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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정지적 지향과 삶의 방식에서 오는 괴리

by 내오랜꿈 2015.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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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란 시간, 참 빠르다.

지난 주, 결국 노동당을 탈당하고 녹색당에 가입했다. 직접적으로는 15년, 간접적으로는 30년이라는 시간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한 셈이다. 뭐 거창하게 살아 왔다고 터닝포인트 운운할까만 내 나름대로는 1년 가까이 고민하던 문제였다. 내 삶의 방식과 내 사고의 괴리에서 오는 고민이라 할까, 아니면 정치적 지향과 실천의 괴리에서 오는 고민이랄까 뭐 그런 것의 연장선 상에서 당 내외의 여러 문제까지 겹치게 되니 자연스레 하게 된 고민이었다. 하나의 터닝포인트라고는 하지만 내 삶이, 내 사고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단지 지금 내 삶과, 흙을 만지고 살아가는 삶과 정치적 지향의 괴리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십여 년 넘게 고민하던, 생활과 의식의 괴리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여수에서의 고민

처음 여수로 갔던 때가 2003년 5월이었다. 빚만 지게 된 사업을 그만두고 나서 찾은 일자리. 연매출 6~700백 억 원이지만 안정적 영업이익을 남기는 회사, 하지만 경영을 개판으로 해서 부도 직전에 내몰린 회사의 관리팀장 자리였다. 석유화학 공장이 몰려 있는 여수 산단에서 장치산업의 수도꼭지 역할을 하는 밸브를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인지라 여수에서는 모를 수가 없는 회사다. 이런 회사의 관리직 임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이었기에 내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되는 몇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여수 민노당 생활협의회. 당연히 NL 애들이 다수인데 그들과의 관계 문제보다는 민주노총 소속이거나 민노당 당원들이었던 노조 조합원들의 부도덕한 행태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 민노당원이건 아니건 납품 관련 비리에는 노조원들 모두가 한통속이었던 것.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납품한 밸브를 사용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서 물건을 빼돌려 그걸 우리한테 되팔고(원가의 1/3 수준으로) 우리는 그걸 다시 정상적인 가격으로 납품하는 것이다.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인데 그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 중에는 민노당원들이자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있었다는 것. 이런 그들이 민노당 생활협의회에서 내가 일반 기업의 임원이라는 사실을 두고서는 '자본의 앞잡이'라는 식으로 대한다는 게 내 입장에서 보자면 황당한 일들이었던 셈이다. 난 일년에 칠백 억 원을 만지면서도 법인카드 한 번 개인적으로 사용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에 숭례문 현판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유홍준이 독일인가 유럽에 있다가 급히 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났지. 이때 방화 사건에 묻혀서 그렇지 유홍준이 유럽에 가면서 자기 부인을 문화재청 경비로 데리고 갔다는 게 알려지면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이걸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전에 정윤재의 뇌물 수뢰 혐의 사건도 그렇고 좌파 운동권들의 도덕성에 상당한 파열음이 들려오던 시기와 내가 고민하던 문제가 겹쳐지는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대다수 좌파들이나 일반인이나 차이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거지. 나는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인데 현실에서는 '도찐개찐'이었다는 거. 

그와 동시에 나에게도 변화가 생기는데 애초에 내가 회사에 합류하면서 했던 약속을 오너가 파기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부도 위기를 극복하면서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하여 함께 고생한 임직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할 계획으로 직원들의 퇴직금을 전부 주식으로 전환하여 자본금화 했었다. 반대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내가 손해보지 않도록 책임진다며 다 설득해서 준비했는데 막상 3~4년 준비 끝에 상장할 때가 다가오자 오너가 상장 못 하겠다며 틀어버린 것이다. 오너에 대한 분노보다는 몇 년간 고생했던 직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많았던지라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다.

이 두 가지 경험은 내겐 자못 심각한 화두였다. 

돈 앞에서,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은 이후 여러 가지로 간접 경험하게 된다. 당시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계의 이슈가 되고 있었지만 현대차를 비롯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한 작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하청기업 노동자들에게 이른바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민주노총에서는 목소리를 높이며 민중총궐기 대회니 뭐니 하는 곳에서는 투쟁의 선봉에 서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 그런데도 민노당 소속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고 구청장을 당선시키는 곳이라며 진보운동의 메카로 존중받는다는 것. 내가 경험한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내 삶이나 생각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고민들 덕택에 지금의 내 삶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본의 관리자로 참여하면서(회계업무라는 게 어차피 이런 것이니) 내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만 깨끗하다면 더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러기에는 여수에서의 실패가 너무 쓰라렸던 거 같다.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이상 어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위해 타인을 설득한다는 건 주제넘은 짓이 아닐 수 없는 것. 그래서 선택한 게 땅 파고 사는 삶이다. 어슬퍼게 농사 지으면서 때때로 비정규직 최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지는 않다. 능력 안 됨을 자발적 가난으로 포장하는 측면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 삶과 내 사고의 괴리에서 오는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위안거리니까.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한 뒤 인터넷에서의 온갖 싸움들도 그만두었다. '블로그'도 '당게'도. 초창기 내 엠파스 블로그는 완전 난장판이었다. 노무현 지지자들과의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너무 처절하게 기록된 곳이었으니까.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싸움이라고 목숨 걸다시피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젊었었던 거 같다. 얼마 전에 그 흔적들을 정리했다. 2007년 이전의 흔적들은 거의 모두 삭제해 버렸다. 허구한 날 진보 재편을 외치는 당 게시판에서의 활동도 그만두었다. 시골에서 땅 파고 있는데 맨날 진보 재편이 어떠니, 민중총궐기를 위해 광화문에 모이라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투쟁 방식인지... 

