸 뺏어가는 벌을 내린 거죠... 하지만 지금은 가여운 운명의 희생자일 뿐이예요." 초월적(마법적) 힘과 유머와 음악과 꿈과 믿음을 제물로 바치고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서구적 근대의 삶. 

그러나 이와 달리, 세 번째 결혼식은 앞의 두 결혼식의 또 다른 변주이지만, 이 영화를 전혀 다른 리듬으로 되돌리는 모티프이다. 왜냐하면 이 세 번째 결혼식을 거침으로써 페르카니는 비로소 처음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모티프를 통과함으로써, 그는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칠면조인 동시에 진정한 영혼의 결합을 상징하는 면사포를 본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너무 먼 세계이다. 이렇게 보자면, 『집시의 시간』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세 번의 결혼식은 이 영화의 중심인물인 페르카니가 다른 영혼과 다른 육체를 갖게 되는 세 번의 계기이자, '죽음'이라는 한 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해석자의 해석의지를 다른 방향으로 힘껏 밀어붙일 수 있는 마지막 모티프를 남겨 둔다. '결혼식'의 마지막 변주로서의 '장례식'. 탄생을 내포한 결혼식과 소멸을 내포한 장례식의 심상치 않은 공존.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 작품에서는 '결혼식'이 죽음과 종말을 향하는 반복인 반면, 장례식은 유머를 통해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단 한 번의 모티프이다. 페르카니의 죽음 곁에는 어린 아들의 삶이 놓여 있다. 그러나 아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자'에 숨어 죽음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도망친다. 바람부는 모래사막에 가느다란 선을 그리면서. 따라서 페르카니의 삶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긴 여정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또 다른' 페르카니(페르카니의 이중체)의 이 마지막 '도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으로부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로부터 전혀 다른 것을 끄집어 낼 수 있게 된다. 즉, 소수자 집단의 다른 존재방식과 다른 언어, 다른 배치.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다른 표현형식, 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민중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3. 서구적 합리성에 맞서는 이교도의 원리
-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신, 삶과 교감하는 꿈

에밀 쿠스트리차가 태어난 사라예보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로서, "억눌리고 오래되었지만 정복당하지는 않은 상상력의 생생한 힘에 의해 유지되는 비극적인 심장"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빌자면 "인간 감정들을 엄격하게 구분짓지 않고, 유태, 기독교, 카톨릭 문명처럼 단호하고 엄격한 카테고리가 없는" 그리스 정교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술적이고 초현실적인 그의 영화 스타일은 기독교주의가 결코 깊이 뿌리박혀 있지 않은 이러한 '이교도의 토양'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을 믿지만 결코 하나의 신을 숭배하지는 않으며, 풍부한 몸짓언어와 선율적 소리를 가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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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많은 단어를 배웠긴 하지만 집시들이 쓰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새로운 말을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집시들의 언어능력과 그것의 선율적 소리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들은 두 가지 언어로 말한다. 한 언어는 세르비아어와 비슷하고 다른 한 언어는 잠바스라고 불리는데, 후자는 <집시의 시간>에서 사용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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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간성과 동물성과 광물성이 구분되기 이전의 우주에 속하는 집시들의 세계와 '이교도' 쿠스트리차의 접속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교도'의 세계에서 '신'의 존재는 매우 독특하다. 그 신은 『신약』의 세계에 속해 있는 엄숙한 신이 아니라, 인간과 직접 소통하면서, 사랑하고 질투하고 노여워하는 『구약』의 신이다. 즉 인간 위에서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 혹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생명으로서의 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시들은, 근대인처럼 신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로 신과 대화하고 때론 신을 욕하면서 고통을 뛰어넘고 또 다른 삶을 긍정한다. 이 영화 속의 집시 할머니는 그런 식으로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치유하는 인물이다. : "신이 주시고 거둬 가셨는데 내가 어쩌겠니?" 또 이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광인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말한다. : "그들은 내 날개를 꺾으려 했어. 내 영혼은 새처럼 자유로와... 하느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 집시들하고는 일이 잘 안 돼서 다음 비행기로 돌아갔지만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 

"예수는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여러 아들들 중 하나일 뿐이다.... 종교의 최대 재앙 중 하나는 각각의 종교가 하나의 배타적인 구원자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신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증오한다. 진정한 교회는 신에 이르는 몇 가지 훌륭한 길들과 많고 많은 조그만 길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예수조차도 '내가 그 길이다'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는 더 이상 [신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도 더 이상 그 길이 아니다. 그러나 뭐가 어쩐단 말인가? 그는 신의 아들들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을.... 나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한다. 신은, 위대한 신은 항상 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에게 이르기 위한 우리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 길은 예수였다. 그리고 그 길은 더 이상 예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에는 길이 없다..."(로렌스, 「there is no real battle」중에서)

로렌스는 서구의 합리적 기독교 전통 속에서 탄생한 '유일신-하나님'이 어떻게 생성하는 절대 '신'에게 이르는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길들을 봉쇄해 버리는가를 위와 같이 설파한다. 그리고 그 절대적 신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부정하고, 다른 길을 통해 '절대신'에 이르는 탈주를 감행하도록 부추긴다. '이교도'인 쿠스트리차는 집시들의 신화를 통해, 그리고 그들과 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이 '다른 길'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리고 여기에 "나는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찾고 기도했다. 하나님아, 구름들 속에, 신기료 장수의 집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아, 내 영혼이 나타나게 해 다오. 아직 말을 더듬는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영혼아, 나에게 길을 가르쳐다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기는 싫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샤갈, 『나의 생애』, 책세상)라고 했던 샤갈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나는 유고슬라비아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 자문했었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이교도인데, 왜냐하면 그 나라들에는 기독교주의가 결코 깊이 뿌리박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남미 소설가들의 신비한 리얼리즘에 매료된 것은 사실이지만 똑같은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샤갈의 그림에도 매료되었다." 