이런 고민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색당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환경, 생태 문제야 노동당도 기본으로 내세우는 강령이지만 실천방식에 있어 일상생활 속에서 자그마한 기획을 어떻게 조직해 내느냐의 차원에서 달라지는 것 같다. 물론 올초부터 지켜본 바에 따르면 구성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천차만별인지라 노동당에서와는 달리 내 사고방식과 다른 주장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는 단점이 있긴 한 것 같다. 뭐 이조차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다양성으로 인정하면 그리 못 견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노동당을 탈퇴하고 녹생당으로 갈아탄 걸 뭐 이리 장황하게 설명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지난 번에 쓴 글을 보완하는 셈인데, 나를 비롯한 좌파 운동권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사고방식에 갇힌 꼰대적 기질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NL과의 사투를 일삼던 기질이 녹아들어 있고 '우리는 이론적으로 옳았다'는, 쥐뿔도 나을 게 없는 사고의 오만함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인 것. 실제 삶에서 보면 경제적 이익의 추구란 측면에서는 '도찐개찐'이고, 현실참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NL 애들 발끝도 못 따라가면서 주둥이로만, 또는 쥐뿔도 나을 게 없는 사고의 오만함 속에서만 여전히 80년대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대는 변했고 타인의 삶도 변했는데,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습도 변했는데 여전히 생각은 과거에 얽매여 산다는 것. 나는 이런 것들 역시 꼰대 기질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기본으로 둔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문형이가 말하는 폭력성의 근원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문형이는 단순히 내가 쓰는 표현들 가운데 폭력적인 방식이 있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만약 내가 문형이가 말하는 폭력성을 찾으라면 전혀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폭력성은 표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사안을 바라보고 그것을 표출하는 삶의 방식에 들이대는 칼날 같은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과격했다면 그건 이 밴드에서 보이는 모습들 전체였지 특정인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건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세월호 때도 그랬던 것 같고 몇몇의 흐름들에서 분명 나는 분노했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폭력성은 이 밴드를 관통하는 그 어떤 흐름에 대한 것인데 문형이는 그걸 어떤 표현방식에서 찾는 것 같다. 그래서 내겐 이런 장황한 글을 써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부언하지만 무슨 수준을 인정하니 어떠니 하는 건 내 사고 속에선 없는 문제다. 타인을 어떤 수준으로 가르는 문제는 자신이 항상 타인들보다 우월적 지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허락된 사람들한테 흔히 나타나는 사고방식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여기서 어떤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그건 아마도 이 밴드의 어떤 흐름들에 관한 것이었을 거라 짐작된다.




오후에 올린 건 작년 7월 초에 쓴 것이라서 연결할려니 내가 다 어색한 거 같다. 내 머릿속이 그때 하고 바로 연결될지 모르겠는데, 뭐 연결 안 되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두 가지만 이야기 하자.

먼저, 밴드에서 긴 글 쓰면 왜 안 되는지 묻고 싶다. 스마트폰으로 읽는데 피곤하다고? 단지 그 이유 뿐인가? 필요하다면 스마트폰 아니라 피시로도 읽을 수 있지 않나? 어떤 주제에 대해 논쟁하고 토론하는데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 사람들이 모두 무슨 '얼리 어답터'라도 되는 건가? 여기 있는 사람들, 한 때는 모두 '자본주의 극복'을 외치거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양'하는 걸 자기 삶의 이정표로 삼았던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읽기 불편하니 어떠니 하는 소리가 왜 나오는가? 내용이 중요하면 그 내용을 담보하는 수단을 찾아야지 왜 '그릇'에 맞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평소엔 스마트폰으로 주고받더라도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두 번 피시로도 읽을 수 있는 건 아닌가? 매번 긴 글, 심각한 글 마주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이렇게 글을 쓰면 또 '폭력적'이라는 느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이런 소리 안 들을려고 그렇게 긴 글을 써서 에둘러 표현하려고 했던 거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만 하라고 하면 나도 한 줄로 쓸 수 있어. 그렇지만 잘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으니까 내가 길게 에둘러 왔던 걸 풀어 보자.

밴드는 '이러해야 한다'는 규정은 누가 설정한 적 있는지? 혹 이 밴드는 '이러해야 한다'는 규정이라도 있는 건가? 나를 제외하고는, 여기서 논쟁하면 안 되고 긴 글 쓰면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라도 되어 있는 건가? 그런 건가? "이게 무슨 일"이라니? 얼마든지 주고 받을 수 있는 글들 아닌가?

지난 번에 쓴 글에서 문형이가 보는 것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는 어떤 폭력성의 근원에는 이 밴드에 대한, 이 밴드 구성원의 생각에 대한, 이 밴드의 흐름에 들이대는 내 나름대로의 칼날이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에 다시 찬찬히 읽어 보니 그 칼날이란 게 쉽게 말하면 이 밴드에서 보여지는 모습에 대한 불만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마도 그런 불만들을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작년, 아니 재작년이네. 참 시간 빠르다. 세월호 사고 때 내 기억으로는 리본 다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식의 멘트를 날린 적이 있는 거 같다. 그때 내가 좀 어이 없어 했던 건 세월호 선장-이준석이었나?-을 두고 완전 죽일 놈 어쩌고 하는 글이 이 밴드에 올라왔던 거 같아. 물론 맞지. 그 놈 죽일 놈. 근데 세월호 사고 때 언론 동원하여 온갖 조작을 일삼고 선장이나 승무원들 죽일 놈 만드느라 혈안이 되어 있던 게 당시 분위기였었다. 사고 원인은 물론 명확한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뒷전인 채 선장 하나 죽일 놈으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정작 이 밴드에 선장 죽일 놈이라는 글 올라오는 거 보고 좀 황당했었다. 아마도 내가 이 밴드에 가장 큰 슬픔을 느꼈다면 그때였지 않을까 싶다. 그 글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여기 구성원들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풀어내는 글을 쓰거나 인용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거지. 분명 그런 순간들에 내가 몇 번 과격한 멘트를 남겼던 거 같아. 다른 예는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난다. 

사실 내가 이 밴드에서 보고 싶었던 모습도 여기 다른 사람들하고 별 차이는 없을 거야. 각자가 살아가는 모습들,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 생각들 같은 걸 보고 싶었겠지. 그런데 내가 이 밴드에서 본 건 삶의 고민, 생각 같은 건 거의 없고 맨날 어디 놀러 갔다 왔다는 거, 모이자는 거, 여행 가자는 거밖에 못 본 거 같아. 물론 문형이나 기홍이가 텃밭 가꾸는 거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살아가는지, 무슨 고민들을 하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그래서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직설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살아가는지, 그 생각들을 위해 무얼 준비하고 있는지를...

요즘 내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대학 친구들을 만나도 하는 이야기는 퇴직 후에 어떻게 살지,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더불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말만 시골에서 농사 짓겠다, 집 짓고 클래식 음악 카페를 차리고 싶다는 인간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한다. 내일이라도 당장 회사에서 쫓겨날 수 있는 냉혹한 현실을 항상 움켜쥐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지금은 잘 나가도 미래가 영원히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 밴드에선 난 그런 것들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나 말고 여기 구성원들 모일 때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있는 건가? 자본주의 극복과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양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서 자본주의적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닐 거야. 물론 내가 여기 구성원 각자의 인생에 털끝 만큼이라도 간여할 문제가 아니니 내가 뭐라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 그럼에도 내 이런 생각들이 이 밴드의 흐름 속에서 어떤 사안들에, 어떤 주제들에 아주 조그맣게 스며들어 나온 게 몇 번은 분명 있었던 셈이지. 이게 내가 생각하는, 문형이가 언급했던 폭력성이라는 것의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앞의 이 한 문장인데 이렇게 표현하면 타인의 생각이나 삶에 내 생각이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니까 그런 '폭력성'이라는 소리 듣는 게 싫어 그 긴 과정을 에둘러 온 것이다. 뭐, '알아 먹으면 좋고 못 알아 먹으면 할 수 없고'의 생각이었을 거야. 끝까지 신비주의적으로(?) 남겨 뒀으면 더 좋을 수도 있을 텐데, 이 쯤에서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아까 오후에 글 올리고 찾아 보니 지난 번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된 건 없고 문형이의 더 이상 답 하니 안 하니 하는 멘트만 남아 있는 것 같네. 글쎄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더 이상 읽니 안 읽니 답 하니 안 하느니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들 자기들이 어디 쯤 가고 있는 건지 한 번씩 자문자답 하지 않나? 내가 생각하는 건 무엇인데 나는 그것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고. 난 아직, '개엉터리'(이런 표현 요즘 많이 쓰더만)일지라도 여전히 자기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내가 품었던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 하겠더라고. 비록 별 하는 건 없어도 말이지. 여전히 자본주의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현실을 억압하고 있으니까. 요즘은 그래도 맨날 '진보재편'이라는 구호만 보다가 '기본소득'이란 현실을 보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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