샤갈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은 중력을 상실해버린 인간이다. 그의 이미지들은 거꾸로 혹은 뒤로 걸으면서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으며, '집' 안에 있지 않고 항상 '집' 밖이나 위에 떠 있다. 또 인간과 고양이와 새와 나무와 꽃들의 형상은 식별불가능한 상태로 뒤섞여 있다. 심지어 '신' 마저도 인간 '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집 뒤에, 구름 속에, 지붕 위에...) 존재해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예술가의 종교적 뿌리가 무엇이건 간에, 그들의 이미지는 서구의 기독교 전통과 합리성에 반하는 소수자 문화의 그것이다.

『집시의 시간』에서 이런 샤갈의 이미지들은 '꿈'을 통해 그려진다. 물론 이 영화 속에서 '꿈'은 일종의 예언으로서 기능한다. 즉, 페르카니가 자신의 정체성을 묻기 시작한 순간에 이어지는 첫 번째 꿈에서 '신(혹은 賢者)'로서의 할머니는 집시들의 의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아메드의 오른팔이 되던 순간에 이어지는 두 번째 꿈에서는 성당과 집시들의 몸짓과 음악을 담은 집이 불타버린다. 이것은, 현실 속에서 '집시'의 문화란 '꿈'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또한 집시의 삶이란 어쩌면 꿈 자체는 아닐까? 삶과 꿈이 혼연일체된 세계, 꿈을 통해 중력이 지배하는 영토를 벗어나는 삶, 그것이 집시들의 세계가 아닐까("제 꿈은 물거품이 되었어요. 꿈이 없는 집시는 죽은 거예요.")?

니체는 "신화에 의해 고무된 민족, 예컨데 고대 그리스 민족의 깨어 있는 낮은, ...학문적으로 무미건조해진 사상가들의 낮보다는 꿈에 훨씬 가깝다"고 말한다. 집시들은 사물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자신들만의 신화와 꿈을 통해 세계와, 신과 소통한다. 그들의 삶은 꿈과 분리불가능하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새처럼 자유롭다. 그리고 이것은 집시들에게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자신의 멜로디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며,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뜻밖의 에너지'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집시들의 부유하는 문화를 버리고, 그 대신 '가족'과 '큰 집'을 갖고 싶어 한 순간부터 페르카니는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린다. 그는 '신의 뜻'이라 믿고 아메드에게 복종했지만, 집시의 신은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페르카니를 싸늘하게 배신한다.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는' 죽은 집시, 합리적 근대인. 이전의 초능력이 칠면조를 날게 하려는, 즉 삶을 욕망하는 초능력이었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자신의 초능력은 '죽음'을 욕망하는 초능력이다. : "내 인생을 망친 놈. 가만두지 않겠어. 새가 되어서라도." 그는 이제 새가 되고 싶을 때조차, 죽음을 욕망하는 것이다. 삶을 경멸하고 죽음을 욕망하는 탈주.

따라서 페르카니와 할머니는 소수자의 두 가지 존재양식, 두 가지 믿음, 두 가지 탈주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영화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다지 주목되지 않는 인물들, 즉 할머니, 광인, 동네 할아버지 등이다. 그들은 결코 '민중'이라는 집합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간다. 작품 속에서 전면화되지 않지만, 그리고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도 없지만, 영화 속에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런 '낯선' 삶의 양식들이야말로, 우리의 '눈'이 탐색해야 할 강렬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4.

제3세계 예술가는 이중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 하나는 제국주의의 지배적인 관점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기원으로서의 전통이다. 그들 대개는 맥없이 지배적 언어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반대극으로 정신없이 달려가 '전통'을 복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후자 역시 전자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위험스럽다. 소수집단을 하나의 틀 안에 구겨 넣고 그들에게 '전통'을 각인시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지배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들의 다양한 꿈과 많은 신들을 거세하고 그들 스스로가 삶을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자의 예술은 이 두 가지 함정 모두를 피하면서 제 3의 선을 그린다. 소수자의 예술은 결코 선험적인 소수자, 집합적인 규정성을 부여받은 민중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그 점에 머무르려 하는 순간, 그것은 페르카니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예찬하든가, 기껏해야 또 다른 페르카니를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다행히, 아직까지 에밀 쿠스트리차는 그 두 위험 모두를 피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영토성'에 고착되지 않고 하늘을 떠도는 그의 이미지들,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형상들의 몸짓과 언어, 그리고 리듬으로 조직되는 영화의 사운드 때문일 것이다. 즉 소수자의 문화를 담아내는 카메라-눈을 통해 서구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그 틈으로 다른 삶을 생성하는 무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번, 소수 영화의 임무는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민중에게 말거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민중의 창조"에 기여하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연구공간 '너머'/수유연구실 philo-cinema3 <집시의 시간> (2000/4/28) 강사/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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